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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시리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나치 당원에서 베를린 필의 황제까지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음향 통제와 매체 기술로 20세기 후반 클래식의 표준을 세운 지휘자
• 생몰: 1908-04-05 ~ 1989-07-16
• 국적·주 활동지: 오스트리아, 베를린·빈·잘츠부르크
• 핵심 자리: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1955~1989, 빈 국립오페라 예술감독 1956~1964
• 대표 녹음: 1962년 베토벤 교향곡 전집(DG), 1972년 푸치니 '라 보엠', 바그너 '발퀴레'

카라얀 시작하기 좋은 
• 처음이라면: 1962년 베를린 필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목차

도입: 1989년 4월, 마지막 브루크너

1989년 4월, 빈 무지크페라인 황금홀. 81세의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지휘봉을 들자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의 첫 현이 숨을 죽였습니다.

객석에는 그가 며칠 전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사임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35년 만의 결별이었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길게 이어졌고, 세 달 뒤 그는 잘츠부르크 근교 아니프 자택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 청중이 떠올린 것은 정치적 이력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다듬어진 현의 촉감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음향이 어떻게 그의 정치적 과거를 압도했는가를 추적해 보려합니다.

1980년대  백발의 카라얀이 눈을 감고 지휘하는 사진
1980년대 카라얀이 눈을 감고 지휘하는 모습

잘츠부르크의 완벽주의자

모차르트의 도시에서 태어난 카라얀은 4세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모차르테움에서 음악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의 시선은 곧 지휘대로 옮겨갔습니다.

26세에 독일 아헨 시립극장 음악총감독에 부임합니다. 당시 독일 최연소 기록이었습니다. 화려한 대도시 대신 울름·아헨 같은 지방 극장에서 시작한 선택은 그의 작업 방식을 형성했습니다.

제한된 예산과 인력 속에서도 타협 없는 리허설을 밀어붙였습니다. 박자 정확성, 단원 통제, 작품 전체를 하나의 음향으로 설계하는 방식. 훗날의 '카라얀 사운드'를 만들 토대가 이때 다져졌습니다.

두 장의 당원카드와 침묵

카라얀의 생애에서 가장 무거운 사실은 두 장의 종이입니다. 베를린 연방기록보관소에는 그의 나치당원 카드 두 장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1933년 4월 잘츠부르크에서, 그리고 같은 해 5월 아헨에서 다시 가입한 기록입니다.

본인은 훗날 "당시 독일에서 일하려면 어쩔 수 없는 형식적 절차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단순 생계형 가입 이상의 적극성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1938년 베를린 국립오페라에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한 뒤 베를리너 차이퉁은 "기적의 카라얀(Das Wunder Karajan)"이라는 헤드라인을 실었습니다. 전후 그는 2년간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고, 평생 이 문제를 정면으로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두 카드는 왜 서로 다른 날짜를 가리키나

두 장이 1933년 4월과 5월로 나란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서를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면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첫 번째는 1933년 4월 8일 잘츠부르크입니다. 그는 입당 신청을 하고 가입비를 냈으며 당원번호 1607525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 울름으로 떠납니다.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은 그해 여름 금지되었고, 이 첫 당적은 그대로 흐지부지됩니다.

두 번째 가입은 아헨에서 1935년 3월에 이루어졌고, 이때 받은 번호는 3430914였습니다. 그런데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뒤 당의 재무 담당 부서가 뮌헨에서 그의 이중 당적을 발견합니다. 처리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가입은 무효로 선언되고, 두 번째 가입은 1933년 5월 1일 자로 소급 적용됩니다.

그러니까 카드에 찍힌 1933년 5월이라는 날짜는 그가 실제로 아헨에서 입당한 날이 아니라, 5년 뒤에 행정적으로 붙여진 날짜입니다. 그가 아헨 음악총감독이 된 것은 1935년이었으니 1933년 5월의 그는 아직 아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카드에 적힌 날짜만 옮겨 적으면 1933년 한 해에 두 번 가입한 것으로 읽히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소급 처리를 알고 나면 두 장의 종이는 두 번의 결심이 아니라 한 번의 신청, 한 번의 가입, 그리고 그것을 정리한 행정 절차의 흔적으로 읽힙니다. 다만 이것이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헨 총감독 자리를 맡는 조건 가운데 당적 재신청이 포함돼 있었다는 서술이 함께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1938년에 무효가 된 것은 첫 번째 종이였지 선택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1946년의 침묵과 1947년의 재개

전쟁이 끝난 뒤 그의 이름은 한동안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1946년 빈에서 빈 필하모닉과 전후 첫 연주회를 열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은 당적을 이유로 그 뒤의 지휘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그해 여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는 이름을 내걸지 않은 채 참여했습니다.

