서양음악사 6 : 고전주의 시대(Classical Music)

작성자

카테고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묶어 고전주의 3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음악 교과서에서 늘 보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자기 음악을 고전주의라고 부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1810년 독일의 작가 E.T.A. 호프만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다룬 긴 평론을 썼고, 1813년 그 글을 고쳐 다시 실으면서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오늘날 기악의 창시자로 꼽고, 세 사람의 기악에 똑같이 낭만적인 정신이 흐른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음악을 같은 시대 사람은 낭만적이라고 들은 셈입니다.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 음악의 뼈대로 배우는 소나타 형식이라는 말도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40년대에야 이론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글은 이름을 걷어 내고, 그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들었는지를 따라갑니다. 새로 생긴 청중 앞에서 하나의 주제가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음악, 그것이 고전주의 시대의 소리입니다.

고전주의 시대 한눈에 보기

  • 시기: 바흐 사망(1750년) 무렵부터 1820년 전후까지로 잡는 경우가 많고, 끝나는 해는 책마다 다름
  • 이름: 하이든·모차르트를 빈 악파로 묶은 것은 1834년, 베토벤은 그 뒤에 더해짐. 소나타 형식이라는 말은 1840년대 이론서에서 자리 잡음
  • 배경: 계몽주의, 공공 연주회와 중산층 가정의 악기·악보 보급으로 듣는 사람이 넓어짐
  • 만하임악파: 요한 슈타미츠의 악단, 악단 전체의 크레셴도와 미뉴에트를 넣은 4악장 교향곡
  • 빈 고전파 3인: 하이든(교향곡·현악 4중주), 모차르트(하이든 4중주 헌정·오페라), 베토벤(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 유명 전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1787년 만남은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는 이야기

고전주의 시대란 무엇인가, 계몽주의와 새로운 음악미학

고전주의 시대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활동하며 교향곡, 현악 4중주, 피아노 소나타, 협주곡 같은 기악 장르의 틀이 자리 잡은 시기입니다. 시작은 바흐가 세상을 떠난 1750년 무렵으로 잡는 데 대체로 의견이 모이지만, 끝나는 해는 책마다 다릅니다. 1820년 전후로 잡는 개론서가 많고,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827년까지 넣기도 합니다. 시대 구분은 나중에 정리하려고 그은 선이라 어느 해에 음악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대를 고전주의라 부르는 관습도 나중에 생겼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음악학자 라파엘 게오르크 키제베터가 1834년 빈 악파라는 말을 처음 쓸 때 그가 넣은 이름은 하이든과 모차르트 둘뿐이었습니다. 다른 저술가들이 이 말을 이어받으면서 베토벤이 그 목록에 더해졌습니다. 오늘날 세 사람을 묶는 빈 고전파라는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음악을 키운 바탕은 계몽주의입니다.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에 퍼진 사상으로, 전통적인 권위와 관습을 이성으로 따져 보려는 태도가 핵심이었습니다. 음악에서는 장식을 겹겹이 쌓은 복잡한 짜임 대신, 처음 듣는 사람도 따라갈 수 있는 또렷한 선율과 그 아래를 받치는 화음이 선호되었습니다. 바로크 음악이 여러 선율을 동시에 엮는 쪽이었다면, 고전주의 음악은 위에서 한 선율이 노래하고 아래에서 화음이 길을 잡아 주는 쪽입니다.

듣는 사람도 바뀌었습니다. 1725년 파리에서 시작한 콩세르 스피리튀엘은 표를 사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초기 공공 연주회 가운데 하나로, 1790년까지 이어졌습니다. 18세기 후반에는 런던과 빈에서도 입장료를 받는 연주회가 늘었고, 중산층 가정에 악기와 악보가 퍼지면서 집에서 직접 연주하는 아마추어가 많아졌습니다. 궁정이나 교회가 아닌 곳에서 돈을 내고 듣는 청중, 집에서 악보를 사서 치는 연주자가 이 시대 음악의 새 고객이었습니다.

