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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완전 정리 — 나치 당원에서 베를린 필의 황제까지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음향 통제와 매체 기술로 20세기 후반 클래식의 표준을 세운 지휘자
• 생몰: 1908-04-05 ~ 1989-07-16
• 국적·주 활동지: 오스트리아 — 베를린, 빈, 잘츠부르크
• 핵심 자리: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1955~1989, 빈 국립오페라 예술감독 1956~1964
• 대표 녹음: 1962년 베토벤 교향곡 전집(DG), 1972년 푸치니 '라 보엠', 바그너 '발퀴레'

카라얀 시작하기 좋은 
• 처음이라면: 1962년 베를린 필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도입: 1989년 4월, 마지막 브루크너

1989년 4월, 빈 무지크페라인 황금홀. 81세의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지휘봉을 들자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의 첫 현이 숨을 죽였습니다.

객석에는 그가 며칠 전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사임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35년 만의 결별이었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길게 이어졌고, 세 달 뒤 그는 잘츠부르크 근교 아니프 자택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 청중이 떠올린 것은 정치적 이력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다듬어진 현의 촉감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음향이 어떻게 그의 정치적 과거를 압도했는가를 추적해 보려합니다.

1980년대  백발의 카라얀이 눈을 감고 지휘하는 사진
1980년대 카라얀이 눈을 감고 지휘하는 모습

잘츠부르크의 완벽주의자

모차르트의 도시에서 태어난 카라얀은 4세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모차르테움에서 음악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의 시선은 곧 지휘대로 옮겨갔습니다.

26세에 독일 아헨 시립극장 음악총감독에 부임합니다. 당시 독일 최연소 기록이었습니다. 화려한 대도시 대신 울름·아헨 같은 지방 극장에서 시작한 선택은 그의 작업 방식을 형성했습니다.

제한된 예산과 인력 속에서도 타협 없는 리허설을 밀어붙였습니다. 박자 정확성, 단원 통제, 작품 전체를 하나의 음향으로 설계하는 방식. 훗날의 '카라얀 사운드'를 만들 토대가 이때 다져졌습니다.

두 장의 당원카드와 침묵

카라얀의 생애에서 가장 무거운 사실은 두 장의 종이입니다. 베를린 연방기록보관소에는 그의 나치당원 카드 두 장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1933년 4월 잘츠부르크에서, 그리고 같은 해 5월 아헨에서 다시 가입한 기록입니다.

본인은 훗날 "당시 독일에서 일하려면 어쩔 수 없는 형식적 절차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단순 생계형 가입 이상의 적극성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1938년 베를린 국립오페라에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한 뒤 베를리너 차이퉁은 "기적의 카라얀(Das Wunder Karajan)"이라는 헤드라인을 실었습니다. 전후 그는 2년간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고, 평생 이 문제를 정면으로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든 소리

활동 정지가 풀린 뒤 그를 끌어올린 것은 무대가 아니라 스튜디오였습니다. 영국의 음반 프로듀서 발터 레게(Walter Legge)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레게가 새로 만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카라얀은 런던 스튜디오에서 방대한 녹음을 시작합니다. 마이크 위치, 잔향, 현의 자리 배치까지 직접 결정했습니다. 청중도, 정치적 비판자도 없는 밀폐된 공간이 그에게는 오히려 자유로운 실험실이었습니다.

1951년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를, 1954년 루체른에서 푸르트벵글러를 대신해 지휘한 무대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논쟁보다 소리를 먼저 들었습니다.

1950년대 런던 스튜디오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작업하는 카라얀
1950년대  필하모니아와 작업하는 카라얀의 모습(출처: theclassicreview.com)

베를린 필 35년과 카라얀 사운드

1955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 종신 상임지휘자가 됩니다. 단원들은 처음에 그를 경계했지만, 카라얀은 토론 대신 소리로 설득했습니다.

'카라얀 사운드'의 세 가지 특징은 분명합니다. 첫째, 레가토(legato — 음과 음을 끊김 없이 부드럽게 잇는 기법). 그는 악보의 쉼표마저 잔향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둘째, 음색의 균질성. 1바이올린과 2바이올린의 차이를 극도로 좁혔습니다. 셋째, 눈을 감은 지휘. 이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음향 흐름에 집중하려는 그의 지휘 미학과 연결된 행동으로 자주 해석됩니다.

1980년대 초 CD 규격 논의 과정에서 카라얀이 베토벤 교향곡 9번 전체가 한 장에 담기길 원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다만 실제 74분 규격 결정에는 기술적·상업적 요소가 함께 작용했으며, 오늘날에는 이를 단독 원인으로 보지 않는 견해도 많습니다.

