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케스트라의 공식 연혁 페이지에 이런 두 줄이 나란히 남아 있습니다. "1.1. 제5대 상임지휘자 정명훈 취임", 그리고 넉 달 뒤 "4.23. 상임지휘자 정명훈 사임". 1998년 KBS교향악단의 기록입니다. 취임 넉 달 만에 지휘봉을 놓은 이 일은 당시 한국 클래식계에서 가장 크게 회자된 사건 중 하나였고, 악단은 그 넉 달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 맨 위, 2026년 항목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1. 제10대 음악감독 정명훈 취임". 28년이 지나 같은 악단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사이 그는 파리의 새 오페라극장을 열었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을 10년간 이끌었으며, 이제 2027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할 예정입니다. 1778년에 문을 연 그 극장입니다.
이 글은 그 긴 궤적을 하나의 질문으로 꿰어 보려 합니다. 정명훈은 왜 늘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악단으로 돌아가는가. 답을 먼저 적어 두겠습니다. 그가 반복해서 맡은 자리는 완성된 명성이 아니라 아직 자기 소리를 갖지 못한 쪽이었고, 자신이 하는 일을 그는 30년 넘게 거의 같은 말로 설명해 왔습니다. 지휘자가 할 일은 음악가들이 자기 일을 해내도록 돕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글은 그 말이 그의 이력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따라갑니다.
• 한 줄 정의: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와 서울시립교향악단을 거쳐 2027년 라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 취임을 앞둔 한국의 지휘자
• 출생: 1953년 1월 22일, 피란지 부산 (7남매 중 여섯째, 생존 인물)
• 국적·활동 거점: 대한민국 / 프랑스·이탈리아·한국
• 활동 분야: 지휘자, 그리고 지금도 무대에 서는 피아니스트
• 가족: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동생
• 대표 자리: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1989~1994) ·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음악감독(2000~2015) ·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2006~2015) · KBS교향악단 제10대 음악감독(2026~) · 라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2027~)
처음 들을 음반
• 처음 접한다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녹음한 말러 교향곡 2번 〈부활〉(도이치 그라모폰). 곡 자체가 압도적이고, 그가 한국 악단과 어디까지 갔는지가 한 장에 담겨 있습니다.
• 그다음: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메시앙 〈투랑갈릴라 교향곡〉(도이치 그라모폰). 20세기 관현악의 물량과 색채를 좋아한다면 여기서 그의 정밀함을 만나게 됩니다.
| 이탈리아 공화국 건국 76주년 기념 음악회를 마친 뒤 마타렐라 대통령과 인사하는 정명훈.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2022년 6월 1일 (출처 : Wikimedia Commons · Quirinale · Attribution 라이선스) |
정명훈은 어떤 지휘자인가
정명훈은 유럽의 주요 오페라극장과 교향악단을 이끌어 온 한국의 지휘자이며, 2027년부터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을 맡을 예정입니다. 음악감독은 무대에서 지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극장의 음악적 방향을 이끄는 핵심 자리입니다.
이 극장은 1778년 8월 3일 살리에리의 오페라 〈인정받은 에우로파〉로 문을 열었습니다. 아시아 출신 지휘자가 이 극장의 음악감독이 되는 것은 처음이라고 AP 통신과 이탈리아 매체들이 전했습니다. 다만 극장이 낸 발표문 자체는 그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극장이 임명 이유로 든 것은 출신이 아니라 기록이었습니다. 1989년 이후 그가 이 극장에서 쌓은 공연 횟수입니다.
이력만 늘어놓으면 화려한 국제 경력의 목록이 됩니다. 하지만 그 목록을 시간순으로 놓고 보면 한 가지 특징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가 맡은 자리 상당수가 이미 완성된 명문 악단이 아니라, 새로 만들거나 다시 세워야 하는 자리였다는 점입니다. 19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는 문을 여는 극장이었고 그 오케스트라도 새로 꾸려지는 중이었습니다. 2006년의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재단법인으로 막 새 출발을 한 참이었습니다. 2023년 부산은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 KBS교향악단은 28년 전 그가 넉 달 만에 떠났던 악단입니다.
