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생애와 작품, 모차르트를 죽이지 않은 궁정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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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 가을, 정신이 무너져 가던 일흔세 살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병상에서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가 실제로 무어라 했는지는 기록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주변이 그렇게 알아들었고, 그 해석이 소문이 되었습니다. 그 소문 하나로 빈 궁정을 반세기 동안 지킨 이 작곡가는 이후 이백 년 동안 질투에 눈이 멀어 천재를 파멸시킨 악당으로 기억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를 실제로 돌본 간병인도, 의사도 그런 자백을 들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정신이 맑을 때의 살리에리 자신도 이 소문을 여러 차례 부인했습니다. 살리에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이 한마디의 헛소문 뒤에 가려져 있습니다.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글루크의 후원을 받아 빈 궁정악장을 지내며 베토벤·슈베르트를 가르친 작곡가
• 생몰: 1750년 8월 18일(이탈리아 레냐고) ~ 1825년 5월 7일(오스트리아 빈)
• 국적·활동지: 이탈리아 출생, 열다섯 살에 빈으로 가 빈을 거점으로 평생 활동
• 활동 분야: 오페라 작곡가, 빈 궁정악장, 음악 교육자
• 대표작: 〈아르미다〉(1771), 〈다나오스의 딸들〉(Les Danaïdes)(1784), 〈타라르〉(Tarare)(1787)

처음 들을 작품
• 처음 접한다면: 〈아르미다〉 서곡. 스무 살의 살리에리를 빈의 신예로 세운 첫 큰 성공작입니다.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최근 들어 다시 무대와 음반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라 스칼라 개관작이었던 〈신분이 밝혀진 에우로파(L’Europa riconosciuta)〉은 226년 동안 공연되지 않다가 2004년 리카르도 무티가 라 스칼라 재개관 공연으로 되살렸고, 2017년에는 이 실황이 DVD로 발매되었습니다. 2021년에는 하이델베르크 신포니커가 연주한 음반 〈살리에리와 베토벤의 대화〉가 헨슬러 클라식에서 나왔고, 이듬해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의 학술지 「Eighteenth-Century Music」 19권 1호가 이 음반을 다루었습니다. 그의 오페라 전체가 얼마나 폭넓게 부활했는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런 개별 사례들을 통해 그의 음악을 실제로 듣고 볼 길은 계속 넓어지고 있습니다.

유화 초상화. 백발의 노년 남성이 짙은 남색 코트에 흰색 크라바트를 매고, 목에는 금줄과 별 모양의 훈장을 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배경은 짙은 갈색이다.
요제프 빌리브로르트 멜러(Joseph Willibrord Mähler)가 1815년에 그린 살리에리의 초상. 빈 음악애호가협회 소장.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작가 사후 100년 경과).

살리에리는 어떻게 빈 궁정에 들어갔는가

살리에리는 1750년 8월 18일, 베네치아 공화국의 소도시 레냐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음악은 집안에 이미 있었습니다. 형 프란체스코가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그 형을 가르친 사람이 〈악마의 트릴〉로 알려진 주세페 타르티니였습니다. 살리에리는 그 형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열서너 살 무렵 부모를 여읜 그를 거둔 것은 베네치아의 귀족 조반니 모체니고였습니다. 1766년, 산마르코 대성당의 테너 페르디난도 파치니가 그를 빈에서 활동하던 궁정 작곡가 플로리안 레오폴트 가스만에게 소개했고, 가스만은 그를 데리고 그해 6월 15일 빈에 도착했습니다. 가스만은 빈에 도착하자마자 살리에리를 성당으로 데려가 그의 배움과 봉사를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치렀는데, 살리에리는 이 순간을 평생 마음에 새겼습니다.

빈에서 살리에리에게 결정적인 인물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였습니다. 오페라 개혁을 이끌던 글루크는 젊은 살리에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후원했으며, 자신의 오페라 작업을 이어받게 하고 무대에 올릴 길을 직접 열어 주었습니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 사이를 매끄럽게 잇고 극적 흐름을 음악으로 뒷받침하는 글루크의 개혁 오페라 어법은 이후 살리에리 자신의 작품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깁니다.