라이벌과 후계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22살 위 선배였습니다. 1938년 차이퉁의 카라얀 격찬 이후 그를 "K씨(Herr K.)"라고만 불렀다는 회고가 카라얀 주변 인물들의 증언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박자를 호흡처럼 늘이는 푸르트벵글러와, 박자를 통제하는 카라얀은 미학적으로 정반대였습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열 살 어린 동시대인이었습니다. 1970~80년대 클래식 음반 시장은 사실상 두 사람의 베토벤·말러 경쟁으로 굴러갔습니다. 번스타인의 격정과 카라얀의 광택은 같은 시대의 두 답이었습니다.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습니다. 1955년 베를린 필 상임 자리를 카라얀에게 빼앗긴 뒤 평생 거리를 두었고, 카라얀의 음반 우선주의를 "비누거품"이라 표현한 발언이 동시대 유럽 언론에 반복 인용되었습니다.

안네-소피 무터는 1976년 13세에 발탁되어 카라얀이 사망할 때까지 가장 자주 협업한 협연자가 되었습니다. 자신과 가장 다른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면서도, 자신을 따라올 다음 세대는 직접 길렀습니다.

음향은 정치를 압도했는가 — 두 학파

카라얀에 대한 학계 시각은 1989년 사망 이후 두 갈래로 정리되었습니다. 한국어 자료에서는 주로 한쪽 입장만 소개되지만, 독일어·영어권 문헌은 두 입장을 함께 다룹니다.

시각 핵심 주장
미적 평가 분리설 정치적 행위와 음악적 성취는 독립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카라얀의 음향은 그의 도덕적 선택과 무관하게 미학적 분석의 대상이 된다.
통합 평가설 권력 구조 안에서 형성된 음향 미학은 그 구조와 분리될 수 없다. 특히 독일 전후 문화연구 계열에서는 카라얀의 통제·균질성·중앙집중적 결정 방식을 권위주의적 질서 감각과 연결해 읽으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습니다.

두 입장 모두 진지한 학문적 근거를 갖고 있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이긴 상태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음향은 거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사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승리는 부분적으로 다시 협상되는 중입니다.

오늘 어디서부터 들을까

처음이라면 1962년 베를린 필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입니다. 느리게 걷는 듯한 현의 물결에서 카라얀 사운드를 가장 빠르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한 발 더 들어간다면 1976년 차이콥스키 6번 '비창', 1972년 푸치니 '라 보엠'(파바로티·프레니), 1976년 시벨리우스 5번을 권합니다. 광활하고 색채적인 작품에서 카라얀의 균질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동하는 사례들입니다.

비교 청취를 해본다면 같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1962년 카라얀 녹음과 1947년 푸르트벵글러 녹음으로 이어서 들어보세요. 두 음향의 차이가 취향의 문제인지, 시대의 다른 답인지 직접 판단할 수 있습니다.

1962년 베를린 필 베토벤 교향곡 전집 LP 박스 자켓
1962년 베를린 필 베토벤 교향곡 전집 LP 박스(출처: gripsweat.com)

자주 묻는 질문

Q. 카라얀이 정말 나치당원이었나요?
사실입니다. 1933년 4월 잘츠부르크에서, 5월 아헨에서 두 차례 가입한 카드가 베를린 연방기록보관소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본인은 형식적 절차였다고 말했지만, 학계의 문제 제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Q. 푸르트벵글러와는 어떤 관계였나요?
음악적 라이벌이자 인간적 적대 관계였습니다. 카라얀을 "K씨(Herr K.)"라고만 불렀다는 회고가 카라얀 주변 인물들의 증언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 사망 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이어받으며 두 시대가 갈렸습니다.

Q. 어떤 베토벤 전집을 사면 좋을까요?
처음 듣는다면 1962년판입니다. 카라얀 사운드가 가장 광택 있게 정립된 시기입니다. 절제된 해석을 원하면 1977년판, 만년의 길어진 호흡은 1984년 디지털판입니다. 세 녹음을 비교하면 같은 작품에 내놓은 세 가지 답이 보입니다.

Q. 카라얀 사운드는 모든 작품에 어울리나요?
아닙니다. 베토벤·브람스처럼 거친 결이 있는 작품에서는 균질성이 개성을 지운다는 비판이 오래 있어 왔습니다. 반면 차이콥스키·R. 슈트라우스·시벨리우스·바그너·푸치니처럼 광활하고 색채적인 작품에서는 같은 음향이 오히려 작품의 규모를 살립니다.

마무리

음향은 어떻게 카랴얀의 정치적 과거를 압도했는가? 카라얀의 35년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큰 답이자 가장 큰 반박입니다. 미적 평가와 도덕적 평가를 분리할 수 있다는 입장도, 분리할 수 없다는 입장도 모두 진지한 학문적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을 강요하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닐 것입니다.

가장 정직한 권유는 이것입니다. 1962년 베토벤 5번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같은 곡의 푸르트벵글러 1947년 녹음을 이어 들어보십시오. 두 음향이 들려주는 차이가 취향의 문제인지, 그 너머의 시대적 선택이 함께 들리는지 — 그 판단은 듣는 사람의 귀와 마음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