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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슈베르트의 생애와 작품(음악)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31년의 짧은 생애 동안 600여 곡의 예술가곡과 교향곡·실내악으로 낭만주의 음악의 문을 연 오스트리아 작곡가
- 생몰: 1797년 1월 31일 빈 힘멜포르트그룬트 ~ 1828년 11월 19일 빈
- 국적·활동지: 오스트리아(빈) — 31년 생애의 거의 전부를 빈에서 보냄
- 작품 식별: 도이치 번호(Deutsch-Verzeichnis, D.) / 정본 악보: 신 슈베르트 전집(Neue Schubert-Ausgabe, NSE)
- 대표작 3개: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피아노 5중주 '송어'〉, 〈교향곡 8번 '미완성'〉

슈베르트 시작하기
- 처음 접한다면: 〈송어 5중주〉 D 667 4악장 변주곡 — 약 7분 분량, 슈베르트 음악의 가장 친근한 얼굴
- 그다음 한 곡: 즉흥곡 Op. 90 No. 3 G♭장조 D 899 — 약 5분, 슈베르트 피아노의 서정


1875년 빌헬름 아우구스트 리더가 1825년 수채화를 바탕으로 그린 프란츠 슈베르트의 초상화
프란츠 슈베르트 초상 (Wilhelm A. Rieder, 1825년 수채화 / 1875년 유화 사본)

슈베르트는 누구인가 — 가곡의 왕과 짧은 31년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31년의 짧은 생애 동안 600곡이 넘는 예술가곡(Lied — 시에 곡을 붙인 독일어권 가곡)과 일곱 곡의 완성된 교향곡, 실내악·피아노곡·종교음악을 남긴 오스트리아 작곡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1951년 음악학자 오토 에리히 도이치(Otto Erich Deutsch)가 정리한 도이치 번호(D.)로 식별됩니다.

가장 큰 업적은 시와 음악을 한 호흡으로 묶어내는 예술가곡의 형식을 사실상 완성한 일입니다. 그래서 19세기 비평계는 그를 '가곡의 왕(König des Liedes)'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 별칭은 오늘날에도 그를 한 줄로 정의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흔히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살아있을 때는 빈의 가까운 친구·후원자 모임 안에서만 알려진 작곡가였고, 그의 음악사적 위상은 사후 수십 년이 지나 로베르트 슈만이 〈교향곡 9번 ‘그레이트’〉의 원고를 발견하면서 비로소 본격화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아는 '거장 슈베르트'는 그의 생전 평판이 아니라 사후 재발견의 결과입니다.

힘멜포르트그룬트에서의 형성기와 살리에리 사사

슈베르트는 1797년 1월 31일 빈 교외의 작은 마을 힘멜포르트그룬트(Himmelpfortgrund)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어 자료에 자주 등장하는 '리히텐탈(Lichtental) 출생'은 정확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그가 세례를 받은 교회와 가족이 살던 인접 구역의 이름입니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Franz Theodor Schubert)는 교구 초등학교의 교장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결혼 전 빈의 한 가정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14남매 중 12번째였지만 성인까지 자란 자녀는 다섯뿐이었습니다. 어린 슈베르트는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큰형 이그나츠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곧 두 사람의 가르침을 넘어섰습니다.

11세이던 1808년, 슈베르트는 황실 신학원(Stadtkonvikt — 빈의 황제·왕실 부설 기숙 학교)의 합창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이곳은 빈 소년 합창단의 전신이었고, 슈베르트는 궁정 예배당에서 노래하며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의 작품을 귀로 익혔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아 어린 시절부터 안경을 쓰고 악보를 들여다본 흔적은 후일 그의 초상화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만남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와의 사사였습니다. 당시 빈을 대표하던 작곡가였던 살리에리는 1810년부터 1816년까지 약 6년간 슈베르트의 작곡을 직접 가르쳤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가 만든 통속적 이미지와 달리, 살리에리는 빈에서 베토벤·체르니·리스트까지 가르친 19세기 초 최고 수준의 작곡 교사였고, 슈베르트의 정교한 화성 감각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습니다.

