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 생애와 작품, 오페라를 음악극으로 바꾼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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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1883년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난 독일 작곡가입니다. 그는 〈니벨룽의 반지〉,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 같은 무대 작품을 남겼고, 대본을 직접 썼으며, 자기 작품만을 위한 극장을 바이로이트에 세웠습니다. 이 글은 그 마지막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젊은 시절의 바그너는 리가와 파리와 드레스덴의 기존 극장에 맞추어 오페라를 썼지만, 망명 이후의 그는 작품과 함께 그것을 올릴 극장까지 상상했습니다. 수배자로 스위스에 숨어 살던 1850년에 이미 판자로 지은 극장을 꿈꾸었고, 26년 뒤 그것을 실제로 열었습니다. 그 사이의 삶을 따라가면 그의 음악과 함께 그의 빚, 그의 후원자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쓴 반유대주의 글까지 한자리에서 보게 됩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대본과 음악을 함께 쓰고, 그것을 올릴 극장까지 직접 세운 19세기 독일 작곡가
• 생몰: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치히 ~ 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 국적·활동지: 독일 / 라이프치히, 리가, 파리, 드레스덴, 취리히, 뮌헨, 트리브셴, 바이로이트, 베네치아
• 활동 분야: 작곡가, 지휘자, 대본가, 저술가, 극장 설립자
• 대표작 3개: 〈니벨룽의 반지〉,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

바그너 시작하기
• 처음 접한다면: 〈로엔그린〉 1막 전주곡 → 〈탄호이저〉 서곡 → 〈발퀴레의 기행〉 →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순서가 좋습니다.
• 들을 곳: Spotify · Apple Music · YouTube에서 「Wagner Lohengrin Prelude」, 「Wagner Tannhäuser Overture」, 「Ride of the Valkyries」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바그너는 누구인가, 오페라를 음악극으로 바꾼 사람

바그너는 오페라를 노래 대목의 연속에서 음악과 말과 무대가 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극으로 바꾼 작곡가입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그 결과를 음악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작 바그너 자신은 이 이름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1872년에 따로 짧은 글을 써서, 요즘 「음악극(Musikdrama)」이라는 말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말은 맞지 않는다고 따졌습니다. 그는 〈니벨룽의 반지〉를 「무대 축전극」, 〈파르지팔〉을 「무대 봉헌 축전극」이라고 불렀습니다. 작품의 이름에 극장과 축제를 넣은 것입니다.

노년의 리하르트 바그너가 벨벳 깃이 달린 상의를 입고 정면을 조금 비켜 바라보는 흑백 초상 사진
리하르트 바그너. 1871년 뮌헨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듬해 그는 바이로이트로 옮겨 축제극장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는 작곡가였지만 동시에 대본가였고, 지휘자였으며, 자기 작품을 설명하는 글을 끝없이 쓴 저술가였습니다. 다른 작곡가들이 교향곡·실내악·가곡·오페라를 고르게 남겼다면, 바그너는 젊은 시절의 습작을 빼면 거의 평생을 무대 작품에 쏟았습니다. 남의 대본에 음악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와 말, 관현악, 무대, 마침내 객석과 건물까지 자기 손으로 정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바그너 이후의 음악사는 그를 피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드뷔시, 쇤베르크는 바그너를 받아들이거나, 넘어서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기 길을 만들었습니다. 독일의 대표 인명사전은 바그너를 베토벤과 나란히 19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곡가로 꼽습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음악만으로 읽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 음악가들을 공격하는 글을 썼고, 그 글은 그가 죽은 뒤 나치 독일에서 열렬한 독자를 만났습니다. 음악의 혁신과 사상의 그늘을 함께 보아야 바그너가 보입니다. 둘 중 하나만 보면 그는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지나치게 단순해집니다.

바그너 생애, 극장에서 자란 아이와 베토벤

바그너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아들이 태어나고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듬해 어머니는 집안과 가까웠던 배우이자 초상화가, 극작가인 루트비히 가이어와 재혼했고, 바그너는 열네 살이던 1827년 말까지 가이어라는 성을 썼습니다. 독일 인명사전은 그의 어린 시절이 자기 출생에 대한 혼란 속에 있었다고 적습니다. 가이어가 실제 아버지가 아니냐는 의심은 훗날 니체가 공개적으로 비꼬면서 널리 퍼졌지만, 그것을 확인해 주는 기록은 없고 표준 사전은 카를 프리드리히를 아버지로 적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아이가 극장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다는 점입니다. 형 알베르트는 오페라 가수였고 누나 로잘리는 배우였습니다. 바그너가 정식으로 작곡을 배운 것은 열여덟 살이던 1831년 늦여름부터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 테오도어 바인리히에게 받은 몇 달이 전부입니다. 그 앞에는 교본을 붙든 독학이 있었고, 그 뒤에는 작은 극장들을 떠도는 현장이 있었습니다. 라우흐슈테트, 마그데부르크, 쾨니히스베르크, 그리고 지금의 라트비아에 있는 리가에서 그는 지휘하며 일했고, 그사이 빚을 졌습니다.