오페라에서도 같은 바람이 불었습니다. 지금의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태어나 빈에서 활동한 글루크는 〈알체스테〉(1767년 초연)의 1769년 출판 악보에 실린 서문에서 가수가 기교를 뽐내느라 극의 흐름을 끊는 관습을 버리고, 음악이 대사와 극을 돕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화려함보다 알아듣기 쉬운 것을 고른다는 점에서, 기악에서 일어난 변화와 방향이 같았습니다.

만하임악파, 크레센도와 소나타형식의 개척자

고전주의 시대의 기악을 하나로 묶는 설계가 소나타 형식입니다. 곡의 첫머리(제시부)에서 주제를 보여 주고, 가운데(발전부)에서 그 주제를 쪼개고 조를 바꾸며 멀리 끌고 갔다가, 끝(재현부)에서 처음 주제를 원래의 조로 다시 들려줍니다. 듣는 사람에게는 집을 떠났던 주제가 돌아오는 순간이 이 형식의 핵심입니다. 교향곡, 현악 4중주, 피아노 소나타, 협주곡의 첫 악장이 대개 이 틀을 따랐고, 이 틀은 낭만주의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소나타 형식이라는 말을 몰랐습니다. 1793년 독일의 이론가 하인리히 크리스토프 코흐가 이런 악장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그는 주제가 아니라 조가 바뀌는 순서와 마침꼴로 이 악장을 설명했고 소나타 형식이라는 이름도 쓰지 않았습니다. 주제를 중심에 둔 오늘날의 설명은 1826년 안톤 라이하, 1838년과 1845년 아돌프 베른하르트 마르크스, 1848년 카를 체르니의 이론서를 거치며 굳어졌습니다. 소나타 형식이라는 말 자체는 1824년 베를린의 음악 신문에 이미 보이고, 마르크스는 이 말을 자세한 형식 설명과 묶어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들이 본보기로 삼은 것은 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였습니다. 형식은 작곡가가 따른 규칙이라기보다, 그 음악을 뒤에서 분석해 얻은 지도에 가깝습니다.

이 시기 교향곡의 틀을 다지는 데 한몫한 곳이 독일 만하임의 선제후 궁정 악단입니다. 보헤미아 출신 요한 슈타미츠가 이 악단을 이끌었고, 그 주변 작곡가들을 만하임악파라고 부릅니다. 1772년 이 악단을 직접 들은 영국의 음악사가 찰스 버니는 이듬해 펴낸 여행기에서, 이 악단에는 독주자와 작곡가가 많아 전투를 계획할 수도 직접 싸울 수도 있는 장군들의 군대 같다고 썼습니다. 같은 대목에서 그는 크레셴도와 디미누엔도, 곧 악단 전체가 소리를 서서히 키우고 줄이는 표현이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적었습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1763)와 아들 볼프강(1777~78)도 편지에서 이 악단의 수준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슈타미츠는 빠른 악장, 느린 악장, 미뉴에트와 트리오, 빠른 끝악장으로 이어지는 4악장 교향곡을 꾸준히 쓴 첫 작곡가로 꼽힙니다. 그 전에도 4악장짜리 교향곡이 드물게 있었지만, 그의 교향곡은 절반이 넘게 이 짜임을 따릅니다. 슈타미츠와 만하임악파는 소나타 형식이 교향곡 첫 악장의 틀로 자리 잡는 데 한몫했습니다. 다만 이 시기 교향곡 양식을 다진 곳이 만하임 하나만은 아니었습니다. 밀라노의 잠마르티니, 베를린과 빈의 작곡가들도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빈 고전파의 등장과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 변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빈 고전파 또는 제1빈악파라고 부릅니다. 세 사람 모두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였던 빈에는 여러 지역 출신 귀족이 모여 있었고, 이들이 저마다 음악가를 후원하며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모습이 보이는 이미지입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상을 나란히 놓은 그림이다.