궁정악장이 되다

1774년 가스만이 세상을 떠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는 스물세 살의 살리에리를 궁정 작곡가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자리가 곧장 탄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1777년 이탈리아 오페라단이 재정으로 무너지자 황제는 이탈리아 오페라 공연을 접고 독일어 징슈필을 앞세운 국민극장을 열었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단이 되살아난 것은 1783년이고, 그때 단원 일부를 이탈리아 순회 중에 고르고 살핀 사람이 살리에리였습니다. 1788년에는 궁정악장(Hofkapellmeister) 자리에 올라 1824년 은퇴할 때까지 36년 동안 이 지위를 지켰고, 이탈리아 오페라 감독직은 1792년에 내려놓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무명 고아 출신이 합스부르크 궁정 음악의 최고 자리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22년이었습니다.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1771년작 〈아르미다〉는 살리에리를 빈의 유망주로 만든 첫 큰 성공작이었습니다. 이 곡은 독일어권 곳곳에서 번역·상연되며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렸습니다. 〈아르미다〉는 이미 글루크 개혁 오페라의 자취가 뚜렷한 진지한 작품입니다. 같은 시기 그는 이탈리아어 오페라 부파, 즉 경쾌하고 풍자적인 희극 오페라로도 명성을 쌓았습니다. 처음부터 두 갈래를 함께 걸은 것입니다.

1780년대 들어 살리에리는 파리로 무대를 넓히며 스승 글루크의 개혁 오페라 노선을 자기 방식으로 발전시킵니다. 글루크의 파리 무대를 이어받아 완성한 〈다나오스의 딸들〉(1784)이 파리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1787년에는 극작가 보마르셰가 대본을 쓴 〈타라르〉를 선보였습니다. 보마르셰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원작 희곡을 쓴 바로 그 극작가입니다. 〈타라르〉는 이듬해 악수르, 오르무스의 왕이라는 제목의 이탈리아어판으로 다시 무대에 올랐고, 시와 음악을 하나로 녹여 낸 이 작품의 시도는 후대에 리하르트 바그너가 추구한 이상을 한 세기 앞서 예고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탈리아 부파의 경쾌함에서 출발해 글루크·보마르셰와 함께 무게 있는 개혁 오페라로, 다시 말년의 희극 팔스타프(1799)로 돌아오기까지,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한 가지 어법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실제로 어떤 사이였나

두 사람은 같은 빈 궁정에서 활동한 경쟁자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1786년 2월 7일, 요제프 2세는 쇤브룬 궁전 오랑주리에서 두 사람을 한자리에 세웠습니다. 한쪽 끝에서는 독일어 작품을, 반대쪽 끝에서는 이탈리아어 작품을 올리게 하고 손님들이 자리를 옮겨 가며 두 편을 잇달아 보게 한 자리였습니다. 모차르트가 〈극장 지배인〉을, 살리에리가 카스티와 함께 쓴 〈음악이 먼저, 가사는 그다음〉을 내놓았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저녁에 나란히 겨룬 기록은 이것이 유일합니다. 경쟁은 이렇게 실재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빈의 관객은 살리에리 쪽을 골랐습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 초연 뒤 아홉 번 공연되고 무대에서 내려갔지만, 이듬해 올린 살리에리의 〈아크수르〉는 몇 해에 걸쳐 되풀이해 올랐습니다. 무대를 빼앗겼다기보다 그때의 취향이 그쪽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일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2015년 독일 음악학자 티모 요코 헤르만이 다시 찾아내 이듬해 공개한 악보가 그 하나입니다. 앞에서 든 2021년 음반을 지휘한 그 사람입니다. 1785년, 성악가 낸시 스토라체가 잃었던 목소리를 되찾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그리고 코르네티라는 작곡가가 함께 칸타타 〈오펠리아의 회복된 건강을 위하여〉를 작곡한 것입니다. 대본은 모차르트의 오랜 협력자였던 로렌초 다 폰테가 썼습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재단의 울리히 라이징거는 이 발견을 두고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독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서 일한 경쟁자였을 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실제로 살리에리는 1791년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공연을 직접 보러 가 호평했다는 기록이 모차르트 자신의 편지에 남아 있고, 훗날 모차르트의 막내아들 프란츠 크사버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 기록들은 살리에리를 살인자로 그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두 사람 사이에 경쟁에서 오는 갈등이나 감정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기록들이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닙니다.