지휘자에도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미 세계 최고 소리를 가진 악단을 더 완벽하게 다듬는 쪽이었다면, 정명훈은 소리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곳으로 반복해서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우연인지 선택인지는 그의 말과 궤적을 함께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지휘자라는 직업 자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이 시리즈의 프롤로그 글을 먼저 읽어 보셔도 좋습니다.
피아노를 치던 아이가 지휘대에 서기까지
그는 1953년 1월, 전쟁을 피해 사람들이 몰려 있던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7남매 중 여섯째였습니다. 이 집안은 이미 음악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첼로를 든 누나 정명화와 바이올린을 든 누나 정경화가 있었고, 막내 쪽에 피아노를 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일곱 살이던 1960년, 그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피아노 협연 무대에 섰습니다. 서울시향은 훗날 그가 열 해 동안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이끌게 되는 바로 그 악단입니다. 이듬해 가족은 미국 시애틀로 건너갔고, 그는 그곳에서 음악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뉴욕의 매네스 음대와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배웠습니다.
그의 이름이 한국에 크게 알려진 계기는 지휘가 아니라 피아노였습니다. 1974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에 올랐습니다. 이 결과는 당시 한국에서 국가적인 사건처럼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피아니스트로 남지 않았습니다. 왜 지휘로 옮겨 갔는지에 대해 그는 두 차례 다른 자리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2010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그는 스스로 지휘자가 되길 원한 적이 없고 그냥 주어진 현실을 따라갔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누군가를 뒤따라가는 걸 좋아하는 편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2014년 음악 잡지 객석과의 인터뷰에서는 다르게 말했습니다. 최선을 다 쏟아부으려면 하나만 선택해야 했고, 처음에는 선택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지휘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도 함께 밝혔습니다. "말러의 교향곡은 피아노로 대체될 수 없다. 이렇게 거대한 교향곡은 온전히 오케스트라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 점이 나를 매료시켰고 지휘로 이끌었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소리를 자아내지 않아서인지 늘 피아노가 미련으로 남아 있다고도 했습니다.
1979년 그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에서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Carlo Maria Giulini)의 보조지휘자로 일을 시작했고, 2년 뒤 이 악단의 부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줄리니는 훗날 라 스칼라 극장이 정명훈의 임명을 발표하면서 그의 스승으로 언급한 인물입니다.
첫 상임 자리는 유럽에서 왔습니다. 1984년부터 1990년까지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맡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도 자리를 얻어 1992년까지 피렌체 테아트로 코무날레(Teatro Comunale di Firenze)의 수석객원지휘자로 일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이탈리아 음악평론가협회의 아비아티상을 1988년에 받은 상태였습니다.
파리 바스티유, 새 극장의 첫 오케스트라
1989년, 파리에 새 오페라극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바스티유 광장에 세워진 이 극장은 프랑스 혁명 200주년에 맞춰 개관한 국가적 사업이었고, 처음부터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정명훈은 이곳의 음악감독으로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일했습니다.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그가 이 극장에서 한 일의 성격은 지휘자보다 창설자에 가까웠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 전체가 그의 임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유네스코가 펴내는 잡지 쿠리에와의 인터뷰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프랑스 최고"라고 부르면서, 오페라극장이 존재하는 목적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극장 전체와 거기 몸담은 모든 사람의 목적은 음악가들이 자기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게 하고 스스로를 실현하도록 돕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지휘자의 직업윤리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지휘자는 직업적 태도와 윤리적인 삶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며, 직업성이 인간적 고려를 앞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음악과 삶은 서로 분리된 두 칸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의 평가도 뒤따랐습니다. 1991년 프랑스 극장 및 비평가 협회는 그를 올해의 음악가로 선정했습니다. 1990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었고, 그 첫 결실이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이었습니다. 이 녹음에는 작곡가의 아내이자 이 작품의 피아노 파트를 대표해 온 이본 로리오(Yvonne Loriod)와, 옹드 마르트노(ondes Martenot: 1920년대에 만들어진 전자 건반 악기) 연주자 잔 로리오(Jeanne Loriod)가 함께했습니다.
새 경영 체제와 권한·계약 조건을 둘러싼 갈등이 법적 분쟁으로 번졌고, 그의 바스티유 시절은 1994년에 끝났습니다. 새 극장을 함께 열었던 사람이 그 극장의 다음 단계에서 자리를 잃은 것입니다.
