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음악이라고 하면 사랑 노래나 달빛 같은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낭만적이라는 말을 음악에 무겁게 얹은 이름난 글은 사랑 노래가 아니라 교향곡을 다뤘습니다. 1810년 독일의 작가 E.T.A. 호프만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다룬 평론을 썼고, 1813년 그 글을 고쳐 다시 실으면서 다른 예술의 도움 없이 소리만으로 말하는 기악이야말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낭만적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보기에 말이 없는 음악은 바로 그 이유로 끝없는 것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작곡가들은 반대쪽으로도 걸어갔습니다. 1830년 베를리오즈는 교향곡 한 편에 줄거리를 써서 청중에게 나눠 주었고, 리스트는 시와 그림에서 제목을 가져온 관현악곡에 교향시라는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글은 낭만주의 시대를 하나의 양식으로 보지 않고, 음악에 말을 붙일 것인가를 두고 갈라졌던 한 세기로 따라가 봅니다. 그 사이에 피아노 독주회의 열광, 평론이라는 직업, 민족의 소리를 찾는 움직임이 함께 자랐습니다.
- 시기: 1820년대 무렵부터 20세기 초까지, 1850년 무렵을 경계로 전기·후기로 나누어 부름
- 이름: 호프만이 베토벤 교향곡 5번 평(1810)과 그 개작(1813)에서 기악을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라 부름
- 전기 낭만파: 멘델스존(1847)·쇼팽(1849)·슈만(1856)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며 한 세대가 저묾
- 표제음악: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1830)이 줄거리를 청중에게 나눠 줌, 리스트가 1854년 교향시라는 이름을 씀
- 후기 낭만파: 리스트와 바그너가 1850년 이후 이끎,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개관(1876)
- 사회적 변화: 리스트마니아 같은 독주회 열광, 음악평론의 성장, 민족의 소리를 찾는 음악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시기와 두 갈래
고전주의 이후 서양음악의 흐름을 낭만주의라 부릅니다. 서양음악사 6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토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양쪽에 걸쳐 있는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낭만주의의 출발을 그가 세상을 떠난 1827년 무렵으로 잡는 경우가 많고, 1820년으로 잡는 개론서도 있습니다. 끝은 대체로 20세기 초입니다.
낭만이라는 말이 음악에서 힘을 얻은 데에는 호프만의 글이 큰 몫을 했습니다. 1810년 라이프치히의 음악 신문에 실린 베토벤 교향곡 5번 평을 고쳐 1813년 다시 실은 글에서,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오늘날 기악의 창시자로 꼽고 세 사람의 기악에 같은 낭만적 정신이 흐른다고 했으며, 베토벤의 음악은 두려움과 전율과 고통을 움직여 끝없는 그리움을 일깨우며 그 그리움이 낭만의 본질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말한 낭만은 연애 감정이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었습니다.
| 서양음악의 시대 구분을 한 장에 정리한 그림이다. |
시기가 길어서 1850년 무렵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부릅니다. 1850년에 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은 아니고, 이 해를 전후로 세대가 갈립니다. 작곡가들은 정해진 틀을 지키기보다 자기 감정과 상상을 앞세웠지만, 형식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형식을 벗어났고, 어떤 이는 고쳐 썼고, 어떤 이는 고전주의의 4악장 교향곡 안에서 새 화성과 음색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하나의 양식보다 여러 갈래로 보는 편이 맞습니다.
1848년 혁명과 세 거장의 잇단 죽음
1848년 2월 22일부터 24일까지 파리 시민들이 봉기해 루이 필리프 국왕이 물러나고 도피하면서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봉기는 빈과 베를린 등 유럽 각지로 번져 3월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민족들의 봄이라 불리는 이 격변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씨앗을 유럽 곳곳에 남겼습니다.
같은 무렵 낭만주의를 대표하던 작곡가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혁명이 이들의 죽음을 부른 것은 아니고, 두 일이 시기상 겹쳤을 뿐입니다. 멘델스존은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847년 11월 4일에, 쇼팽은 1849년 10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슈만은 1854년 초 환청에 시달리다가 2월 27일 라인강에 몸을 던졌고, 구조되어 집으로 돌아온 뒤 스스로 요양원에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3월 4일 본 근교 엔데니히의 요양원에 들어가 2년 넘게 머물렀고, 회복하지 못한 채 1856년 7월 29일 그곳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1847년부터 1856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멘델스존, 쇼팽, 슈만을 흔히 전기 낭만파로 묶습니다. 이 시기 구분은 뒤에 음악사를 정리하며 붙인 편의상의 선입니다. 리스트와 바그너도 비슷한 세대지만, 1850년 무렵 이후 리스트의 교향시와 바그너의 음악극 미학이 신독일악파의 중심 흐름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들을 후기 낭만파의 중심 인물로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그너는 그 전에도 〈리엔치〉(1842), 〈방황하는 네덜란드인〉(1843), 〈탄호이저〉(1845)를 초연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를 후기 낭만파 시대라 부릅니다.