청년 바그너에게 베토벤은 중요한 기준이었지만 그 관계는 일직선이 아니었습니다. 1842년에 써서 이듬해 발표한 짧은 자서전에서 그는 스물한 살 무렵 「나의 모범 베토벤을 버렸다」고 적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은 한 시대를 닫는 마침돌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무렵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에 끌렸습니다. 그러다 파리에서 음악원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 9번을 듣고 다시 사로잡혔고, 드레스덴 궁정 악장이 된 뒤인 1846년에는 이 곡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초기 작품 〈요정〉과 〈연애 금지〉는 여러 양식을 흡수하던 시기의 결과물입니다. 〈요정〉은 바그너가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1836년 마그데부르크에서 초연한 〈연애 금지〉는 실패해 빚만 남겼습니다. 다음 작품 〈리엔치〉는 파리의 대형 오페라를 본보기로 삼은 다섯 막짜리 대작이었습니다.

바그너를 베토벤 이후 독일 음악의 흐름 안에서 보고 싶다면, 베토벤 교향곡 9번 해설과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바그너는 이 곡을 파리에서 다시 만났고, 드레스덴에서 지휘했으며, 바이로이트 극장의 주춧돌을 놓던 날에도 지휘했습니다.

바그너 생애의 전환점, 혁명과 망명과 왕의 후원

바그너의 생애는 몇 번의 전환점에서 크게 꺾였습니다. 1839년의 항해, 1849년의 드레스덴 봉기, 1864년 루트비히 2세의 부름은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쓸 수 있는지를 바꾼 사건이었습니다.

1839년 폭풍우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1839년 여름, 리가에서 빚에 몰린 바그너는 아내 민나와 함께 작은 범선을 타고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1843년의 자서전에 그는 이 항해가 3주 반 걸렸고 세 번 큰 폭풍을 만나 한 번은 노르웨이 항구로 피해야 했다고 적었습니다. 노르웨이의 바위섬 사이를 지나며 받은 인상, 그리고 선원들의 입에서 다시 들은 유령선 전설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독특한 색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글에서 그는 이 오페라의 이야기 줄기가 하이네가 쓴 유령선 이야기, 특히 바다를 영원히 떠도는 사람의 구원을 다룬 대목에서 왔다고도 밝혔습니다. 폭풍은 색을 주었고 이야기는 책에서 왔습니다. 두 가지 모두 바그너 자신의 기록이라, 어느 한쪽만 떼어 신화로 만들 이유는 없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빌려 들여놓은 뒤 선원들의 합창과 물레 잣는 여인들의 노래부터 쓰기 시작했고, 일곱 주 만에 오페라 전체를 작곡했다고 적었습니다.

드레스덴 궁정 악장, 그리고 〈반지〉의 씨앗

파리에서 보낸 세 해는 가난했지만, 1842년 10월 드레스덴에서 〈리엔치〉가 크게 성공하면서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이듬해 1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같은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2월에 바그너는 작센 궁정의 두 번째 악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시기에 〈탄호이저〉(1845년 초연)와 〈로엔그린〉이 나왔습니다.

훗날 〈니벨룽의 반지〉가 되는 이야기도 이 드레스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48년 가을 그는 영웅 지크프리트의 죽음을 다룬 비극의 대본을 썼습니다. 이 대본이 나중에 앞으로 세 편을 더 거느리며 4부작이 되고, 마지막 편 〈신들의 황혼〉으로 바뀝니다. 〈반지〉가 망명 중에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849년 드레스덴 봉기와 취리히 망명

1849년 5월 드레스덴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궁정 악장 바그너는 봉기 편에 섰습니다. 봉기가 진압되자 그는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이마르의 리스트에게 몸을 피했고, 리스트 쪽의 도움으로 남에게서 빌린 여권과 도피 자금을 얻어 5월 말 스위스 취리히에 닿았습니다. 독일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게 된 것은 1860년의 부분 사면 뒤였고, 수배가 완전히 풀린 것은 1862년이었습니다.

