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와 바그너, 바그너파와 브람스파는 어느 쪽이 승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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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책을 읽다 보면 19세기 유럽 음악계가 브람스파와 바그너파로 갈라져 싸웠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이 글은 그 싸움에서 어느 쪽이 이겼는지 살펴보려고 처음 썼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읽은 자극적인 일화들을 당시의 편지와 두 사람이 직접 쓴 글, 같은 시대 사람들의 회고까지 거슬러 다시 찾아보니 이야기가 꽤 달라졌습니다. 이번 개정은 확인한 것과 확인하지 못한 것을 나누어 다시 썼습니다.

먼저 결론의 방향을 말해 두면 이렇습니다. 두 진영이라는 구도를 처음 만든 것은 엉뚱한 과녁을 향한 선언문 하나와 그것을 키운 평론가들이었습니다. 그 구도 안에서 바그너는 직접 펜을 들어 브람스를 공격했고, 브람스는 끝까지 지면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싸움의 모양이 두 사람에게 똑같지 않았던 셈입니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스무 살 차이가 나는 독일어권 작곡가입니다. 바그너는 대본과 음악과 무대를 한 사람이 쥐는 악극으로 오페라의 판을 바꾸려 했고, 브람스는 교향곡과 협주곡, 실내악처럼 베토벤 이후 이미 무거운 전통이 쌓인 기악 형식 안에서 자기 길을 찾았습니다. 한쪽은 새 그릇을 만들었고, 다른 쪽은 옛 그릇을 다시 채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가 곧 두 진영의 차이로 굳어졌습니다.

수염을 기른 만년의 브람스 사진(왼쪽)과 바그너 사진(오른쪽)을 나란히 붙인 이미지
왼쪽은 수염을 기른 만년의 브람스, 오른쪽은 바그너다. 스무 살 차이의 두 사람은 1864년 2월 빈 근교에서 하룻저녁을 함께 보냈다.

브람스와 바그너의 만남, 1864년 펜칭의 저녁

두 사람은 처음부터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1862년 가을 둘은 거의 같은 무렵 빈에 와 있었습니다. 독일 인명사전은 브람스가 이때 처음 빈에 와서 바그너를 알게 되었고, 바그너가 그의 작품을 좋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공연 날짜가 바짝 붙은 날도 있었습니다. 1863년 12월 27일에는 낮에 피아니스트 카를 타우지히가 연 연주회에서 바그너가 자기 작품을 지휘했고, 같은 날 저녁 다른 공연장에서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이 빈에서 처음 공개 연주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저녁으로 기록이 자세히 남은 것은 1864년 2월 초의 일입니다. 바그너는 빈 근교 펜칭에 빌린 저택으로 브람스와 타우지히를 불러 달라고 친구인 의사 요제프 슈탄트하르트너에게 쪽지를 보냈고, 그 쪽지가 지금도 전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슈탄트하르트너의 의붓아들은 훗날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브람스는 바흐의 오르간 토카타를 친 뒤, 바그너가 따로 청하자 자기 작품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를 연주했습니다. 바그너는 곡의 세부를 하나하나 짚으며 칭찬했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옛 형식으로도 아직 이만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겠군요.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이 말은 흔히 빈정거림으로 소개됩니다. 옛 형식은 끝났다고 본 바그너가 그 형식에 매달린 젊은이를 비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을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바그너가 꾸밈없이 따뜻하게 칭찬했다고 기억했습니다. 33년 뒤에 나온 회고라는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그래도 적어도 이 저녁만큼은 두 사람 사이에 싸움보다 호기심이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1860년 선언문, 리스트를 겨냥한 화살

그런데 바그너는 그 전부터 브람스를 반대편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1860년의 선언문 때문입니다.