표제음악의 탄생, 베를리오즈에서 리스트의 교향시로
낭만주의 시대에는 문학, 회화, 음악의 관계가 가까워졌습니다. 작곡가들은 음 자체의 짜임에서 재료를 찾는 데 머무르지 않고, 문학이나 그림에서 얻은 이야기와 장면을 음악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이렇게 음악 밖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기악을 표제음악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리스트가 1850년대에 쓴 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반대편의 이름도 이 무렵 생겼습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음악이라는 뜻의 절대음악이라는 말은 1846년 바그너가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에 붙인 해설에서 처음 썼습니다.
표제음악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곡은 1830년 12월 5일 파리 음악원 연주회장에서 하브네크의 지휘로 처음 연주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입니다. 사랑에 실패한 젊은 예술가가 아편을 먹고 꾸는 꿈을 다섯 악장에 담았고, 연인을 나타내는 한 선율(고정악상, 프랑스어로 이데 픽스)을 모든 악장에 모습을 바꿔 가며 다시 등장시켰습니다. 베를리오즈가 짝사랑하던 영국 극단의 배우 해리엇 스미스슨은 이 곡이 초연되고 3년 뒤인 1833년 10월 3일 파리의 영국대사관에서 베를리오즈와 결혼했고, 그 결혼식의 증인이 리스트였습니다.
베를리오즈는 1845년 악보에 실은 서문에서 이 줄거리를 연주회 때마다 청중에게 나눠 주어야 작품의 극적인 계획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1855년에 고친 서문에서는 교향곡만 따로 연주할 때는 줄거리를 나눠 주지 않고 다섯 악장의 제목만 남겨도 된다고 하면서, 이 곡이 극의 의도와 상관없이 음악만으로도 들을 거리가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표제음악을 연 작곡가 스스로 줄거리 없이 들어도 된다고 한 셈입니다.
다만 이 시기 모든 낭만주의 음악이 베를리오즈처럼 줄거리를 그린 것은 아닙니다. 멘델스존의 무언가(가사 없는 노래)나 쇼팽의 녹턴, 발라드 같은 피아노 소품은 서정적인 제목을 달았을 뿐 줄거리를 담지는 않았습니다. 표제음악을 새 장르로 굳힌 사람은 리스트였습니다. 그는 1847년 9월 우크라이나 남부 공연을 끝으로 순회 연주를 그만두고, 1848년 2월 독일 바이마르에 궁정악장으로 자리를 잡아 1861년까지 머물렀습니다. 1840년대 후반부터 1858년 사이 그곳에서 쓴 관현악곡들에 1854년 2월 처음으로 교향시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리스트 자신의 표현으로는 빠르기와 박자가 바뀌는 단일 악장의 관현악곡입니다. 리스트의 교향시는 이야기의 장면을 하나하나 따라가기보다, 시나 그림이 남기는 생각을 음악으로 펼쳐 가는 쪽에 가깝습니다.
리스트마니아와 피아노의 시대
19세기에는 피아노가 더 크고 오래 울리는 소리를 내도록 개량되었고, 중산층 가정마다 피아노가 놓이면서 피아노곡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고전주의의 대표 장르였던 피아노 소나타 곁에서 녹턴, 마주르카, 즉흥곡처럼 짧고 분위기가 뚜렷한 소품(성격소품)이 크게 늘었습니다. 피아노가 어떻게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는지는 피아노 역사와 종류를 다룬 글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피아노가 집집마다 놓이던 같은 시기, 독일어 시에 피아노 반주를 붙인 가곡, 곧 리트도 크게 늘었습니다. 슈베르트는 열일곱 살이던 1814년 10월 19일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가져온 시로 〈물레 잣는 그레트헨〉을 썼는데, 피아노의 오른손이 쉬지 않고 도는 음형으로 물레 소리를 내고, 노래하는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대목에서는 그 움직임이 멈칫합니다. 피아노가 반주에 머물지 않고 장면과 마음을 함께 그리는 이 방식은 슈만과 브람스의 가곡으로 이어졌습니다. 노래 속 피아노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는지는 슈베르트 마왕을 다룬 글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연주회 열광을 상징하는 말이 리스트마니아입니다. 리스트는 1841년 말부터 1842년 초까지 베를린에서 열 주 동안 스물한 번 무대에 섰고, 청중의 열광은 이때 먼저 터져 나왔습니다. 손수건과 장갑을 서로 차지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이 무렵부터 전해집니다. 이 열광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입니다. 그는 1844년 4월 25일 파리에서 그해 연주회 시즌을 정리한 글에서 리스트마니아라는 말을 처음 썼는데, 예전에 베를린에서 사람들이 리스트를 보고 기절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딱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남의 일로 여겼던 사람이 이 열광에 이름을 붙인 셈입니다.