금지가 풀린 뒤의 첫 공개 연주는 1947년 10월 28일이었습니다. 빈 필하모닉과 브람스 독일 레퀴엠을 연주했고, 이 연주는 음반 제작을 겸해 이루어졌습니다.

날짜를 이렇게 늘어놓으면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가 무대로 돌아온 그 첫 자리부터 이미 녹음이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절의 스튜디오 이야기는 복귀 이후에 새로 시작된 전략이 아니라, 복귀와 같은 날 시작된 셈입니다.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든 소리

활동 정지가 풀린 뒤 그를 끌어올린 것은 무대가 아니라 스튜디오였습니다. 영국의 음반 프로듀서 발터 레게(Walter Legge)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레게가 새로 만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카라얀은 런던 스튜디오에서 방대한 녹음을 시작합니다. 마이크 위치, 잔향, 현의 자리 배치까지 직접 결정했습니다. 청중도, 정치적 비판자도 없는 밀폐된 공간이 그에게는 오히려 자유로운 실험실이었습니다.

1951년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를, 1954년 루체른에서 푸르트벵글러를 대신해 지휘한 무대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논쟁보다 소리를 먼저 들었습니다.

1950년대 런던 스튜디오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작업하는 카라얀
1950년대  필하모니아와 작업하는 카라얀의 모습(출처: theclassicreview.com)

베를린 필 35년과 카라얀 사운드

1955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 종신 상임지휘자가 됩니다. 단원들은 처음에 그를 경계했지만, 카라얀은 토론 대신 소리로 설득했습니다.

'카라얀 사운드'의 세 가지 특징은 분명합니다. 첫째, 레가토(legato, 음과 음을 끊김 없이 부드럽게 잇는 기법). 그는 악보의 쉼표마저 잔향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둘째, 음색의 균질성. 1바이올린과 2바이올린의 차이를 극도로 좁혔습니다. 셋째, 눈을 감은 지휘. 이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음향 흐름에 집중하려는 그의 지휘 미학과 연결된 행동으로 자주 해석됩니다.

1980년대 초 CD 규격 논의 과정에서 카라얀이 베토벤 교향곡 9번 전체가 한 장에 담기길 원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다만 실제 74분 규격 결정에는 기술적·상업적 요소가 함께 작용했으며, 오늘날에는 이를 단독 원인으로 보지 않는 견해도 많습니다.

1955년 미국 순회, 소리보다 먼저 도착한 이력

상임지휘자가 된 바로 그해, 베를린 필하모닉은 북미 순회에 나섭니다. 그런데 미국에 먼저 도착한 것은 소리가 아니라 그의 이력이었습니다.

순회를 앞둔 1955년 2월, 유대인 단체와 음악가들이 그의 방문에 강하게 항의했고 국무부에 입국 자체를 막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대인 노동위원회와 워크멘스 서클은 서독 정부를 향해 카라얀과 나치 관련 경력이 있는 단원들을 불러들이라고 요청했습니다. 순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그는 이후 34년 동안 이 악단을 이끌었습니다.

이 한 해가 이 글의 질문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정치적 과거는 소리보다 먼저 도착해 문 앞에서 그를 막아섰고, 문이 열린 뒤에는 소리가 남았습니다. 음향이 정치를 압도했다는 말은 이런 순서를 가리킵니다. 다만 압도했다는 것이 지워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1989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온 부고 가운데는 화려한 경력과 나치 이력을 제목에 나란히 적은 것도 있었습니다.

1962년 베토벤 전집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맨 위 정보 박스에 적힌 1962년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한 번에 만들어진 물건이 아닙니다. 녹음은 1961년 12월에 시작해 1962년 11월까지 이어졌고, 발매는 1963년이었습니다. 곡별로 보면 1번이 1961년 12월, 2번과 8번이 1962년 1월, 6번이 2월, 4번과 5번과 7번이 3월, 9번이 10월, 3번이 11월입니다. 이 글이 처음 듣기로 권한 7번 2악장은 1962년 3월에 녹음된 소리입니다.