파리를 떠난 뒤에도 그의 무대는 이탈리아로 이어졌습니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로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를 맡았습니다. 앞서 피렌체에서 일했고 1989년부터는 라 스칼라 무대에도 서던 터라, 이 시기 그의 활동 중심에는 이탈리아가 있었습니다.
|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외관 (2022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 DiscoA340 · CC BY-SA 4.0) |
그는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만드는가
정명훈이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방식의 핵심은 통제가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인상이 아니라 그가 30년 간격을 두고 두 번, 거의 같은 문장으로 직접 말한 내용입니다.
앞서 본 바스티유 시절의 인터뷰에서 그는 극장의 목적이 음악가들이 자기 일을 더 쉽게 하도록 돕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인 2025년 12월 26일, KBS교향악단 음악감독 선임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KBS교향악단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음악가들을 사랑해주고 키워주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는 직업의 고충을 짚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음악가들이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 없어서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지휘자가 단원을 도구로 보지 않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그가 악단을 만드는 방식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는 이어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서로 사랑하고 음악을 같이 만들어간다는 마음을 갖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같은 자리에서 자기 방식이 바뀌었음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20년 전 서울시향을 맡았을 때는 몇 년 안에 세계적인 수준에 올려놓겠다는 목표가 확실했고, 올림픽에 나가는 것처럼 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이던 사람이 스스로 그 방식의 시효를 말한 것입니다. 이 발언은 그의 경력을 두 시기로 나눠 읽을 근거가 됩니다. 만들어 올리는 시기와, 만들어진 것을 지키고 키우는 시기입니다.
그의 소리는 어떻게 들리는가
정작 본인은 지휘자를 소리 내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2021년 피아노 음반을 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휘자는 완벽한 음악가는 아니에요. 소리를 안 내기 때문이죠. 소리를 내는 것이 음악가죠." 그렇다면 그가 만든 소리는 실제로 어떻게 들렸을까요. 최근 국내에서 나온 두 차례 공연 평이 좁게나마 구체적인 답을 줍니다. 두 번의 무대에서 나온 관찰이므로 그의 연주 전체에 대한 설명은 아닙니다.
2025년 2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이 같은 주에 나란히 말러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서울시향은 얍 판 츠베덴(Jaap van Zweden)의 지휘로 교향곡 7번을, KBS교향악단은 정명훈의 지휘로 2번 〈부활〉을 연주했습니다. 두 공연을 모두 본 한 음악칼럼니스트는 그 무대에 한해, 정명훈의 접근이 츠베덴과 사뭇 달랐다고 적었습니다. 신중한 시선과 노련한 손길이 연주의 외적 완성도보다 악곡의 깊은 내면으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악장에 대해서는 정명훈 특유의 영적인 해석이 절정에 달했다고 쓰면서, 앙상블의 완성도가 아주 높지는 않았고 실수도 나왔지만 오히려 그래서 부활을 향한 열망이 더 절박한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덧붙였습니다.
손동작에 대한 관찰도 있습니다. 2026년 7월 부산콘서트홀에서 그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했을 때, 현장을 지켜본 기자는 2악장을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꼽으며 담백한 손끝을 따라 팀파니가 단호한 울림을 터뜨리는 호흡이 압권이었다고 적었습니다. 4악장에서는 지휘봉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작은 불꽃을 그려냈다고 했습니다.
이 두 공연 평이 가리키는 방향은 같습니다. 정밀한 마감보다 밀도 쪽, 앙상블의 완결보다 곡이 말하려는 것 쪽입니다. 여기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완성도를 먼저 보는 귀에는 느슨하게 들릴 수 있고, 실제로 두 평 모두 그 점을 짚습니다. 두 무대만으로 그의 연주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두 번에 한해서라면,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선택으로 읽히는 이유는 앞에서 본 그의 통솔 방식과 정확히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단원을 밀어붙여 오차를 지우는 대신 함께 만들도록 두는 사람의 소리는 매끈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향해 가는 힘에서 승부가 납니다.