취리히의 바그너는 무대가 없는 대신 글을 썼습니다. 1849년에 「예술과 혁명」과 「미래의 예술작품」을, 1850년부터 이듬해까지 「오페라와 드라마」를 써서 기존 오페라를 비판하고 음악과 시와 무대가 다시 하나가 되는 극을 구상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 망명 1년 차인 1850년 9월에 친구 키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지크프리트 이야기에 정말 곡을 붙일 생각인데, 아무 극장에나 맡길 생각은 없다고. 여기에 자기 설계대로 판자로 극장을 짓고, 가장 알맞은 가수들을 불러, 이 한 번의 공연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겠다고. 그는 돈도 무대도 없는 수배자였습니다.

쇼펜하우어와 베젠동크,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탄생

1854년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읽고 깊이 빠졌습니다. 삶에 대한 의지를 끊어야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은 그 뒤 그의 작품들에 짙게 배었습니다.

그를 먹여 살린 것은 부유한 후원자들이었습니다. 1857년 4월 바그너 부부는 상인 오토 베젠동크의 저택 옆에 마련된 작은 집으로 들어갔고, 바그너는 여기서 〈반지〉 작곡을 멈추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매달렸습니다. 1857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그는 오토의 아내 마틸데 베젠동크가 쓴 시 다섯 편에 곡을 붙였습니다. 그중 〈꿈〉과 〈온실에서〉 두 곡은 바그너 자신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위한 습작이라고 적었고, 실제로 이 오페라와 음악 재료를 나눕니다. 두 사람의 감정이 어디까지였는지는 기록마다 다르게 읽히지만, 결과는 분명합니다. 집안에 불화가 생겼고 바그너는 1858년 취리히를 떠났습니다. 그 뒤 몇 해 동안 그는 베네치아, 루체른, 파리, 빈을 떠돌며 빚을 더 쌓았습니다.

1864년 루트비히 2세의 후원

1864년 봄 바그너는 빈에서 빚 때문에 갇힐 위기에 몰려 몸을 피해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해 4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말로 도움이 되는 기적」을 바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적은 5월 3일에 왔습니다. 그해 3월 왕위에 오른 열여덟 살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그를 뮌헨으로 불렀습니다. 19세기 말의 전기는 이 젊은 왕이 즉위 전부터 바그너의 작품을 열렬히 사랑했다고 적습니다.

뮌헨에서 바그너는 하루아침에 돈 걱정에서 벗어났고, 1865년 6월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초연되었습니다. 왕은 젬퍼에게 바그너를 위한 대형 축제극장 설계까지 맡겼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씀씀이와 젊은 왕에게 미치는 지나친 영향력, 뷜로의 아내 코지마와의 관계가 궁정과 시민의 반발을 샀고, 왕은 1865년 12월 결국 그를 뮌헨에서 내보냈습니다. 극장 계획도 그 자리에서 멈췄습니다. 바그너는 이듬해 봄 스위스 루체른 호숫가의 트리브셴에 자리를 잡고 코지마와 살림을 차렸습니다.

바그너 음악 특징: 무한선율, 트리스탄 화음, 유도동기

바그너 음악의 핵심은 극의 흐름을 끊지 않고 이어지는 선율, 해결을 미루는 반음계 화성, 그리고 인물과 사물을 짧은 동기로 기억시키는 유도동기에 있습니다. 이 세 요소가 겹치면서 아리아와 합창이 번호를 달고 차례로 이어지던 오페라와는 다른 극이 되었습니다.

초기, 전통 오페라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찾다

초기 바그너는 베버의 독일 낭만 오페라와 파리의 대형 오페라에 크게 기대었습니다. 〈리엔치〉는 대규모 합창과 군중 장면으로 성공했지만, 아직 바그너만의 문법이 완성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부터 바그너다운 세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방랑, 저주, 구원이라는 주제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관현악은 반주를 넘어 인물의 속마음과 바다의 압력을 함께 들려줍니다.

중기,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의 상징적 세계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은 바그너가 낭만 오페라에서 새로운 극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입니다. 〈탄호이저〉는 쾌락과 구원 사이에서 흔들리는 기사를 다루고, 〈로엔그린〉은 성배의 기사와 이름을 묻지 말라는 금기를 다룹니다. 〈탄호이저〉 서곡은 바그너가 이 곡의 끝에 무엇을 담았는지 직접 설명을 남긴 곡이기도 합니다. 그 설명은 〈탄호이저〉 서곡 해설에서 따라가 볼 수 있습니다.