당시 라이프치히의 음악 잡지 「노이에 차이트슈리프트 퓌어 무지크」는 편집장 프란츠 브렌델 아래에서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신독일악파를 밀고 있었습니다. 이 잡지는 진지한 음악가라면 결국 다들 자기들 편이고, 적어도 북독일에서는 미래음악을 둘러싼 논쟁이 이미 끝났다는 식으로 썼습니다. 여기에 반발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이 1860년 3월 초 동료 베른하르트 숄츠와 함께 항의문을 짰습니다. 그 잡지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며, 신독일악파 지도자와 제자들의 작품은 음악의 본질에 어긋나므로 안타깝게 여기거나 배격할 수밖에 없다는 짧은 글이었습니다. 서명은 함부르크에 있던 스물여섯 살의 브람스가 자기 주소로 모았습니다.

일은 서툴게 흘러갔습니다. 동조하는 음악가들에게 문안을 돌리고 서명을 모으는 사이 초안이 새어 나갔습니다. 브렌델의 잡지는 1860년 5월 4일 호에 이 항의문을 비꼰 가짜 성명을 실었고, 이틀 뒤인 5월 6일 베를린의 음악 신문 「에코」에는 브람스, 요아힘, 율리우스 오토 그림, 숄츠 네 사람의 이름만 붙은 선언문이 실렸습니다. 지지 서명은 그 뒤 스무 명 넘게 모였지만, 선언은 이미 조롱거리가 된 뒤였습니다. 서명자는 「바이올린 켜는 사람」, 「새 길 한스」 같은 별명이었는데, 요아힘과 브람스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새 길」은 슈만이 젊은 브람스를 세상에 소개한 글의 제목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녁입니다. 이 글이 정면으로 겨냥한 것은 리스트와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브람스는 다듬던 문안을 두고 요아힘에게 리스트의 이름을 꼭 넣고 싶다고 썼습니다. 그래야 바그너에게 고집을 부린다는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선언을 바그너를 향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독일의 대표 인명사전은 이때부터 브람스가 바그너와 싸우는 쪽의 우두머리로 여겨졌고, 바그너의 크기를 잘 알던 브람스에게는 무척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고 적습니다. 뒤에 바그너도 1864년 무렵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 선언문이 새어 나간 것이었고 브람스가 그 문구에 다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번 붙은 이름표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평론가들이 키운 싸움, 한슬리크와 볼프

두 사람을 맞세운 것은 무엇보다 평론가들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빈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가 있습니다. 한슬리크는 1854년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음악의 아름다움은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나 그 뒤에 숨은 이야기가 아니라 소리 자체가 짜이고 움직이는 모양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표제나 극에 기대지 않는 이른바 절대음악의 논리였고, 그 논리에 가장 잘 맞는 동시대 작곡가가 브람스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1863년 12월 27일의 두 공연을, 한슬리크는 12월 29일 빈의 신문 「디 프레세」에 실은 한 기사 안에 나란히 놓았습니다. 바그너 작품을 듣고 난 뒤라 브람스의 새 작품을 두 배로 즐겁게 들었다고 쓰고, 이런 곡이야말로 미래음악의 대업에 대한 가장 좋은 비평이자 응답이라고 덧붙였습니다. 1860년 선언문의 서명자가 바그너의 연주회 기사에서 바그너를 깎는 잣대로 쓰인 것입니다.

반대편에도 펜이 있었습니다. 바그너를 따르던 작곡가 후고 볼프는 1880년대 빈의 잡지 「살롱블라트」에 비평을 쓰면서 브람스를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브람스의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두고는 브람스의 진짜 재능은 솜씨 좋게 만들어 내는 데 있으며, 그의 작품 전체가 베토벤과 멘델스존과 슈만에 대한 하나의 큰 변주일 뿐이라고 썼습니다. 바그너파는 교향곡 쪽에서 브람스에 맞설 인물로 안톤 브루크너를 내세웠습니다. 브루크너는 1873년 바그너를 찾아가 교향곡 3번을 그에게 바친 사람입니다. 독일 인명사전의 표현을 빌리면, 빈의 신문에서 한슬리크는 브람스를 위해 바그너와 브루크너에 맞섰고 볼프는 그 둘을 위해 브람스에 맞섰는데, 양쪽의 집요함이 똑같았습니다.