세 사람이 일한 방식은 세대마다 달랐습니다. 하이든은 1761년 헝가리 귀족 에스터하지 가문의 부악장으로 들어가면서 계약상 하인 신분으로 출발했습니다. 그해 계약서에는 다른 하인들처럼 제복을 입고 매일 오전과 오후 대기실에서 군주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고 적혀 있지만, 식사는 장교의 식탁에서 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고, 그를 하우스 오피치어, 곧 하인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으로 대우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1766년에는 악장이 되었습니다.

하이든이 평생을 하인으로 살았다고 소개되기도 하지만, 그의 생활은 1790년에 크게 바뀝니다. 그해 니콜라우스 1세 후작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은 후작이 궁정 악단을 해산했고, 하이든은 악장 칭호와 연금을 그대로 받은 채 빈으로 옮겼습니다. 곧 런던의 연주회 기획자 잘로몬의 초청을 받아 1791~92년과 1794~95년 두 차례 런던에 머물며 교향곡 12곡(93~104번)을 새로 써서 입장료를 낸 청중 앞에 올렸습니다. 1795년 돌아온 뒤에는 새 후작 니콜라우스 2세 아래서 다시 에스터하지 가문의 일을 맡았지만, 이때의 하이든은 이미 런던 청중이 이름을 아는 작곡가였습니다.

모차르트는 1781년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의 일자리를 그만두고 빈에서 연주회, 레슨, 악보 출판, 오페라 의뢰로 살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베토벤은 고향 본에서 십 대 때부터 궁정 예배당의 보조 오르가니스트(1784년부터 급료를 받음)와 궁정 악단의 비올라 주자로 일했으니, 궁정에 고용된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1792년 빈으로 옮긴 뒤로는 정해진 직책 없이 귀족 후원자들의 연금과 작품 의뢰, 출판 수입으로 지냈습니다. 1809년에는 루돌프 대공과 킨스키 공, 로프코비츠 공이 그가 빈에 남는 조건으로 해마다 4,000플로린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후원에서 벗어났다기보다, 한 주인에게 매인 고용에서 여러 후원자와 시장을 상대하는 쪽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하이든, 교향곡의 아버지라는 칭호의 진실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먼저 태어난 하이든(1732~1809)은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남겨 흔히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오늘날에는 안톤 판 호보켄이 엮은 작품 목록 번호로 그의 교향곡을 가리킵니다. 다만 이 칭호가 그가 교향곡을 처음 만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향곡은 오페라 앞에 연주하던 짧은 기악곡(신포니아)에서 갈라져 나왔고, 하이든 이전에도 잠마르티니나 만하임악파처럼 교향곡을 쓴 세대가 이미 있었습니다.

하이든이 한 일은 오랫동안 한 악단을 손에 쥐고 이 장르를 수십 년 동안 다듬은 데 있습니다. 에스터하지 궁정에서 그는 날마다 같은 연주자들과 새 곡을 시험할 수 있었고, 런던에서는 그렇게 다듬은 교향곡을 큰 악단과 많은 청중 앞에 내놓았습니다. 아버지라는 애칭이 더 들어맞는 분야는 현악 4중주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네 악기가 반주와 독주로 나뉘지 않고 대화하듯 주제를 주고받는 짜임은 하이든의 4중주에서 다듬어져 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 이어졌습니다.

모차르트의 종합과 하이든과의 우정

모차르트(1756~1791)는 스물네 살 위인 하이든을 깊이 존경했습니다. 그는 1782년부터 1785년까지 여섯 곡의 현악 4중주를 써서 하이든에게 바쳤고, 1785년 빈의 출판사 아르타리아가 이 곡들을 작품 10으로 펴냈습니다. 9월 1일자 헌정사에서 모차르트는 이 여섯 곡을 자기 자식에 비유하며 길고 고된 노력의 열매라고 했고, 하이든에게 이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안내자이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오늘날 하이든 4중주라고 부르는 곡들입니다.