〈로엔그린〉 1막 전주곡은 바그너 입문에 좋은 곡입니다. 높은 현악이 아주 여리게 겹쳐 오르며 성배의 세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오페라 3막의 합창은 오늘날 결혼식 입장곡으로 쓰이는데, 원래 가사가 무엇을 노래하는지는 〈로엔그린〉 혼례의 합창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성숙기,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화성의 지연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1865년 뮌헨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첫머리에 나오는 이른바 「트리스탄 화음」은 전통적인 해결을 계속 미루며 사랑과 죽음의 긴장을 음악 자체로 만듭니다.

트리스탄 화음은 흔히 F, B, D♯, G♯ 네 음으로 설명됩니다. 중요한 것은 음의 이름보다 기능입니다. 이 화음은 정해진 도착점으로 곧장 가지 않고, 듣는 사람을 해결되지 않은 기다림 속에 붙잡아 둡니다. 금지된 사랑이 해결되지 못한 채 이어지는 극의 내용이 해결되지 않는 화성의 시간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바그너는 후대 음악의 문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드뷔시와 쇤베르크가 바그너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 많은 작곡가가 조성을 다루는 방식을 이 작품과의 거리로 가늠하게 되었습니다.

유도동기, 기억을 만드는 음악의 언어

유도동기, 곧 라이트모티프는 특정 인물·사물·감정·운명을 짧은 음악 동기로 기억시키는 방식입니다.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반지, 저주, 신들의 성 발할, 검, 지크프리트 같은 요소들이 각기 다른 동기와 이어집니다.

다만 「라이트모티프」라는 이름을 바그너가 붙였다고 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바그너의 젊은 추종자 한스 폰 볼초겐이 〈반지〉의 동기들을 해설하며 널리 퍼뜨렸습니다. 바그너 자신도 1879년의 글에서 이것을 「내 젊은 친구가 이른바 라이트모티프라고 부른 것」이라고 적어, 그 이름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바그너가 남긴 것은 이름보다 실제 작곡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오늘의 영화음악과도 이어집니다. 특정 인물이 나올 때 익숙한 선율이 나타나고, 그 선율이 상황에 따라 어둡게 변하거나 크게 부풀어 오르는 방식은 지금도 영화와 드라마에서 널리 쓰입니다.

바그너 양식의 변화

시기 대표작 핵심 특징
초기 〈리엔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파리 대형 오페라의 영향, 저주와 구원 모티프의 등장
중기 〈탄호이저〉, 〈로엔그린〉 상징적 전주곡, 성배 이미지, 낭만적 기사 세계
성숙기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반음계 화성, 끊기지 않는 선율, 유도동기의 체계화
후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파르지팔〉 전통과 혁신의 병치, 의례적 시간 감각

바이로이트, 26년 동안 상상한 극장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바그너가 자기 작품, 그중에서도 〈니벨룽의 반지〉를 올리기 위해 세운 극장입니다. 1876년 8월 13일 이곳에서 첫 축제가 열렸고, 〈반지〉 4부작은 8월 13·14·16·17일, 네 번의 공연일에 걸쳐 처음으로 완전한 사이클로 공연되었습니다. 〈라인의 황금〉이 전야, 〈발퀴레〉·〈지크프리트〉·〈신들의 황혼〉이 사흘에 해당합니다.

붉은 벽돌과 흰 목조 틀이 섞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정면, 맑은 하늘 아래 아치형 창이 줄지어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정면. 1872년 주춧돌을 놓고 1876년 첫 축제를 열었다. 사진 출처는 바이로이트 관광 공식 사이트다.