생애의 전환점 — 그레트헨·교사직 이탈·슈베르티아데

슈베르트의 인생은 평탄한 연대기가 아니라 17세에 찾아온 한 곡, 21세 무렵의 교사직 이탈, 그리고 친구 모임 안에서 일어난 음악 운동이라는 세 굴절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1814년 〈실 잣는 그레트헨〉 — 독일 예술가곡의 탄생점

1814년 10월, 17세의 슈베르트는 괴테의 『파우스트』 한 장면에 곡을 붙인 〈실 잣는 그레트헨(Gretchen am Spinnrade — 물레질하는 그레트헨)〉 D 118을 작곡했습니다. 이 한 곡으로 그는 독일 예술가곡의 새 단계를 열었습니다.

이 곡에서 피아노 반주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물레의 회전을 직접 묘사하고, 동시에 그레트헨의 심리가 흔들리는 순간 회전을 멈췄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시의 한 장면을 음악만으로 무대 위에 올린 셈입니다. 이듬해 1815년 한 해에만 그는 약 145곡의 가곡을 쏟아냈고, 이 폭발적 다작은 오늘날까지도 음악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1818년 — 교사 조교에서 직업 작곡가로

13세 무렵 변성기와 함께 신학원을 떠난 슈베르트는 1814년부터 아버지의 초등학교에서 조교 교사로 일했습니다. 이 직책은 그의 적성과 맞지 않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의 징병제를 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1818년경 그는 결국 교사 일을 그만두고 직업 작곡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같은 해 여름에는 에스테르하지 백작 가문의 두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헝가리의 별장에서 머물렀고, 1824년에 다시 한 번 이 자리에 갔습니다. 두 차례의 헝가리 체류 동안 그는 조용한 환경에서 교향곡과 실내악의 구상을 다듬었습니다.

슈베르티아데 — 친구 모임이 만든 작곡가

슈베르트에게는 고정 수입도, 궁정 직책도 없었습니다. 그의 창작을 가능하게 한 것은 친구와 후원자들의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시인 프란츠 폰 쇼버(Franz von Schober),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 가수 요한 미하엘 포글(Johann Michael Vogl), 그리고 음악 평론가 요제프 폰 슈파운(Joseph von Spaun) 같은 친구들이 모인 비공식 음악회는 후일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 슈베르트의 밤이라는 뜻)라 불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의 새 가곡과 실내악이 처음 울려 퍼졌고, 그의 음악이 처음 청중을 만났습니다. 슈베르트가 살아있을 때 빈에서 유일하게 가졌던 본격 '청중'은 사실상 이 모임 안의 30~50명이었습니다.

베토벤의 그림자와 1828년의 마지막 해

슈베르트의 마지막 2년은 그의 평생 우상이었던 베토벤을 빼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두 사건의 정확한 날짜를 짚어야 그의 마지막 해의 결을 알 수 있습니다.

1827년 3월 29일 — 베토벤 장례식 횃불 운구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빈에서 사망했고, 그의 장례식은 사흘 뒤인 3월 29일에 거행되었습니다. 슈베르트가 베토벤 장례식에서 운구한 8명 중 한 명이었다는 한국어 자료가 많지만, 이는 통설의 오류입니다.

실제로 베토벤의 관 운구자(Sargträger)는 8명의 카펠마이스터(궁정·교회 음악감독)로 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슈베르트가 맡은 자리는 행렬을 따라 횃불을 든 36명의 횃불 운구자(Fackelträger) 중 한 명이었고, 같은 횃불 운구자에는 카를 체르니, 시인 프란츠 그릴파르처, 작곡가 요한 네포무크 훔멜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약 1만에서 3만 명의 빈 시민이 거리를 메웠던 이 장례 행렬에서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관 뒤가 아니라 그 옆자리에서 횃불을 들고 걸었습니다.

이 자리는 슈베르트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임종 직전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 c♯단조〉를 듣고 싶다고 청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베링거(Währing) 공동묘지의 베토벤 묘 옆에 묻혔습니다.