정작 브람스는 이 지면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오랜 친구인 시인 클라우스 그로트는 브람스가 바그너를 깎아내리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회고했습니다. 신문에서 바그너를 헐뜯는 글을 함께 읽던 날, 브람스는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를 진짜 배후로 여기지만 자기야말로 그들 누구보다 바그너를 잘 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의 기억이니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브람스가 공개 지면에 바그너를 공격한 글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바그너의 펜, 1869년 이후의 공격

바그너 쪽은 달랐습니다. 펜칭의 저녁에서 다섯 해 뒤인 1869년, 바그너는 「지휘에 대하여」라는 긴 글에서 브람스의 이름을 직접 꺼냅니다. 브람스가 언젠가 친절하게도 진지한 변주곡 한 곡을 쳐 주었는데, 그것을 듣고 그가 농담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곡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연주회에서 들은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는 딱딱하고 나무토막 같아서 몹시 거북했다고 적었습니다. 바로 앞 대목에서는 브람스를 포함한 보수적인 음악가 무리를 우리 고전 음악의 순결을 지키는 파수꾼, 곧 궁궐 하렘의 내시 같은 처지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해 바그너는 1850년 가명으로 냈던 「음악 속의 유대주의」를 크게 늘려 이번에는 자기 이름으로 소책자를 펴냈습니다. 새로 붙인 후기에서는 한슬리크와 그의 1854년 책을 겨냥해, 그의 유대계 혈통을 들먹였습니다. 브람스 진영의 대변자를 공격하는 데 반유대주의 논리를 끌어온 것입니다. 이 글의 성격과 그 뒤의 역사는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1870년대 말까지 비꼼은 이어졌습니다. 1879년의 글에서는 작곡을 가르치는 일은 브람스풍 교향곡을 쓰는 베토벤 후계자들에게 맡겨 두면 된다고 썼고, 1882년의 공개 편지에서는 먼 훗날에는 브람스 교향곡 아홉 곡이 남고 베토벤 교향곡은 두 곡쯤 남을지도 모른다고 비아냥댔습니다.

그런데 공개 지면 밖의 장면은 조금 다릅니다. 브람스는 바그너가 1861년 파리 공연을 위해 새로 쓴 〈탄호이저〉 베누스베르크 장면의 자필 원고를 갖고 있었습니다. 타우지히가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1875년 6월 바그너는 그 원고를 돌려 달라는 편지를 보내며, 당신에게는 진귀한 물건 정도의 값어치밖에 없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브람스는 원고를 돌려주면서, 내 수집품에서 보물 하나를 가져가는 대신 당신의 작품, 이를테면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총보로 내 서가를 채워 준다면 무척 기쁘겠다고 답했습니다. 바그너는 그 총보가 다 떨어졌다며 대신 〈라인의 황금〉 총보를 보냈습니다. 서로 날을 세운 진영의 두 대표가 편지로는 이렇게 악보를 주고받았습니다.

소문 세 가지, 다시 확인한 결과

이 글의 처음 판은 책에서 읽은 일화 세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바그너가 브람스의 공연을 보고 낡은 형식에서 못 벗어난 사람이라고 혹평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브람스가 한슬리크에게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흘렸으며, 바그너는 브람스가 결혼하지 못한 것을 성기능 문제로 조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확인한 결과는 이렇습니다.

첫째, 낡은 형식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말이 시점과 상황을 바꾸어 전해진 것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 말은 1876년 교향곡 1번 초연 뒤가 아니라 1864년 사적인 자리에서 헨델 변주곡을 듣고 한 말이고, 그 자리에서는 칭찬으로 들렸습니다. 공개적인 혹평은 그 뒤 1869년의 글에서 나왔습니다.