녹음 장소는 베를린 달렘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였습니다. 콘서트홀이 아니라 교회를 고른 것은 이 시기 이 오케스트라와 이 지휘자의 스튜디오 녹음에서 반복된 선택이었습니다. 앞 절에서 본 마이크 배치와 잔향에 대한 그의 관심은 홀 선택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제작진의 이름도 남아 있습니다. 녹음 기술은 귄터 헤르만스가 맡았고, 프로듀서는 1번과 2번과 8번을 오토 게르데스가, 3번부터 7번까지와 9번을 오토 에른스트 볼레르트가 나누어 맡았습니다. 총괄 제작은 엘자 마리아 실러였습니다. 지휘자 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음반이 실제로는 이런 분업 위에 서 있습니다.

돈의 규모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녹음에 들어간 비용은 150만 마르크로 집계되며, 당시 추산으로 이 비용을 회수하려면 LP 박스 세트를 약 10만 개 팔아야 했습니다. 첫 10년 동안 100만 세트가 팔렸다는 집계가 전해집니다. 1963년 미국 발매가는 여덟 장짜리 세트에 47.98달러였고, 같은 시기 주급 평균은 114달러였습니다. 클래식 음반 한 상자가 어느 정도의 물건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덧붙이면 이것은 그의 두 번째 베토벤 전집입니다. 1950년대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이미 한 차례 전곡을 녹음했고, 1962년 전집은 이 레이블에서는 첫 번째였습니다. FAQ에서 비교를 권한 1977년판과 1984년 디지털판까지 세면 그는 같은 아홉 곡을 네 번 남긴 셈입니다.

참고로 그가 남긴 녹음은 800장이 넘습니다. 동시대 어느 지휘자와도 비교되지 않는 양이고, 판매량은 2억 장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 절에서 본 1962년 전집의 손익 계산은 그 거대한 목록의 한 칸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 들어볼 지점 하나. 큰 총주가 끝나고 다음 마디로 넘어가는 순간에 귀를 두어 보십시오. 소리가 딱 끊기지 않고 공간에 얇게 남았다가 사라집니다. 교회에서 녹음했다는 사실을 알고 들으면 그 남는 소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가 함께 들립니다.

부활절 음악제, 녹음이 무대보다 먼저 있었다

1967년 그는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를 직접 만들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끌었습니다. 첫해의 중심에 놓인 작품은 바그너 발퀴레였습니다. 4부작의 첫 편인 라인의 황금이 아니라 두 번째 편으로 문을 연 것입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오페라 무대와 연주회 프로그램 양쪽에 함께 오르는 구조가 처음부터 이 음악제의 특징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작업 방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발퀴레의 녹음은 1966년 9월과 10월에 베를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잘츠부르크 무대의 막이 오른 것은 그로부터 여섯 달 뒤인 1967년 3월 19일이었습니다. 무대가 먼저 서고 그것을 녹음한 것이 아니라, 녹음이 먼저 완성되고 무대가 뒤따라온 것입니다.

이 순서에는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수들은 오케스트라 부분이 모두 담긴 녹음을 들고 잘츠부르크로 갔습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연습하는 대신 실제로 무대에서 울릴 소리를 미리 듣고 준비할 수 있었고, 무대 연습 기간에는 극적인 부분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초연 시점에 이미 그 작품의 완성된 판본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카라얀 사운드가 만들어지는 방식의 다른 얼굴입니다. 레가토와 균질성이 소리의 결과라면, 녹음을 먼저 확정하고 무대를 거기에 맞추는 절차는 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공정입니다. 그는 연주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록을 기준으로 연주를 세웠습니다.

카메라를 직접 쥔 지휘자

그가 다룬 매체는 음반만이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 초 그는 영화감독 앙리 조르주 클루조와 손을 잡고 음악을 눈으로 보는 방식을 실험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영상은 슈만 교향곡 4번이 1965년, 베토벤 교향곡 5번과 모차르트 협주곡과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이 1966년, 베르디 레퀴엠이 1967년입니다.

말년에는 아예 자신의 영상 제작사를 세워 직접 제작에 나섰습니다. 음반에서 마이크 위치를 정하던 사람이 카메라 위치까지 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휘자가 소리의 최종 형태를 통제하려는 태도가 매체가 바뀔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이벌과 후계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22살 위 선배였습니다. 1938년 차이퉁의 카라얀 격찬 이후 그를 "K씨(Herr K.)"라고만 불렀다는 회고가 카라얀 주변 인물들의 증언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박자를 호흡처럼 늘이는 푸르트벵글러와, 박자를 통제하는 카라얀은 미학적으로 정반대였습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열 살 어린 동시대인이었습니다. 1970~80년대 클래식 음반 시장은 사실상 두 사람의 베토벤·말러 경쟁으로 굴러갔습니다. 번스타인의 격정과 카라얀의 광택은 같은 시대의 두 답이었습니다.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습니다. 1955년 베를린 필 상임 자리를 카라얀에게 빼앗긴 뒤 평생 거리를 두었고, 카라얀의 음반 우선주의를 "비누거품"이라 표현한 발언이 동시대 유럽 언론에 반복 인용되었습니다.