리가의 헛간 극장에서 취리히의 판자 극장까지

바이로이트 축제 측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그너는 훗날 한 음악가에게 리가 시절의 극장에서 세 가지가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습니다. 원형극장처럼 가파르게 올라가는 객석, 어두운 객석, 그리고 꽤 깊이 놓인 오케스트라입니다. 언젠가 자기 뜻대로 극장을 짓게 되면 이 셋을 생각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일부 음악가들이 헛간이라고 깎아내리던 소박한 극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래 지난 뒤의 회고를 전기 작가가 옮긴 말이라, 리가의 경험이 바이로이트를 낳았다고 곧장 이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바이로이트의 객석과 오케스트라 자리가 실제로 이 셋을 닮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 분명한 기록은 망명 시절의 편지들입니다. 앞서 본 1850년 9월의 편지에서 그는 취리히에 판자 극장을 짓겠다고 했고, 1851년에는 다른 친구에게 혁명이 지금의 극장들을 다 무너뜨린 뒤 라인 강가에 극장을 세우고 사람들을 큰 축제에 불러 나흘 동안 작품 전체를 올리겠다고 썼습니다. 나흘에 걸친 4부작, 이것만을 위한 극장, 축제라는 형식이 이미 이때 다 나와 있습니다. 그때 〈반지〉는 대본만 있고 음악은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남의 극장에서 겪은 일

루트비히 2세의 뮌헨은 이 꿈에 가장 가까이 간 곳이었지만, 1865년의 추방으로 극장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그 뒤 1869년과 1870년에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가 4부작에서 떨어져 나와 뮌헨 궁정극장에서 따로 초연되었는데, 바그너는 이 공연들이 예술적으로 불충분하다며 가지 않았습니다. 뮌헨의 무대는 결국 왕의 무대였습니다. 그는 1871년 프랑켄 지방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를 찾았고, 그곳의 화려한 옛 오페라극장이 〈반지〉에는 너무 작다는 것을 확인한 뒤 새 극장을 짓기로 했습니다.

극장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1872년 5월 22일, 자신의 쉰아홉 번째 생일에 바그너는 축제극장의 주춧돌을 놓았고, 이를 기념해 시내의 옛 오페라극장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했습니다. 건물 설계는 건축가 오토 브뤽발트가 맡았지만, 객석과 오케스트라의 구조는 바그너의 요구에서 나왔습니다. 옆으로 늘어선 칸막이 좌석을 없애 객석에 위계를 두지 않았고, 고대 원형극장을 본뜬 부채꼴 객석을 계단처럼 쌓았습니다. 공연 중에는 객석을 어둡게 했습니다.

가장 독특한 것은 오케스트라 자리입니다. 바그너는 연주자들을 계단식으로 낮추어 무대 아래로 집어넣고 가림막으로 가려, 객석에서 지휘자도 연주자도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관객과 무대 사이에 놓인 이 빈 공간을 「신비로운 심연」이라고 불렀습니다. 음악은 어디서 나는지 모르게 솟아오르고, 관객의 눈은 무대 위의 이야기에만 머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어두운 객석과 무대 중심의 몰입을 바그너 혼자 발명했다고 말하면 과장이지만, 그가 이 관습을 굳히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합니다.

1876년의 성공과 적자, 1882년의 〈파르지팔〉

극장을 짓는 일은 몇 번이나 멈출 뻔했습니다. 후원 협회를 만들어 지지자들에게 돈을 모으려던 계획은 목표에 크게 못 미쳤고, 1874년 루트비히 2세가 대출을 내주고서야 공사가 다시 움직였습니다. 1876년 첫 축제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와 루트비히 2세, 그리고 리스트가 왔고 〈반지〉는 세 차례 전곡 공연되었습니다. 그러나 축제는 큰 적자로 끝났고, 극장은 그 뒤 여섯 해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이 돈 이야기는 바그너의 지갑 사정에서 따로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 축제는 1882년 여름에 열렸습니다.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이 7월 26일 초연되어 8월 말까지 열여섯 번 공연되었고, 이번에는 재정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바그너가 「무대 봉헌 축전극」이라 부른 이 작품은 바이로이트 극장의 소리에 맞추어 다듬어졌습니다. 1876년 축제에서 금관이 현악을 덮는다고 느낀 바그너는 1882년 리허설 때 무대 가장자리 아래에 금관 소리를 누그러뜨리는 덮개를 더 달게 했습니다.

베네치아의 마지막 겨울

〈파르지팔〉 축제가 끝난 뒤 이미 건강이 나빠진 바그너는 가족과 함께 베네치아로 갔습니다. 대운하에 면한 팔라초 벤드라민에서 겨울을 나며 다음 여름 축제를 준비하던 그는 1883년 2월 13일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흔 번째 생일을 몇 달 앞둔 때였습니다. 유해는 바이로이트로 옮겨져 그가 살던 집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습니다. 판자 극장을 꿈꾼 지 서른세 해, 자기 극장을 연 지 일곱 해 만이었습니다.