살리에리 독살설은 어떻게 퍼졌는가

1791년 12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독살을 말하는 소문은 돌았습니다. 다만 그 초기 소문은 살리에리를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살리에리와 연결 짓는 당대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권위 있는 전기와 사료에도 사망 직후 살리에리를 지목한 기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후 일곱 해 만인 1798년, 프란츠 니멘체크가 낸 첫 모차르트 전기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 전기는 모차르트 자신이 독에 당했다고 의심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하면서도, 누가 그랬다는 말은 적지 않았습니다. 살리에리의 이름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화살이 살리에리 쪽으로 돌아서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1803년에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가 살리에리를 찾아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후 그와의 접촉을 끊었고, 1822년 여름 빈에 들른 로시니는 살리에리에게 농담 삼아 그 소문을 물었습니다. 살리에리는 부인했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1823년에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1823년은 그때까지 떠돌던 소문이 터진 해입니다.

터진 자리는 1823년 가을, 살리에리가 겪은 정신적·신체적 쇠약이었습니다. 빈 종합병원에 입원한 그가 착란 상태에서 스스로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갔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문까지 함께 번졌습니다.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그렇게 들었다는 전언뿐입니다. 그러나 그를 그해 겨울부터 계속 진료한 의사들과 곁을 지킨 간병인들은 그런 자백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한목소리로 증언했습니다. 정신이 맑아졌을 때 살리에리 본인도 부인했습니다. 병상을 찾아온 제자 이그나츠 모셸레스가 그 말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내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이 터무니없는 소문에는 아무 근거가 없다고 양심을 걸고 말할 수 있다.」 하이든의 전기 작가 주세페 카르파니는 1824년, 빈의 보건 관리 에두아르트 굴데너 폰 로베스의 소견까지 확보해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굴데너는 모차르트의 담당 의사들과 접촉했던 사람으로, 그해 가을 빈에 널리 퍼져 있던 열병으로 모차르트가 죽었다고 보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시신은 부검을 받지 않았으니, 이 소견은 시신을 살펴본 결과가 아니라 병의 경과에 대한 판단입니다. 모차르트의 정확한 사인을 둘러싼 논의는 지금도 이어지지만, 독살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치된 결론입니다.

그러나 낭설은 사실보다 더 멀리, 더 오래 퍼져 나갔습니다. 1830년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이 소문을 바탕으로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볼디노에서 써서 1831년에 처음 출판했고, 1897년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희곡 거의 그대로를 대본 삼아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써서 이듬해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 1979년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로, 1984년에는 밀로시 포르만 감독의 동명 영화로 이어져 전 세계에 살리에리를 질투에 눈먼 살인자로 각인시켰습니다. 셰퍼는 이 희곡을 쓸 당시 푸시킨의 원작을 몰랐다고 밝혔지만, 결과적으로 150년 전 시인의 상상이 스크린을 통해 하나의 역사적 사실처럼 굳어진 셈입니다.

이백 년 가까이 이어진 이 오명에 뒤늦게 매듭을 지으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1997년 5월 17일, 밀라노 법원청사 대강당에서 205년 전 사건을 다시 놓고 살펴보는 역사적 재연 심리가 열렸습니다. 현직 판사·검사·변호사가 당사자주의 절차를 따라 실제로 참여했지만, 이것은 실제 형사재판이 아니라 재연이었고 새로운 법의학 감정이 이뤄진 것도 아닙니다. 이 자리가 내놓은 결론은 「사건에서 나온 요소들은 독살이 존재했다고 판단하기에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살리에리,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가르친 교육자