둘째, 브람스가 바그너의 사생활을 한슬리크에게 흘렸다는 이야기는 이번 조사에서 뒷받침할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친구의 회고와 남아 있는 글로 보면 브람스는 바그너를 공개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바그너가 브람스의 독신을 성기능 문제로 놀렸다는 문장은 바그너의 글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처음 판에서 바그너 본인에게는 근거가 없다고 썼던 것은 고쳐야 합니다. 바그너는 1869년 브람스의 이름을 꺼낸 바로 그 대목에서 보수파 음악가들을 하렘의 내시에 빗댔습니다. 여기에 1888년 니체가 『바그너의 경우』에서 브람스에게는 할 수 없음의 우울이 있으며 그는 넘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넘치기를 갈망한다고 쓴 대목도 있습니다. 이 두 대목이 어떤 경로로 지금의 소문이 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보면 니체의 말은 브람스 음악의 성격을 겨눈 비유이고, 바그너의 비유는 보수파 무리 전체를 향한 조롱입니다. 두 글 모두 브람스의 몸이나 결혼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1876년, 〈반지〉와 교향곡 1번이 나온 해

두 진영의 대립에서 1876년은 상징적인 해입니다. 그해 8월 13일 바그너는 자기 구상대로 지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첫 축제를 열었고, 〈니벨룽의 반지〉 네 편이 8월 13·14·16·17일, 네 번의 공연일에 걸쳐 처음으로 완전한 사이클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석 달 뒤인 11월 4일에는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 카를스루에에서 오토 데소프의 지휘로 처음 연주되었고, 사흘 뒤 만하임에서는 브람스 자신이 지휘했습니다.

브람스는 이 교향곡을 오래 붙들고 있었습니다. 1862년에 이미 1악장의 초기 형태가 있었고, 1863년 1월 친구 알베르트 디트리히에게 보낸 편지에는 c단조 교향곡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이 편지에서 초연까지만 해도 약 14년이 걸렸습니다. 흔히 말하는 20년이 넘는 세월은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센 숫자인데, 그 출발점은 이번에 편지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곡이 어떤 무게를 견디며 나왔는지는 브람스 교향곡 1번 해설에서 이어 읽을 수 있습니다.

한쪽은 네 편으로 된 악극 사이클을 자기 극장에서, 다른 쪽은 네 악장의 교향곡을 작은 도시 카를스루에의 악단과 함께 내놓았습니다. 두 진영이 내세운 길이 같은 해에 각자의 가장 큰 결과물로 나온 셈입니다. 바그너가 이 교향곡에 대해 따로 남긴 평은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3년 뒤 그는 앞에서 본 것처럼 브람스풍 교향곡을 쓰는 베토벤 후계자들을 비꼬았습니다.

바그너파와 브람스파, 그래서 승자는 누구인가

살아 있을 때의 판세는 바그너 쪽이 우세했습니다. 독일 인명사전은 브람스가 작품을 쓰던 수십 년 동안 음악계가 바그너의 등장과 개선 행진으로 깊이 흔들렸다고 적습니다. 그런데 그 판세를 가장 날카롭게 꼬집은 사람은 바그너를 떠난 니체였습니다. 그는 1888년 브람스의 행운은 독일인의 오해였다고 썼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그너의 맞수로 받아들였는데, 맞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브람스에게도 적대적이었지만, 이 한 문장은 이 싸움의 구조를 잘 짚습니다. 바그너라는 거대한 이름 맞은편에 누군가를 세워야 했고, 그 자리에 선언문의 서명자이자 한슬리크가 아끼던 브람스가 놓였습니다.