바그너의 관계망, 리스트와 코지마와 니체와 레비

바그너의 생애는 혼자 만든 성공담이 아닙니다. 그는 평생 누군가의 돈과 무대에 기대었고, 그 사람들과 자주 부딪혔습니다.

프란츠 리스트는 망명 중인 바그너에게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도피를 도왔을 뿐 아니라, 바그너가 독일 무대에 설 수 없던 1850년 8월 28일 바이마르에서 〈로엔그린〉을 초연했습니다. 작곡가가 없는 초연이었고, 바그너가 이 오페라를 무대에서 처음 본 것은 11년 뒤인 1861년 빈에서였습니다. 리스트는 그 뒤로도 여러 번 돈을 보냈고, 바그너는 그에게 「나는 낭비가다, 그래도 정말 무언가가 나오기는 한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리스트의 딸 코지마 때문에 가장 크게 흔들렸습니다. 코지마는 1857년 리스트의 제자이자 바그너의 충실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와 결혼했지만, 1860년대에 바그너와 가까워져 그와의 사이에서 이졸데(1865), 에바(1867), 지크프리트(1869)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뷜로가 뮌헨에서 〈트리스탄〉 초연을 지휘하던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리스트가 딸을 바그너에게서 떼어 놓으려 하자 바그너는 한동안 그를 원망하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1872년 5월 바그너가 리스트에게 바이로이트 정초식에 와 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오랜 단절이 풀리기 시작했고, 그해 9월과 10월 서로 찾아가면서 두 사람은 화해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정확히 정리해야 합니다. 바그너의 첫 아내 민나 플라너와 바그너는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1836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1858년 한 차례 헤어졌다가 파리에서 다시 함께 살며 화해를 시도했지만 1862년 최종적으로 갈라섰고, 민나는 1866년 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지마는 1870년 뷜로와의 이혼이 성립한 뒤 그해 루체른에서 바그너와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바그너가 죽은 뒤 코지마는 바이로이트 축제를 이끌며 그의 주요 작품을 모두 그 무대에 올렸습니다.

니체와의 관계는 바그너 수용사의 또 다른 장면입니다. 젊은 니체는 트리브셴을 드나들며 바그너에게서 그리스 비극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훗날 바그너에게서 멀어졌고, 1888년의 「바그너의 경우」에서는 바그너를 신랄하게 공격했습니다. 같은 글의 각주에서 그는 바그너 자신만이 증언하는 그의 삶의 모든 대목을 믿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지나친 말이지만, 바그너의 자서전을 읽을 때 기억해 둘 만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헤르만 레비의 이름은 바그너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1882년 〈파르지팔〉 초연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의 중심은 루트비히 2세가 내준 뮌헨 궁정극장 단원들이었고, 지휘는 뮌헨 궁정극장의 지휘자인 유대계 헤르만 레비가 맡았습니다. 왕의 단원과 함께 온 지휘자였다는 사정이 있었지만, 바그너는 유대인을 공격하는 글을 쓰면서 자기 마지막 작품의 초연을 유대계 지휘자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미화할 필요도, 지울 필요도 없습니다.

바그너와 리스트의 관계를 더 넓게 보고 싶다면 프란츠 리스트 생애와 작품을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리스트는 바그너의 동료이자 장인이 되었고, 19세기 음악의 혁신을 다른 방향에서 밀어붙인 인물이었습니다.

바그너 당대 평가와 후대 논쟁, 반유대주의의 그림자

바그너는 살아 있을 때부터 열광과 반발을 함께 불러일으킨 작곡가입니다. 그의 음악은 미래의 음악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의 글과 사상은 오늘날까지 지울 수 없는 논쟁을 남겼습니다.

당대 음악계에서 바그너는 하나의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따르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미래의 음악을 보았고, 반대자들은 형식의 붕괴와 과잉된 감정을 보았습니다. 빈의 비평가 한슬리크가 대표적인 반대자였습니다. 19세기 후반 음악계는 바그너파와 반바그너파의 긴장 속에서 움직였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바그너파와 브람스파, 어느 쪽이 승리했을까? 