안네-소피 무터는 1976년 13세에 발탁되어 카라얀이 사망할 때까지 가장 자주 협업한 협연자가 되었습니다. 자신과 가장 다른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면서도, 자신을 따라올 다음 세대는 직접 길렀습니다.

빈에서 한 번, 베를린에서 한 번

맨 위 정보 박스에 적힌 빈 국립오페라 예술감독 자리도 조용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그 자리를 맡았고, 1964년 극장 총감독과의 갈등 끝에 물러났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형태가 보입니다. 그가 어느 조직에서든 원한 것은 소리의 최종 형태를 자기 손에서 확정할 권한이었습니다. 마이크 위치를 정하고, 카메라 위치를 정하고, 무대보다 녹음을 먼저 완성하는 방식이 모두 같은 요구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권한이 조직의 규칙과 부딪힐 때 그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1964년 빈이 한 번이었고, 다음 두 절에서 볼 1989년 베를린이 또 한 번이었습니다.

클라리넷 전쟁, 오케스트라가 표로 답하다

그의 35년에서 가장 크게 흔들린 시기는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입니다. 독일에서는 이 사건을 클라리넷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100년 넘게 새 단원을 받을지 말지를 단원들의 투표로 결정해 왔습니다. 이 자치권은 이 악단의 성공을 떠받친 가장 큰 이유로 꼽혀 왔습니다. 지휘자가 아무리 강해도 사람을 뽑는 것은 오케스트라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1982년 카라얀은 젊은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를 오케스트라와 상의하지 않고 데려왔습니다. 단원들은 그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소리가 섹션 안에서 섞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카라얀은 이것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고, 실제로 그때까지 이 악단은 사실상 남성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갈등은 빠르게 커졌습니다. 카라얀은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오케스트라의 음반과 영상과 방송 계약을 전부 취소하겠다고 압박했습니다. 단원들은 마지못해 1년 수습에 동의했습니다. 수습이 끝난 뒤 투표 결과는 73대 4, 압도적인 반대였습니다. 마이어는 아홉 달 만에 스스로 물러나 독주자의 길로 갔습니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카라얀은 오디션 절차 전권, 사무국 인사에 대한 전권, 단원 채용과 해임의 최종 결정권을 요구했습니다. 베를린 시 당국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잘츠부르크의 한 연주회에 자기 오케스트라 대신 빈 필하모닉 단원들을 자비로 실어 오는 방식으로 응수했습니다. 단원들 쪽에서는 다시 그와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사건은 앞에서 본 두 학파의 논쟁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통제와 균질성이라는 그의 미학이 소리 안에만 머물지 않고 조직 운영으로 나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이 3년이 실제 사례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 들어볼 지점 하나. 이 시기 전후의 그의 녹음에서 목관이 함께 화음을 이루는 대목에 귀를 두어 보십시오. 클라리넷 하나가 앞으로 나오는지, 아니면 오보에와 플루트 사이에 녹아들어 어느 악기인지 잠깐 헷갈리는지를 들어 보면, 단원들이 말한 섞임이 어떤 성질의 문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89년 4월의 사임서

1989년 4월 24일 그는 종신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34년 만이었습니다. 사임서에 적힌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건강이었습니다. 그는 척추 질환으로 심하게 고통받고 있었고 지휘대에서 떨어진 뒤로 다리를 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권한 범위를 두고 서베를린 당국과 벌인 갈등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앞 절의 3년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 글 맨 앞의 장면, 사임 소식을 들은 청중이 가득 찬 그 객석은 건강 문제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해 7월 16일 아니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음향은 정치를 압도했는가: 두 학파

카라얀에 대한 학계 시각은 1989년 사망 이후 두 갈래로 정리되었습니다. 한국어 자료에서는 주로 한쪽 입장만 소개되지만, 독일어·영어권 문헌은 두 입장을 함께 다룹니다.

시각 핵심 주장
미적 평가 분리설 정치적 행위와 음악적 성취는 독립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카라얀의 음향은 그의 도덕적 선택과 무관하게 미학적 분석의 대상이 된다.
통합 평가설 권력 구조 안에서 형성된 음향 미학은 그 구조와 분리될 수 없다. 특히 독일 전후 문화연구 계열에서는 카라얀의 통제·균질성·중앙집중적 결정 방식을 권위주의적 질서 감각과 연결해 읽으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습니다.