1827년 〈겨울 나그네〉와 친구들의 당혹

1827년 2월 슈베르트는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의 시 12편에 곡을 붙여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 D 911의 전반부를 완성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그는 시집의 나머지 12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후반부 12곡을 마저 작곡했습니다.

친구 슈파운의 기록에 따르면, 슈베르트는 친구들 앞에서 전반 12곡을 처음 노래로 들려준 날 모두를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친구들은 어두운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쇼버는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곡으로 '보리수(Der Lindenbaum)' 하나만 꼽았습니다. 그러자 슈베르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겐 이 곡들이 모든 작품 중 가장 사랑스럽다네. 자네들도 곧 좋아하게 될 걸세."

1828년 3월 26일 — 그의 첫 단독 콘서트, 베토벤 1주기

1828년 3월 26일, 슈베르트는 그의 평생에서 단 한 번 본인 작품만으로 구성된 공개 연주회를 빈에서 열었습니다. 이 날짜는 우연이 아닙니다. 정확히 1년 전, 베토벤이 사망한 날입니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음악 정체성을 베토벤 1주기에 맞춰 빈 시민 앞에 처음으로 공식 선언한 셈입니다.

이 콘서트는 비평계의 호평을 받았고 슈베르트에게는 보기 드문 흥행 성공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같은 봄 니콜로 파가니니가 빈에 처음 등장해 전 도시의 관심을 휩쓸어 가면서, 슈베르트의 콘서트는 곧 신문 지면에서 밀려났습니다. 자기 시대의 인정을 얻을 결정적 기회가 한 번 왔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11월 19일 — 31세의 죽음

1820년대 초부터 슈베르트의 건강은 좋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다수의 연구자들은 그가 1822년경 매독에 감염되었고, 당시 표준 치료제로 쓰인 수은의 부작용까지 함께 겪었다고 봅니다. 두통과 우울감,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탈모가 그의 마지막 6년을 따라다녔습니다.

1828년 가을 그는 형 페르디난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11월 19일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식 사인은 장티푸스로 기록되었으나, 매독 합병증과 수은 중독의 누적 영향을 함께 거론하는 견해가 학계의 다수입니다. 그의 마지막 사흘 동안 친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카를 홀츠가 사중주단을 이끌고 와서 그의 청에 따라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을 연주해 주었습니다.

1888년, 그의 유해는 베토벤의 유해와 함께 빈 중앙묘지(Zentralfriedhof)의 32A 구역 '작곡가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묘역에는 베토벤·슈베르트와 함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브람스의 묘가 모여 있습니다.

슈베르트 양식의 진화 — 초기·중기·후기

슈베르트의 양식은 31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세 번 결정적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시간 순서가 아니라 베토벤·하이든의 그늘에서 출발해 자기 어법을 확립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죽음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초기 — 빈 고전파의 후예 (1810~1817)

살리에리 사사기와 신학원 합창단 시절을 거친 초기의 슈베르트는 분명한 빈 고전파의 후예였습니다. 1815년 한 해에만 145곡의 가곡과 두 곡의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양식적으로는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그림자가 여전히 진했습니다. 다만 같은 시기에 작곡한 〈실 잣는 그레트헨〉(1814)과 〈마왕〉(1815)에서 이미 그만의 어법이 폭발적으로 등장합니다.

중기 — 자기 어법의 확립 (1818~1822)

교사직을 떠난 후의 시기 슈베르트는 자기 양식을 완성했습니다. 1819년 작곡된 〈피아노 5중주 ‘송어’〉 D 667에서 그는 가곡 〈송어(Die Forelle)〉의 선율을 4악장 변주의 주제로 다시 사용하는데, 가곡과 실내악을 한 작품 안에서 잇는 이 발상이 그의 중기 어법의 핵심입니다.