음악적 영향만 놓고 보면 바그너의 자리는 매우 큽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 화성은 이전과 같은 안정감만으로 설명되기 어려워졌고, 〈니벨룽의 반지〉의 유도동기는 음악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예고하는 방법을 바꾸었으며, 바이로이트는 극장 자체가 작품 해석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적 혁신만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1850년 9월, 판자 극장 편지를 쓰던 바로 그 무렵,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의 음악 잡지에 「음악 속의 유대주의」라는 글을 K. 프라이게당크라는 가명으로 실었습니다. 유대인 음악가들을 깎아내리는 글이었고, 멘델스존과 마이어베어가 과녁이었습니다. 마이어베어는 1839년 파리로 가던 길의 무명 청년 바그너를 따뜻하게 맞아 준 사람이었습니다. 바그너는 1869년 이 글을 크게 늘려 소책자로 다시 펴냈고, 19세기 말의 독일 인명사전도 새로 붙인 대목이 원래 글보다 더 날카로웠다고 적었습니다. 한때의 실언이 아니라 스무 해 가까이 붙든 생각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는 세 층위로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첫째, 바그너가 반유대주의 글을 쓰고 다시 펴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둘째, 그 생각이 음악 작품 안에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셋째, 바그너가 죽은 뒤 그의 음악과 바이로이트가 나치 독일에 이용된 과정은 또 다른 역사입니다. 독일 인명사전은 이 셋째 층위에 대해, 바그너가 미리 온 나치는 아니었지만 그의 세계관 가운데 특히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에게서 열렬한 수용자를 만났고, 그것을 가장 열심히 부추긴 것이 며느리 위니프레트 바그너와 사위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을 중심으로 한 바이로이트의 가족이었다고 정리합니다.

이 세 층위를 섞으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지우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정치 구호로 줄여 버려서도 안 됩니다. 더 정직한 태도는 음악의 혁신을 인정하되, 그 혁신이 어떤 언어와 세계관 속에서 자기를 정당화하려 했는지 끝까지 묻는 것입니다.

감상할 때 기억할 점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 일은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그늘을 모른 척한 채 「음악만 순수하게 듣자」고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그너 감상은 음악의 감동과 역사의 책임을 함께 견디는 일에 가깝습니다.

바그너 대표작 목록, 어디서부터 들어야 할까

바그너의 대표작은 파리 대형 오페라를 닮은 초기작에서 출발해, 4부작 〈반지〉와 〈트리스탄〉을 거쳐 바이로이트만을 위해 쓴 〈파르지팔〉로 이어집니다. 처음 듣는다면 전곡 완주보다 작품별 성격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그너 주요 작품

작품 초연 감상 포인트
〈리엔치〉 1842년 드레스덴 파리 대형 오페라 방식의 첫 성공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1843년 드레스덴 저주받은 뱃사람과 구원, 바다의 관현악
〈탄호이저〉 1845년 드레스덴 쾌락과 구원, 성과 속의 충돌
〈로엔그린〉 1850년 바이마르(리스트 지휘, 작곡가 부재) 성배의 기사, 여리게 떠오르는 1막 전주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1865년 뮌헨 트리스탄 화음, 해결되지 않는 사랑의 긴장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1868년 뮌헨 전통과 혁신의 화해, 바그너의 드문 희극
〈니벨룽의 반지〉 1876년 바이로이트 전곡 초연(〈라인의 황금〉 1869년·〈발퀴레〉 1870년 뮌헨 단독 초연) 권력, 저주, 신들의 몰락을 다룬 4부작
〈파르지팔〉 1882년 바이로이트 연민과 구원, 후기 바그너의 의례적 시간

〈니벨룽의 반지〉는 전체 길이가 매우 길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주를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라인의 황금〉 전주곡, 〈발퀴레〉 1막, 〈발퀴레의 기행〉처럼 구조가 비교적 선명한 부분부터 들어도 충분합니다. 〈발퀴레의 기행〉이 영화와 만나 어떤 이미지를 얻었는지는 발퀴레의 기행에서 다루었습니다.

바그너 입문 5단계
1. 〈로엔그린〉 1막 전주곡, 바그너의 신비로운 현악 음향을 가장 부드럽게 만나는 길
2. 〈탄호이저〉 서곡, 장엄한 합창적 선율과 관현악 대비를 한 번에 들을 수 있는 곡
3. 〈발퀴레의 기행〉, 금관과 리듬의 힘을 곧바로 느끼는 곡
4.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해결되지 않는 화성의 긴장을 듣는 핵심 입문곡
5. 〈파르지팔〉 1막 전주곡, 후기 바그너의 느리고 의례적인 시간 감각

바그너 이후의 관현악 세계가 궁금하다면 브루크너의 생애와 작품으로 이어 가면 좋습니다. 브루크너는 1873년 바그너를 찾아가 교향곡 3번을 그에게 헌정했고, 바그너 이후의 음향과 규모를 교향곡 안에서 자기 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바그너는 왜 중요한 작곡가인가요?