두 입장 모두 진지한 학문적 근거를 갖고 있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이긴 상태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음향은 거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사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승리는 부분적으로 다시 협상되는 중입니다.

문서로 확인되는 날짜들

앞에서 다룬 사실 가운데 날짜가 특정되는 것만 모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같은 연표 위에서 어떻게 겹치는지 보이도록 한 표에 담았습니다.

시점 확인되는 사실
1933년 4월 8일잘츠부르크에서 입당 신청, 가입비 납부, 당원번호 1607525
1933년 여름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 금지, 첫 당적은 유효해지지 못함
1935년 3월아헨에서 재가입, 당원번호 3430914
1938년 이후이중 당적 적발, 첫 당적 무효 처리, 두 번째 당적을 1933년 5월 1일로 소급
1946년빈에서 전후 첫 연주회, 이후 점령 당국이 지휘 활동 금지
1947년 10월 28일금지 해제 후 첫 공개 연주, 브람스 독일 레퀴엠, 음반 제작 겸행
1961년 12월 ~ 1962년 11월베토벤 교향곡 전집 녹음, 예수 그리스도 교회, 1963년 발매
1966년 9월 ~ 10월발퀴레 녹음, 베를린
1967년 3월 19일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 첫 무대, 발퀴레
1982년 ~ 1984년클라리넷 전쟁, 수습 투표 73대 4 부결, 지휘자의 인사 전권 요구를 시 당국이 거부
1989년 4월 24일베를린 필하모닉 사임, 재임 34년

오늘 어디서부터 들을까

처음이라면 1962년 베를린 필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입니다. 느리게 걷는 듯한 현의 물결에서 카라얀 사운드를 가장 빠르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한 발 더 들어간다면 1976년 차이콥스키 6번 '비창', 1972년 푸치니 '라 보엠'(파바로티·프레니), 1976년 시벨리우스 5번을 권합니다. 광활하고 색채적인 작품에서 카라얀의 균질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동하는 사례들입니다.

비교 청취를 해본다면 같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1962년 카라얀 녹음과 1947년 푸르트벵글러 녹음으로 이어서 들어보세요. 두 음향의 차이가 취향의 문제인지, 시대의 다른 답인지 직접 판단할 수 있습니다.

1962년 베를린 필 베토벤 교향곡 전집 LP 박스 자켓
1962년 베를린 필 베토벤 교향곡 전집 LP 박스(출처: gripsweat.com)

자주 묻는 질문

Q. 카라얀이 정말 나치당원이었나요?
사실입니다. 1933년 4월 잘츠부르크에서, 5월 아헨에서 두 차례 가입한 카드가 베를린 연방기록보관소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본인은 형식적 절차였다고 말했지만, 학계의 문제 제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Q. 푸르트벵글러와는 어떤 관계였나요?
음악적 라이벌이자 인간적 적대 관계였습니다. 카라얀을 "K씨(Herr K.)"라고만 불렀다는 회고가 카라얀 주변 인물들의 증언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 사망 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이어받으며 두 시대가 갈렸습니다.

Q. 어떤 베토벤 전집을 사면 좋을까요?
처음 듣는다면 1962년판입니다. 카라얀 사운드가 가장 광택 있게 정립된 시기입니다. 절제된 해석을 원하면 1977년판, 만년의 길어진 호흡은 1984년 디지털판입니다. 세 녹음을 비교하면 같은 작품에 내놓은 세 가지 답이 보입니다.

Q. 카라얀 사운드는 모든 작품에 어울리나요?
아닙니다. 베토벤·브람스처럼 거친 결이 있는 작품에서는 균질성이 개성을 지운다는 비판이 오래 있어 왔습니다. 반면 차이콥스키·R. 슈트라우스·시벨리우스·바그너·푸치니처럼 광활하고 색채적인 작품에서는 같은 음향이 오히려 작품의 규모를 살립니다.

마무리

음향은 어떻게 카랴얀의 정치적 과거를 압도했는가? 카라얀의 35년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큰 답이자 가장 큰 반박입니다. 미적 평가와 도덕적 평가를 분리할 수 있다는 입장도, 분리할 수 없다는 입장도 모두 진지한 학문적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을 강요하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닐 것입니다.

가장 정직한 권유는 이것입니다. 1962년 베토벤 5번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같은 곡의 푸르트벵글러 1947년 녹음을 이어 들어보십시오. 두 음향이 들려주는 차이가 취향의 문제인지, 그 너머의 시대적 선택이 함께 들리는지, 그 판단은 듣는 사람의 귀와 마음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