전체를 먼저 보는 이 태도를 그 자신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한 음악 잡지에 실린 글에 따르면 그는 독주자와 지휘자가 음악에 접근하는 과정이 아예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독주자는 개개의 음표를 익힌 다음에야 전체 그림을 생각하지만, 지휘자는 전체의 걸개를 먼저 파악한 뒤 부분을 섬세히 다듬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글의 필자는 2001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그가 메시앙의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앞줄의 젊은 연주자들을 아우르고 지지하다가 배경으로 물러나며 음악의 큰 걸개를 만들어 갔다고 적었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도 지휘자의 시선이 남아 있었다는 관찰입니다.
레퍼토리 쪽에서 그를 규정하는 이름은 베르디입니다. 라 스칼라 극장은 그를 소개하면서 베르디를 대표하는 해석자로 규정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라 스칼라에서 지휘한 오페라 아홉 편 가운데 세 편이 베르디입니다. 2016년과 2018년의 〈시몬 보카네그라〉, 2017년의 〈돈 카를로〉, 2019년의 〈라 트라비아타〉입니다. 2016년에는 이 〈시몬 보카네그라〉를 들고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무대까지 갔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이탈리아 오페라 전문가로만 두면 실제 이력과 어긋납니다. 라 스칼라에서만 봐도 그의 목록은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9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1995), 푸치니의 〈나비 부인〉(2007),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2009), 베버의 〈마탄의 사수〉(2017), 베토벤의 〈피델리오〉(2018)까지 걸쳐 있습니다. 극장 자신이 이 폭을 "레퍼토리의 넓이"라고 따로 언급할 정도입니다.
여기서 직함을 잠깐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상임지휘자와 음악감독은 한 악단을 실제로 책임지고 이끄는 자리입니다. 수석객원지휘자는 상임은 아니지만 매 시즌 정해진 몫을 맡기로 약속된, 손님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있는 자리입니다. 계관지휘자와 명예지휘자, 명예음악감독은 오랜 관계를 예우해 붙이는 이름으로, 정기적인 지휘 의무보다 유대를 확인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한 악단과 오래 가는 것도 그의 특징입니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는 2000년부터 2015년까지 15년을 함께했고 지금은 명예음악감독입니다. 도쿄 필하모닉과도 2001년부터 2010년까지 특별예술고문을 지낸 뒤 명예음악감독이 되었습니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에서는 그가 이 악단 역사상 처음으로 수석객원지휘자를 맡은 사람이고, 밀라노의 필라르모니카 델라 스칼라 역시 2023년 그를 악단 역사상 첫 명예지휘자로 임명했습니다. 두 악단 모두 자기 역사에서 처음이라는 사실을 공식 소개문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서울시향의 10년, 그리고 그 뒤의 10년
2005년 그는 재단법인으로 새로 출범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예술고문을 맡았고, 이듬해인 2006년부터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악단을 이끌었습니다. 일곱 살에 협연자로 섰던 그 악단이었습니다.
이 10년 동안 서울시향은 국제 음반 시장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11년 악단은 도이치 그라모폰과 5년 전속 음반계약을 맺었는데, 서울시향은 이것을 아시아 교향악단 역사상 최초의 사례로 공식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계약 아래 나온 음반들이 말러 교향곡 2번 〈부활〉과 5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베토벤 교향곡 9번입니다. 말러 2번 〈부활〉은 지금도 한국 오케스트라의 국제 음반 가운데 가장 널리 언급되는 축에 듭니다.
그가 남긴 것은 음반만이 아니었습니다. 2011년 그는 평양을 방문했고, 이듬해 파리에서 자신이 이끌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북한 은하수관현악단의 합동 공연을 성사시켰습니다. 앞서 2008년에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되었는데, 유니세프가 지휘자를 친선대사로 지명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습니다.
서울시향과의 관계는 2015년을 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약 10년 동안 그는 한국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자리를 맡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10년이 한국과의 단절은 아니었습니다. 2022년 1월 KBS교향악단은 그를 계관지휘자로 추대했고, 2023년 7월에는 부산이 그를 불렀습니다.
2026년의 정명훈, 부산과 KBS와 라 스칼라
2026년 현재 정명훈은 부산과 KBS에서 두 자리를 맡고 있으며, 라 스칼라 음악감독 취임도 앞두고 있습니다.