하이든도 모차르트를 알아보았습니다. 1785년 2월 모차르트의 집에서 이 4중주들을 들은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당신 아들은 내가 직접 알거나 이름으로 아는 작곡가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레오폴트가 2월 16일 딸에게 보낸 편지에 남아 있습니다.

오페라도 이 시대의 큰 무대였습니다. 하이든도 에스터하지 궁정의 여름 오페라를 맡아 직접 오페라를 쓰고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올렸습니다. 모차르트는 빈의 극장들을 상대로 오페라를 썼고, 이탈리아어 희극 오페라(오페라 부파)와 함께 노래 사이에 대사를 말로 주고받는 독일어 노래극(징슈필)도 썼습니다. 1782년 빈 궁정극장에서 초연한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와 1791년 빈 교외의 극장에서 초연한 〈마술피리〉가 징슈필로, 독일어를 쓰는 관객이 노래와 대사를 바로 알아듣는 극이었습니다. 기악과 오페라, 귀족의 살롱과 대중극장을 함께 오갔다는 점에서, 이 글은 모차르트를 이 시대의 종합으로 봅니다.

베토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베토벤(1770~1827)이 1792년 빈으로 떠날 때, 고향 본의 후원자 발트슈타인 백작은 그의 기념첩에 꾸준히 애쓰면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 전해에 세상을 떠났고, 베토벤은 빈에 도착한 1792년 11월 직후부터 하이든에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은 의뢰받은 곡이 많아 바빴고, 1794년 초 두 번째 런던 여행을 떠났습니다. 작곡가 요한 밥티스트 솅크는 1830년 회고에서 베토벤이 하이든 몰래 자신에게 대위법을 배웠다고 밝혔지만, 이 회고는 베토벤이 실제로 남긴 대위법 연습장과 맞지 않는 데가 있어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관계는 더 극적인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열여섯 살의 베토벤이 1787년 빈에서 모차르트 앞에서 연주해 그를 감탄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베토벤이 그해 1월과 4월 사이 몇 주 동안 빈에 머문 것은 확인되지만, 모차르트를 만나 연주했다는 장면을 뒷받침하는 동시대 문서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짧은 빈 체류뿐이고, 만남의 세부는 뒤에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베토벤은 32곡의 피아노 소나타, 9곡의 교향곡, 현악 4중주와 협주곡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물려받은 틀을 그대로 쓰면서도 그 안을 크게 넓혔습니다. 1808년 12월 22일 빈에서 처음 연주된 교향곡 5번이 좋은 예입니다. 마지막 악장이 시작되는 순간, 그때까지 쉬고 있던 트롬본 세 대와 콘트라바순, 피콜로가 처음으로 들어와 소리의 폭이 갑자기 넓어집니다. 1809년에 쓴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에서는 독주자가 즉흥으로 채우던 카덴차 자리에 직접 써 넣은 악구를 두고 독주자가 따로 카덴차를 넣지 말라고 적었습니다. 연주자에게 맡기던 부분까지 작곡가가 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호프만이 1810년 교향곡 5번 평을 고쳐 1813년 다시 실은 글에서 베토벤의 음악은 두려움과 전율과 고통의 지렛대를 움직여 끝없는 그리움을 일깨운다고 쓰고, 그를 순수하게 낭만적인 작곡가라고 부른 것도 이 곡에서 출발한 생각이었습니다. 베토벤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양쪽에 걸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뒷사람의 정리이기 이전에, 그 시대 사람이 이미 그렇게 들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앞의 이야기는 [서양음악사 5] 바로크 음악에서, 다음 시대는 서양음악사 7 낭만주의 시대에서 이어집니다. 인물별로는 하이든 생애와 작품, 모차르트의 생애와 작품, 베토벤 생애와 업적을, 하이든이 궁정에서 런던 시장으로 옮겨 간 사정은 하이든의 지갑 사정에서, 연주자가 채우던 자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카덴차는 무엇인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교향곡 첫 악장을 듣는다면, 첫머리의 주제를 기억해 두었다가 가운데에서 그것이 흩어진 뒤 다시 처음 모습으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려 보십시오. 그 귀환이 이 시대 사람들이 듣던 고전주의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만하임악파는 정확히 무엇을 처음 만들었나요?