1822년 작곡을 시작했다가 두 악장만 남기고 멈춘 〈교향곡 8번 b단조 ‘미완성’〉 D 759는 이 시기의 정점입니다. 왜 이 곡이 미완성으로 끝났는지는 지금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822년이 그가 매독 진단을 받은 해와 겹친다는 점, 두 악장만으로도 작곡가가 표현할 것을 다 표현했다는 견해, 단순히 다음 작업에 밀려 잊었다는 견해까지 학계의 가설이 공존합니다. 슈베르트 본인이 남긴 직접 설명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후기 — 죽음을 응시하는 음악 (1823~1828)

매독 진단 이후 슈베르트의 후기 양식은 깊이와 어둠이 동시에 짙어집니다.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D 795(1823), 현악 4중주 14번 d단조 〈죽음과 소녀〉 D 810(1824), 〈겨울 나그네〉 D 911(1827), 〈교향곡 9번 ‘그레이트’〉 D 944(1825~1828)가 모두 이 후기에 속합니다.

이 시기 그의 음악은 자기 어법의 두 가지 결정적 도구를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 예기치 못한 조성 도약: 부드럽게 조성을 이어가는 대신 갑작스레 먼 조성으로 떨어지는 화성 어법. 〈교향곡 9번 ‘그레이트’〉 1악장의 C장조에서 e단조로 떨어지는 부분이 대표 사례입니다.
  • ‘하늘처럼 긴 길이(himmlische Länge)’: 슈만이 〈그레이트 교향곡〉을 듣고 붙인 표현으로, 동기 발전에 의존하지 않고 한 순간을 길게 머무는 방식으로 시간을 만드는 슈베르트 특유의 시간 감각.
비교 항목 슈베르트 vs 베토벤
생애 길이 슈베르트: 31년(1797~1828) / 베토벤: 56년(1770~1827)
작곡 방식 슈베르트: 선율이 흐르듯 즉흥적으로 나오는 듯한 ‘몽유병자 작곡가’ / 베토벤: 스케치북에 수십 번 고쳐 가며 구조를 짓는 ‘건축가 작곡가’
주력 장르 슈베르트: 가곡 600여 곡 + 교향곡·실내악 / 베토벤: 교향곡·현악사중주·피아노 소나타 중심, 가곡은 부수적
생전 평판 슈베르트: 빈 친구 모임 안에서만 알려진 작곡가 / 베토벤: 빈 시민 1만~3만 명이 장례식에 모인 시대의 영웅

당대 평가와 사후 발견의 서사

슈베르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생전과 사후 사이에서 가장 극단적인 분열을 보여 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생전 — 빈 친구 모임 안의 작곡가

살아있을 때 슈베르트의 명성은 거의 전적으로 빈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1821년 〈마왕〉 출판으로 빈에서 짧게 화제가 되었고, 그의 가곡은 슈베르티아데에서 사랑받았으나, 그가 작곡한 일곱 곡의 교향곡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의 생전에 공식 콘서트에서 전곡 연주된 적이 없습니다. 〈미완성 교향곡〉의 원고는 그가 친구이자 그라츠 음악협회의 안젤름 휘텐브렌너에게 맡긴 채 잊혔고, 1865년에야 발견되어 같은 해 빈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작곡 후 43년이 지나서야 빛을 본 것입니다.

사후 — 슈만이 발견한 〈그레이트〉, 그리고 19세기 후반의 재평가

슈베르트의 음악사적 자리는 1839년 빈을 방문한 로베르트 슈만이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교향곡 9번 ‘그레이트’〉의 원고를 발견하면서 결정되었습니다. 슈만은 즉시 이 악보를 라이프치히의 멘델스존에게 보냈고, 멘델스존은 1839년 3월 21일 게반트하우스에서 이 곡을 초연했습니다.

슈만이 1840년 발표한 비평문에서 이 곡의 길이를 두고 "하늘처럼 긴(himmlische Länge)"이라 표현한 것은 슈베르트 수용사의 출발점입니다. 슈만은 슈베르트의 음악을 단순히 가곡 작곡가가 아니라 베토벤 이후 교향곡 전통을 잇는 작곡가로 다시 자리매김했고, 이 평가는 후일 브람스·브루크너·말러에 이르는 19세기 후반 교향곡 작곡가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 — '몽유병자 작곡가'라는 후대 평가

20세기 이후 슈베르트에 대한 평가는 다시 한 번 미묘하게 갈렸습니다. 한쪽에서는 그를 '꿈에서 선율이 흘러나오듯 작곡한 몽유병자 같은 작곡가(somnambule Komponist)'라 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자유로운 외관 뒤에 매우 정교한 화성 설계와 형식 감각이 자리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두 평가는 충돌하지 않고 슈베르트의 양면을 함께 가리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빈 안의 작은 친구 모임에서 사랑받던 작곡가가, 사후 한 세대 동안의 발견과 재평가를 거쳐, 오늘은 베토벤과 나란히 빈 중앙묘지의 작곡가 묘역에 누워 있다는 것. 그의 음악사적 자리는 본인의 생전 노력만큼이나 후대의 청취와 재발견이 만든 자리입니다.