부산은 그의 출생지입니다. 2023년 7월 1일 그는 부산콘서트홀과 부산오페라하우스를 함께 총괄하는 클래식부산의 초대 예술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 3년 임기에 2년 연장 옵션이 붙은 계약이었고, 2026년 6월 말 초임이 끝난 뒤 그 연장 옵션이 실행되어 임기가 2028년 6월까지 이어집니다. 2025년 6월 부산콘서트홀이 문을 열었고, 부산오페라하우스는 2027년 9월 개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는 아직 열리지 않은 극장의 첫 자리에 있습니다.
부산에서의 그의 전략은 콘서트오페라입니다. 무대 장치 없이 연주회 형식으로 오페라를 올려 관객을 먼저 만들고, 오페라하우스가 열리면 전막 공연으로 넘어간다는 구상입니다. 2025년 12월 부산콘서트홀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올렸던 비제의 〈카르멘〉을 2026년 7월 11일과 12일 북항 특설무대에서 야외 오페라로 다시 선보였고, 10월에는 베르디의 〈오텔로〉를 콘서트오페라로 올릴 예정입니다. 비제의 이 작품이 야외 무대까지 나간 것은 관객층을 넓히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2026년 1월 1일에는 KBS교향악단 제10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 임기는 3년입니다. 1998년 넉 달 만에 떠났던 그 악단으로 28년 만에 돌아온 것이고, 서울시향 이후로는 약 10년 만의 국내 악단 지휘봉입니다. 2026년은 이 악단의 창단 70주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밀라노가 있습니다. 2025년 5월 라 스칼라 극장은 그를 차기 음악감독으로 발표했습니다. 극장이 밝힌 이유는 인맥이나 화제성이 아니라 숫자였습니다. 1989년 이후 그는 라 스칼라에서 오페라 아홉 편을 84회 무대에 올렸고 콘서트 141회를 지휘했는데, 이는 역대 음악감독들을 제외하면 최다 출연 기록입니다. 극장은 그를 두고 음악감독이 아닌 지휘자 가운데 라 스칼라의 국제적 위상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고 적었습니다.
임기의 시작점은 조금 헷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극장은 전임 리카르도 샤이의 계약이 끝나는 2026년 말부터 그의 임기가 시작된다고 밝히면서, 공식 안내는 "2027년 음악감독"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26/27 시즌이 이미 그의 첫 시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2026년 12월 7일, 성 암브로시오 축일에 맞춰 열리는 라 스칼라의 시즌 개막 공연을 그가 지휘할 예정입니다. 작품은 1887년 바로 이 극장을 위해 쓰인 베르디의 〈오텔로〉이고, 연출은 다미아노 미키엘레토가 맡습니다. 개막이 먼저 오고 취임이 그 직후에 오는 셈입니다.
|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외관, 스칼라 광장에서 (2011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 Jakub Hałun · CC BY-SA 4.0) |
대표 무대와 음반
그는 1990년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여러 레이블을 통해 40여 종의 음반을 냈습니다. 아래는 그 가운데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
- 메시앙 〈투랑갈릴라 교향곡〉: 도이치 그라모폰 전속 계약 이후 첫 결실. 이본 로리오와 잔 로리오가 참여했습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한국 오케스트라의 국제 음반 가운데 가장 널리 언급되는 한 장
- 말러 교향곡 5번: 같은 전속 계약 아래 이어진 말러 시리즈
-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그가 콩쿠르에서 이름을 얻은 작곡가로 돌아온 녹음
- 베토벤 교향곡 9번: 한국인 성악가들이 독창을 맡은 〈합창〉
피아노
- 하이든·베토벤·브람스 후기 피아노 작품집: 2021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낸 음반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은 그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무대 쪽에서 그의 기록이 가장 두텁게 쌓인 곳은 라 스칼라입니다. 1989년 이후 그가 이 극장에서 지휘한 오페라는 아홉 편이고, 극장이 공식으로 밝힌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르디가 셋으로 가장 많지만 20세기 러시아와 독일 작품, 모차르트까지 걸쳐 있다는 점이 함께 보입니다.
| 작곡가와 작품 | 정명훈 지휘 연도 |
|---|---|
| 쇼스타코비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 1992 |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살로메〉 | 1995 |
| 푸치니 〈나비 부인〉 | 2007 |
| 모차르트 〈이도메네오〉 | 2009 |
| 베르디 〈시몬 보카네그라〉 | 2016, 2018 |
| 베르디 〈돈 카를로〉 | 2017 |
| 베버 〈마탄의 사수〉 | 2017 |
| 베토벤 〈피델리오〉 | 2018 |
|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 2019 |
수상과 훈장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몰려 있습니다. 그가 경력의 중심을 둔 두 나라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받은 것은 1995년의 금관문화훈장인데, 역대 최연소 수훈이었습니다.