실제 음악가들은 진영의 선을 자주 넘었습니다.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바그너와 브람스를 똑같이 헌신적으로 지휘했습니다. 바그너의 제자였던 한스 폰 뷜로는 아내 코지마가 바그너에게 간 뒤 브람스의 열렬한 옹호자로 돌아섰습니다. 젊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브람스풍으로 곡을 썼습니다. 독일 인명사전은 시간이 흐르며 두 진영의 대립이 차차 닳아 없어졌다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20세기에 이 싸움의 판정을 뒤집는 사람이 나옵니다. 브람스 탄생 100주년이던 1933년 2월,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라디오 강연 「진보주의자 브람스」에서 브람스를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새 음악의 선구자로 읽었습니다. 짧은 동기를 쉬지 않고 바꾸어 가며 곡 전체를 짜는 방식과, 두 마디 네 마디씩 고르게 끊어지지 않는 선율의 흐름이 20세기 음악을 앞질렀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은 1947년 고쳐 쓴 뒤 1950년 그의 글 모음집에 실렸습니다. 쇤베르크 자신은 바그너의 화성과 브람스의 짜임새를 함께 물려받은 작곡가였습니다.

그래서 제 답은 이렇습니다. 오늘날 공연장에서 둘 중 어느 쪽이 사라졌느냐로 따지면 승자는 없습니다. 바그너의 악극도 브람스의 교향곡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연주됩니다. 다음 세대가 무엇을 물려받았느냐로 따지면 둘 다 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그너에게서는 해결을 끝없이 미루는 화성과 거대한 관현악을, 브람스에게서는 작은 동기 하나로 곡 전체를 짜는 방법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다만 쇤베르크의 브람스 읽기에는 자기 음악의 정당성을 브람스에게서 찾으려는 뜻도 담겨 있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승자를 가리던 싸움이 결국 둘을 함께 물려받는 것으로 끝났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해석이라는 점도 덧붙여 둡니다.

바그너의 다른 적수들, 멘델스존과 마이어베어와 베르디

바그너는 브람스 말고도 여러 작곡가와 날을 세웠습니다. 그중 가장 무거운 것은 개인적인 다툼이 아니라 반유대주의입니다. 1850년 바그너는 「음악 속의 유대주의」를 K. 프라이게당크라는 가명으로 발표해 멘델스존과 마이어베어를 과녁으로 삼았습니다. 멘델스존은 이미 1847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마이어베어는 그때 살아 있었고 원래 글에서는 이름 대신 우리 시대의 유명한 유대인 작곡가라고만 불렸습니다. 마이어베어는 1839년 파리로 가던 무명 청년 바그너를 따뜻하게 맞아 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1869년 바그너가 이 글을 크게 늘려 자기 이름으로 다시 펴낸 일은 앞에서 말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동갑내기 주세페 베르디와는 전혀 다른 관계였습니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났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신 베르디가 바그너의 부고를 읽은 다음 날인 1883년 2월 14일 출판업자 줄리오 리코르디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슬프다는 말을 세 번 되풀이한 뒤, 바그너가 죽었다는 전보를 읽고 거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따지지 맙시다. 거대한 개성 하나가 사라집니다. 예술의 역사에 아주 깊은 자국을 남길 이름입니다.」

두 진영을 귀로 듣는 법

두 진영의 차이는 글보다 귀로 더 빨리 잡힙니다. 세 곡이면 충분합니다.

먼저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입니다. 1864년 펜칭의 저녁에 바그너가 들은 바로 그 곡입니다. 헨델의 짧고 단정한 주제 하나가 스물다섯 번 모습을 바꾼 뒤, 마지막에 여러 성부가 차례로 쫓아 들어오는 푸가로 쌓여 끝납니다. 같은 재료를 끝까지 붙들고 다르게 비추는 힘, 그것이 브람스 진영이 믿은 음악의 모습입니다. 바그너가 말한 옛 형식이 무엇을 가리켰는지 마지막 푸가에서 분명히 들립니다.