혼자서 무대 전체를 채우고 악보 없이 외워서 치는 피아노 독주회 형식을 굳힌 사람으로도 리스트가 꼽힙니다. 그가 어떻게 순회공연 스타에서 교향시를 쓰는 작곡가로 옮겨 갔는지는 리스트의 지갑 사정을 다룬 글에서 이어집니다. 연주회장도 커졌습니다. 환상 교향곡 한 곡에 하프 네 대, 바순 네 대, 저음 금관인 오피클라이드, 종까지 들어가는 것처럼, 오케스트라는 고전주의 시대보다 규모와 음색이 넓어졌고 그만큼 큰 공연장과 많은 청중이 필요해졌습니다.
명연주가와 음악평론의 탄생
18세기까지 연주회는 작곡가가 자기 신곡을 직접 선보이는 자리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좋은 곡은 여러 연주자가 거듭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고, 베토벤 같은 앞 세대의 곡이 고정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같은 곡을 여러 사람이 연주하니 누가 더 잘 표현하는지 비교할 수 있게 되었고, 악기와 연주 기술이 발전한 것과 맞물려 작곡가와 따로 서는 명연주가(비르투오소)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습니다. 바이올린의 파가니니와 피아노의 리스트가 그 대표입니다.
비교가 생기자 그것을 글로 옮기는 사람도 필요해졌습니다. 슈만은 1831년 음악 신문에 쇼팽의 변주곡 작품 2를 다룬 평을 실으며, 신사 여러분 모자를 벗으시오, 천재요라는 말을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남겼습니다. 1834년에는 동료들과 라이프치히에서 신음악잡지를 창간해 새 음악을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작곡가가 직접 평론을 쓰고 잡지를 펴낸 것은 이 시대의 새 풍경입니다.
일곱 아이의 가장이 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은 이 흐름 속에서, 남편이 요양원에 들어간 1854년 뒤로 순회 연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자신의 연주 경력을 이어 간 사람입니다.
국민주의 음악의 태동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바깥의 작곡가들이 자기 나라의 민요 선율, 춤곡 리듬, 언어, 전설을 음악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이 흐름은 1848년 혁명보다 앞서 시작되었고, 혁명 전후로 커진 민족주의 정서와 함께 넓어졌습니다. 러시아에서는 183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 글린카의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이 출발점으로 자주 꼽히고, 그 뒤를 러시아 5인조가 이었습니다. 체코에서는 스메타나가 조국의 강과 전설을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에 담았습니다.
같은 러시아 작곡가라도 결이 다릅니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민요를 곡에 쓰면서도 음악원에서 배운 서유럽식 작곡법을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에, 민족적 어법을 앞세운 5인조와 구별해서 이야기됩니다. 국민주의 음악은 한 나라의 색을 담는 일이었지만, 그 색을 담는 방법은 작곡가마다 달랐습니다.
후기 낭만파, 리스트와 바그너의 시대
1850년 이후 낭만주의를 이끈 두 축은 리스트와 바그너였습니다. 리스트는 바이마르에서 교향시를 쓰고, 바그너를 비롯한 새 음악을 지휘해 무대에 올렸습니다. 빚쟁이 도망자에서 바이로이트를 세우기까지 바그너가 걸어온 길은 후기 낭만파가 얼마나 큰 규모로 나아갔는지 보여 줍니다. 1876년 문을 연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그의 작품을 올리려고 지은 극장으로, 오케스트라를 무대 앞 깊숙한 구덩이에 숨겨 관객이 무대만 보도록 설계했습니다. 개관 무대는 네 편으로 된 〈니벨룽의 반지〉 전곡이었습니다.