- 1988년, 2015년 이탈리아 음악평론가협회 프랑코 아비아티상
- 1991년 프랑스 극장 및 비평가 협회 올해의 음악가
- 1995년 금관문화훈장 (역대 최연소 수훈)
- 200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 (지휘자로는 최초)
- 2011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코망되르
- 2013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재단 평생음악상
- 2022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2등장 (한국인 최초)
- 2024년 피렌체 명예 열쇠
자주 묻는 질문
정명훈은 라 스칼라 음악감독으로 정확히 언제부터 일하나요?
극장이 밝힌 임기 시작 시점은 전임 리카르도 샤이의 계약이 끝나는 2026년 말이고, 극장은 이를 '2027년 음악감독'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다만 2026/27 시즌 자체가 이미 그의 첫 시즌으로 소개되고 있어서, 2026년 12월 7일 개막 공연인 베르디 〈오텔로〉를 그가 지휘할 예정입니다. 개막이 먼저 오고 임기 시작이 그 직후에 오는 구조라 연도가 헷갈리기 쉽습니다.
정명훈과 정명화, 정경화는 어떤 관계인가요?
친남매입니다. 첼리스트 정명화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누나이고 정명훈이 동생으로, 세 사람은 7남매 가운데 함께 연주 활동을 이어 온 남매입니다. 세 남매가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로 이룬 앙상블이 정트리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정명훈은 지금도 피아노를 연주하나요?
연주합니다. 2026년 7월 8일 부산콘서트홀 개관 1주년 페스티벌에서 그는 지휘봉을 놓고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올라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 3번 등을 연주했습니다. 그의 출발점이 지휘가 아니라 피아노였다는 사실이 지금도 무대에서 그대로 확인되는 셈입니다.
마무리
다시 그 연혁 페이지로 돌아가 봅니다. 1998년 1월 1일 취임, 같은 해 4월 23일 사임. 두 줄 사이의 넉 달은 지워지지 않았고, 그 위로 2022년 계관지휘자와 2026년 제10대 음악감독이 차례로 쌓였습니다. 스물여덟 해가 걸린 이 두 줄의 간격이 그의 방식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밀어붙여 몇 해 만에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식이었다면 1998년의 넉 달은 그냥 실패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음악가들이 자기 일을 해내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라면 결과는 임기 안에 다 나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한 방식입니다. 본인은 2010년 인터뷰에서 스스로 고른 적이 없고 주어진 현실을 따라갔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따라간 자리들이 하나같이 시간이 드는 자리였다는 사실은 남습니다. 바스티유에서는 새 오케스트라가 자리 잡는 과정 전체를 임기로 썼고, 서울에서는 10년을 썼으며, 부산에서는 공연장이 지어지는 동안을 쓰고 있습니다. 앞서 본 두 편의 공연 평이 그의 연주에서 매끈한 마감보다 곡의 내면을 먼저 읽어낸 것도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오차를 지우는 일과 사람을 키우는 일은 같은 시간에 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는 오래 후자를 택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라 스칼라는 그가 걸어온 길 가운데 성격이 다른 자리입니다. 만들거나 다시 세울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에서 가장 완성된 축에 드는 극장을 그대로 이어받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만들 것이 없는 곳에서 만드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가 2027년부터 확인될 것이고, 그것이 이 임명의 진짜 시험일 것입니다. 2026년 12월 7일, 그는 밀라노에서 〈오텔로〉의 첫 화음을 낼 예정입니다. 1778년에 문을 연 극장의 음악감독 자리에서입니다.
그의 음악이 궁금해졌다면 서울시향과의 말러 2번 〈부활〉부터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만들어지는 중이던 악단이 어디까지 갈 수 있었는지가 그 한 장에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의 일정과 직함은 2026년 8월 초 기준이며, 라 스칼라와 부산의 계획은 앞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