영국의 음악사가 찰스 버니는 1773년 여행기에서 악단 전체가 소리를 서서히 키우고 줄이는 크레셴도와 디미누엔도가 만하임에서 태어났다고 적었습니다. 이 악단을 이끈 요한 슈타미츠는 미뉴에트를 셋째 악장에 둔 4악장 교향곡을 꾸준히 쓴 첫 작곡가로 꼽힙니다. 다만 초기 교향곡의 틀은 밀라노의 잠마르티니나 베를린, 빈의 작곡가들에게서도 같은 시기에 나란히 자랐습니다.

Q. 하이든이 정말 교향곡을 처음 만든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하이든보다 앞서 이미 초기 형태의 교향곡을 쓴 작곡가들이 있었습니다.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수십 년 동안 쓰며 장르를 다듬었기 때문에 이런 애칭으로 불리며, 그가 더 확실한 개척자로 꼽히는 분야는 현악 4중주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Q.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4중주는 어떤 작품인가요?

1782년부터 1785년까지 쓴 여섯 곡의 현악 4중주로, 1785년 빈에서 작품 10으로 출판되었습니다. 9월 1일자 헌정사에서 모차르트는 이 곡들을 길고 고된 노력의 열매인 자기 자식에 빗대며, 하이든에게 그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안내자이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Q.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정말 만난 적이 있나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십 대의 베토벤이 모차르트 앞에서 연주했고 모차르트가 감탄했다는 일화가 오래 전해지지만, 이 만남을 뒷받침하는 동시대 문서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사실은 1787년 1월과 4월 사이 베토벤이 몇 주 동안 빈에 머물렀다는 것뿐입니다.

Q. 하이든과 베토벤의 사제관계는 왜 삐걱거렸나요?

베토벤은 1792년 11월 빈에 온 직후부터 하이든에게 배웠지만, 하이든은 의뢰받은 곡이 많아 바빴고 1794년 초 다시 런던으로 떠났습니다. 베토벤이 하이든 몰래 다른 스승에게 대위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솅크의 1830년 회고에서 나오는데, 베토벤의 실제 연습장과 맞지 않는 데가 있어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Q. 하이든은 정말 요리사나 정원사와 비슷한 신분이었나요?

1761년 계약서에 따르면 다른 하인들처럼 제복을 입고 매일 지시를 기다려야 하는 하인 신분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다만 식사는 장교의 식탁에서 할 수 있었고, 하인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하우스 오피치어로 대우받았습니다. 1766년에는 악장이 되었고, 1790년 악단이 해산된 뒤에는 칭호와 연금을 유지한 채 런던에서 자유롭게 활동했습니다.

Q. 고전주의 시대는 정확히 언제 끝났나요?

딱 떨어지는 정답은 없습니다. 1820년 전후로 잡는 개론서가 많고,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827년까지 넣는 경우도 있습니다. 1810년대에 이미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의 기악을 낭만적이라고 부른 평론이 있었던 만큼, 두 시대는 한 해를 경계로 끊어지기보다 겹쳐 있다고 보는 편이 실제에 가깝습니다.

코멘트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 문의 및 쪽지함
반갑습니다!
문의사항은 이 쪽지함으로 남겨주세요!
🔒 관리자에게만 안전하게 전송됩니다.
⏰ 현재: —
🚀 최초: —
🕐 방금 접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