바그너는 대본과 음악을 함께 쓰고 노래 번호가 이어지던 오페라를 끊기지 않는 극으로 바꾸었으며, 그것을 올리기 위한 극장까지 직접 세운 작곡가입니다. 반음계 화성과 유도동기는 후대 작곡가들과 영화음악의 서사 방식에까지 영향을 남겼습니다.

Q. 바그너 작품은 무엇부터 들으면 좋을까요?

처음에는 〈로엔그린〉 1막 전주곡이나 〈탄호이저〉 서곡부터 듣는 것이 좋습니다. 두 곡은 길이가 부담스럽지 않고, 바그너 특유의 관현악 색채를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Q. 바그너는 자기 작품을 음악극이라고 불렀나요?

아닙니다. 「음악극(Musikdrama)」은 당시 사람들이 바그너의 작품을 가리켜 쓴 말이고, 바그너 자신은 1872년의 글에서 이 이름이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니벨룽의 반지〉를 「무대 축전극」, 〈파르지팔〉을 「무대 봉헌 축전극」이라 불렀습니다.

Q. 바그너의 총체예술이란 무엇인가요?

총체예술(종합예술작품, Gesamtkunstwerk)은 음악, 시, 몸짓, 무대가 하나의 극적 목적을 위해 결합되는 예술을 말합니다. 이 말은 바그너보다 먼저 있었지만, 그가 1849년 「예술과 혁명」에서 자기 구상을 설명하는 데 쓰면서 그의 이름과 묶이게 되었습니다.

Q. 라이트모티프는 바그너가 만든 말인가요?

아닙니다. 이 이름은 바그너의 추종자 한스 폰 볼초겐 같은 해설자들을 통해 퍼졌고, 바그너 자신은 1879년의 글에서 「젊은 친구가 이른바 라이트모티프라고 부른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다만 짧은 동기를 반복하고 변형해 인물과 운명을 기억시키는 방식은 바그너의 작품에서 체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Q.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논쟁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바그너가 1850년 가명으로 「음악 속의 유대주의」를 발표하고 1869년 크게 늘려 다시 펴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생각이 음악 작품 안에 어느 정도 스며 있는지, 그리고 작품을 작곡가의 사상과 어디까지 떼어 감상할 수 있는지는 지금도 논쟁적입니다.

Q. 바그너는 어디서 어떻게 세상을 떠났나요?

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팔라초 벤드라민에서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해는 바이로이트로 옮겨져 자택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습니다.

Q. 〈니벨룽의 반지〉는 꼭 전부 들어야 하나요?

처음부터 전부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전체는 전야와 사흘로 이루어진 4부작이지만, 처음에는 〈라인의 황금〉 전주곡이나 〈발퀴레〉 1막, 〈발퀴레의 기행〉부터 들어도 충분합니다.

마무리: 우리는 왜 여전히 바그너를 듣는가

바그너를 듣는 일은 19세기 음악이 어떻게 20세기의 문턱을 열었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의 음악은 사랑과 죽음, 권력과 저주, 구원과 몰락을 줄거리로 설명하지 않고 소리의 기억으로 새깁니다.

그는 오페라를 바꾸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페라를 둘러싼 조건을 모두 바꾸려 했습니다. 대본을 직접 쓰고, 신화를 다시 엮고, 오케스트라가 인물의 속마음을 말하게 만들고, 관객이 앉는 극장까지 작품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그 일을 그는 대부분 남의 돈으로 했고, 그 돈을 준 사람들과 자주 부딪혔습니다. 판자 극장을 꿈꾸던 망명자의 책상 위에는 같은 해 쓴 반유대주의 글도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그너의 업적은 그의 그늘을 지울 때가 아니라 함께 볼 때 더 정확해집니다. 반유대주의 글을 남긴 인물이라는 사실은 결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동시에 그의 음악이 후대 예술의 언어를 바꾸었다는 사실도 쉽게 지울 수 없습니다.

오늘은 〈로엔그린〉 1막 전주곡 하나만 들어도 충분합니다. 그다음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을 들으며 해결되지 않는 화성이 어떻게 한 시대의 감각을 바꾸었는지 느껴 보십시오. 바그너는 사랑하기도 불편해하기도 어려운 작곡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면서도 불편해해야만 제대로 들리는 작곡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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