다음은 1876년에 나온 두 곡의 첫머리를 이어서 들어 보는 것입니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은 팀파니가 같은 낮은 음을 무겁게 두드리는 가운데 현악기는 위로, 관악기는 아래로 벌어지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긴장이 꽉 조여 있습니다.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 전주곡은 낮은 음 하나가 길게 깔린 위로 호른이 하나씩 겹쳐 들어오며 몇 분에 걸쳐 천천히 부풀어 오릅니다. 한쪽은 짧은 시간 안에 힘을 응축하고, 다른 쪽은 시간을 길게 늘여 소리의 강물을 만듭니다. 같은 해에 나온 두 첫머리가 두 진영의 차이를 그대로 들려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바그너파와 브람스파는 왜 갈라졌나요?

1860년 요제프 요아힘이 베른하르트 숄츠와 문안을 짜고 브람스가 서명을 모은 항의문이 계기였습니다. 리스트 중심의 신독일악파와 그들을 미는 음악 잡지를 겨냥한 글이었는데, 초안이 네 사람의 서명만 단 채 새어 나가 조롱을 받았고, 세상은 이것을 바그너를 향한 선언으로 읽었습니다. 그 뒤 빈의 한슬리크와 바그너파 평론가들이 지면에서 대립을 키웠습니다.

Q. 바그너는 브람스를 직접 만난 적이 있나요?

있습니다. 1862년 빈에서 알게 되었고, 1864년 2월 초 빈 근교 펜칭의 바그너 숙소에서 저녁을 함께 보냈습니다. 브람스가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를 연주하자 바그너는 옛 형식으로도 아직 이만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며 칭찬했다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회고했습니다.

Q. 바그너가 브람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글이 있나요?

있습니다. 1869년 「지휘에 대하여」에서 브람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그의 피아노 연주가 딱딱하다고 썼고, 브람스 주변의 보수적인 음악가들을 순결을 지키는 하렘의 내시에 빗댔습니다. 1879년과 1882년의 글에서도 브람스의 교향곡을 비꼬았습니다. 반면 브람스가 바그너를 공개적으로 공격한 글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Q. 바그너가 브람스의 독신을 성기능 문제로 조롱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그런 문장은 바그너의 글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것은 1869년 바그너가 보수파 음악가들을 하렘의 내시에 빗댄 대목과, 1888년 니체가 브람스에게는 할 수 없음의 우울이 있다고 쓴 대목입니다. 두 글 모두 브람스의 몸이나 결혼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Q. 1876년이 왜 상징적인 해인가요?

8월 13일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니벨룽의 반지〉 전곡이 처음 연속 공연되었고, 11월 4일 카를스루에에서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 초연되었습니다. 두 진영이 내세운 길이 같은 해에 각자의 가장 큰 결과물로 나왔습니다.

Q. 바그너파와 브람스파, 결국 누가 이겼나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생전에는 바그너의 기세가 더 컸지만 대립은 차차 누그러졌고, 1933년 쇤베르크는 브람스를 새 음악의 선구자로 다시 읽었습니다. 다음 세대는 바그너의 화성과 관현악, 브람스의 동기 짜임새를 함께 물려받았습니다.

이번에 다시 찾아보면서 가장 크게 남은 것은, 자극적인 일화일수록 출처가 허술했고 출처가 분명한 기록일수록 더 흥미로웠다는 점입니다. 바그너의 낡은 형식 이야기는 실은 펜칭의 저녁에 나온 칭찬이었고, 두 진영을 가른 선언문은 정작 리스트를 겨냥한 서툰 초안이었습니다. 공개 지면에서는 바그너가 브람스를 비꼬았지만, 편지로는 〈라인의 황금〉 총보가 브람스에게 건너갔습니다.

다음에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을 때는 첫머리의 팀파니 소리 뒤에 그 해 여름 바이로이트에서 울린 〈라인의 황금〉의 낮은 음을 떠올려 보세요. 두 진영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 바로 그 해,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가장 큰 곡을 세상에 내놓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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