살리에리는 작곡가로서보다 교육자로서 더 폭넓은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베토벤은 성악 작법과 이탈리아식 오페라 어법을 배우기 위해 그에게 사사했고, 이 인연으로 1797년에서 1798년 사이에 쓰고 1799년에 펴낸 바이올린 소나타 3곡(작품 12)을 살리에리에게 헌정했습니다. 그에게 배우던 시기와 겹칩니다. 프란츠 슈베르트와 프란츠 리스트도 그의 제자였습니다. 카를 체르니와 이그나츠 모셸레스도 그에게 배웠습니다. 다만 각자가 무엇을 얼마 동안 배웠는지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살리에리는 이들 대부분을 무료로 가르쳤는데, 자신이 젊은 시절 스승들에게서 받았던 것과 같은 호의를 돌려준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살리에리는 1804년 이후 무대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궁정악장의 직무에 따라 미사와 오라토리오 같은 교회음악을 많이 썼습니다. 관현악 미사만 네 곡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1824년 궁정악장 자리에서 은퇴했습니다. 같은 해 5월 7일, 그의 제자였던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빈에서 초연했습니다. 살리에리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인 1825년 5월 7일, 일흔네 살 때였습니다.

장례에서 연주된 곡은 그가 스스로 준비해 둔 것이었습니다. 1804년에 쓴 〈다단조 레퀴엠〉으로, 자기 장례에서 연주해 달라는 뜻을 붙여 남겨 둔 곡입니다. 1825년 6월 22일 빈 미노리텐 성당의 장례미사에서 그 곡이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울렸고, 지휘한 사람은 그의 뒤를 이어 궁정악장이 된 요제프 아이블러였습니다. 21년 동안 서랍에 있던 곡이 예정된 자리에서 제 몫을 한 셈입니다.

주요 작품

이탈리아어 오페라

  • 〈아르미다〉(1771)은 살리에리를 빈의 신예로 세운 첫 성공작입니다.
  • 악수르, 오르무스의 왕(Axur, re d’Ormus)(1788)은 프랑스어 작품 〈타라르〉를 이탈리아어로 다시 써 빈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에서 올린 판입니다.
  • 팔스타프, 또는 세 가지 장난(Falstaff ossia Le tre burle)(1799)는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바탕으로 1799년 1월 3일 초연된 말년의 희극 오페라입니다.

프랑스어 오페라

  • 〈다나오스의 딸들〉(1784)는 파리 왕립음악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musique)에서 크게 성공한 비극적 서정극입니다.
  • 〈타라르〉(1787)은 파리에서 초연되어, 극작가 보마르셰와 함께 만든 시와 음악의 결합을 시도한 작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살리에리는 정말 모차르트를 독살했나요?

아닙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차르트의 시신은 부검을 받지 않았지만, 당시 담당 의사들과 접촉했던 빈의 보건 관리는 1824년에 그가 병으로 죽었다고 판단하며 독살설을 부정했습니다. 살리에리를 곁에서 돌본 간병인과 의사들도 그가 살인을 자백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살리에리 본인도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는 이 소문이 터무니없다고 여러 차례 부인했습니다. 오늘날 음악학계는 이 이야기를 근거 없는 낭설로 봅니다.

Q. 영화 아마데우스는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가요?

극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영화의 직접 바탕은 1979년 피터 셰퍼가 쓴 희곡 아마데우스입니다. 같은 소문을 다룬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1830년 희곡이 앞서 있지만, 셰퍼는 그 작품을 몰랐다고 밝혔습니다. 두 희곡은 같은 소문에서 나왔을 뿐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각색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 널리 알려진 설정 하나가 그 예입니다. 익명의 인물이 레퀴엠을 위촉하고 그것이 살리에리였다는 장면인데, 실제 위촉자는 발제크 백작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추모하려고 익명을 조건으로 곡을 청한 사람입니다. 실제 두 사람은 1785년 함께 칸타타를 작곡할 만큼 협력한 동료 작곡가였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해 파멸시켰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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