바그너의 작품은 흔히 음악극이라고 부르지만, 바그너 자신은 1872년 이 이름을 못마땅해하는 글을 썼습니다. 인물이나 생각에 짧은 선율을 붙여 극 내내 되풀이하는 그의 기법을 가리키는 라이트모티프라는 말도 바그너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퍼뜨렸고, 1876년 한스 폰 볼초겐이 〈반지〉 안내서를 펴내며 널리 쓰였습니다. 바그너는 이 말을 쓸 때 이른바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조성이 쉽게 자리 잡지 않고 반음씩 미끄러지며 이어지는 그의 화성이 뒤 세대 작곡가들의 새 출발점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그너와 리스트의 새 음악을 둘러싸고 반대편도 목소리를 냈습니다. 빈의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1854년 책 〈음악적 아름다움에 관하여〉에서 음악은 음과 그 움직임 자체로 아름답다고 주장했고, 1860년에는 브람스와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이 신독일악파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만들어 서명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바그너파와 브람스파로 나뉜 논쟁은 결국 이 글 첫머리의 질문, 곧 음악에 말을 붙일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었습니다.
세기말에는 말러가 교향곡에 독창과 합창을 넣어 베토벤 교향곡 9번의 길을 이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교향시로 표제음악의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형식의 자유, 표제음악, 명연주가 문화, 국민주의 음악까지 넓어진 낭만주의는 20세기 초로 접어들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같은 새 흐름에 자리를 내줍니다.
이 앞의 이야기는 서양음악사 6 고전주의 시대에서 이어집니다. 인물별로는 베를리오즈의 생애와 작품, 프란츠 리스트의 생애와 작품, 리하르트 바그너 생애와 작품, 가곡 쪽은 슈베르트의 생애와 작품을 보시면 됩니다. 다음에 환상 교향곡을 듣는다면 한 번은 줄거리를 덮고 들어 보십시오. 베를리오즈가 1855년에 바랐던 것처럼, 모습을 바꿔 가며 돌아오는 그 한 선율만 따라가도 다섯 악장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 들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낭만주의 시대는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1820년대, 특히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827년 무렵부터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를 가리킵니다. 시기가 길어 1850년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낭만적이라는 말 자체는 1810년대에 호프만이 이미 베토벤의 기악에 붙였습니다.
Q. 왜 하필 1850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를 나누나요?
1850년에 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멘델스존(1847), 쇼팽(1849), 슈만(1856)이 그 무렵 잇달아 세상을 떠났고, 비슷한 세대인 리스트와 바그너는 1850년 무렵 이후 교향시와 음악극으로 새 흐름을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1850년 무렵이 세대를 나누는 편리한 선으로 쓰입니다.
Q. 표제음악이 정확히 무엇이고, 누가 처음 시작했나요?
음악 밖의 이야기나 장면을 따라가는 기악을 말하며, 표제음악이라는 이름은 리스트가 1850년대에 만들었습니다. 1830년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 대표적인 출발점으로 꼽히는데, 그는 줄거리를 청중에게 나눠 주고 연인을 나타내는 한 선율(고정악상)을 모든 악장에 다시 등장시켰습니다. 다만 1855년에는 교향곡만 연주할 때 줄거리 없이 악장 제목만 남겨도 된다고 고쳐 적었습니다.
Q. 리스트마니아는 실제로 있었던 현상인가요?
네, 실제로 쓰인 말입니다. 열광은 1841~42년 리스트의 베를린 공연에서 먼저 터졌고,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1844년 4월 25일 파리 연주회 시즌을 정리한 글에서 이 열광을 리스트마니아라고 불렀습니다. 하이네는 베를린의 기절 소동을 처음 들었을 때 어깨를 으쓱했다고 적었습니다.
Q. 낭만주의 시대에 왜 명연주가라는 개념이 새로 생겼나요?
이전에는 작곡가가 자기 신곡을 직접 선보이는 자리가 연주회의 중심이었습니다. 19세기 들어 같은 곡이 여러 연주자에 의해 거듭 연주되면서 누가 더 잘 표현하는지 비교하는 문화가 생겼고, 작곡가와 따로 서는 명연주가가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 비교를 글로 옮기는 음악평론도 함께 자랐는데, 슈만은 1834년 직접 음악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Q. 슈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상을 떠났나요?
1854년 초 환청에 시달리던 슈만은 2월 27일 라인강에 몸을 던졌다가 구조되었고, 스스로 요양원에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3월 4일 본 근교 엔데니히의 요양원에 들어가 2년 넘게 머물렀지만 회복하지 못했고, 1856년 7월 29일 마흔여섯의 나이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Q. 낭만주의는 어떻게 막을 내렸나요?
명확한 종료 시점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리스트의 교향시와 바그너의 악극이 다음 세대에 길을 열었다는 설명이 많고,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 길을 세기말까지 이었습니다. 20세기 초로 접어들면서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같은 새 흐름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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