슈베르트의 주요 작품 목록

주요 작품과 한 줄 설명

가곡 — 600여 곡 중 핵심

  • 〈실 잣는 그레트헨〉 D 118 (1814) — 17세에 쓴 독일 예술가곡의 출발점
  • 마왕(Erlkönig)〉 D 328 (1815/1821 출판) — 그의 작품 번호 1번이자 빈에서 그를 알린 첫 명곡
  •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 D 531 (1817) — 후일 현악 4중주 14번의 모티프 원곡
  • 〈송어(Die Forelle)〉 D 550 (1817) — 후일 5중주 4악장의 주제 원곡
  •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Die schöne Müllerin)〉 D 795 (1823) — 20곡의 연가곡, 청년기 사랑과 상실의 여정
  • 겨울 나그네(Winterreise)〉 D 911 (1827) — 24곡의 연가곡, 19세기 가곡 장르의 정점
  • 〈백조의 노래(Schwanengesang)〉 D 957 (1828) — 사후 출판사가 14곡을 묶어 발표한 마지막 가곡집

교향곡과 관현악

  • 〈교향곡 8번 b단조 ‘미완성’〉 D 759 (1822) — 두 악장만 남은 미완의 걸작, 1865년에야 발견
  • 〈교향곡 9번 C장조 ‘그레이트’〉 D 944 (1825~1828) — 슈만이 1839년 발견·초연한 후기 대표작

실내악과 피아노

  • 피아노 5중주 A장조 ‘송어’〉 D 667 (1819) — 가곡 선율을 변주로 재구성한 실내악
  • 현악 4중주 14번 d단조 ‘죽음과 소녀’〉 D 810 (1824) — 동명 가곡 주제 변주의 2악장이 중심
  • 〈방랑자 환상곡〉 D 760 (1822) — 한 주제로 네 악장을 잇는 순환형식의 선구작
  • 〈즉흥곡(Impromptus)〉 D 899·D 935 (1827) — 짧은 피아노 소품 형식의 모델
  • 〈순간의 음악(Moments musicaux)〉 D 780 (1823~1828) — 6곡의 짧은 피아노 소품
  • 〈피아노 소나타 D 960〉 B♭장조 (1828) — 사망 두 달 전 완성한 마지막 소나타

오늘의 진입점 — 처음 듣는 분을 위한 가이드

슈베르트 입문에서 가장 친절한 첫 곡은 〈피아노 5중주 ‘송어’〉의 4악장입니다. 약 7분 분량의 변주곡으로, 슈베르트의 가곡 〈송어〉 선율을 다섯 악기가 차례로 받아 노래합니다. 알프레트 브렌델·클리블랜드 4중주단의 1977년 필립스 음반, 또는 클리포드 커즌·빈 옥테트의 1957년 데카 음반이 고전적 기준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즉흥곡 Op. 90 No. 3 G♭장조 D 899 — 약 5분 분량의 피아노 독주곡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노래처럼 흐르는 선율 위에 부드러운 화성이 깔리는 이 곡은 슈베르트 피아노 어법의 가장 친근한 얼굴입니다. 머레이 페라이어, 알프레트 브렌델,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녹음이 모두 권할 만합니다.

가곡으로 들어가시려면 〈마왕〉 D 328이 가장 강렬한 첫걸음입니다. 약 4분 분량 안에 한 명의 성악가가 화자·아버지·아이·마왕 네 인물을 모두 부르고, 피아노는 폭풍 속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끝까지 깔아 줍니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제럴드 무어의 EMI 녹음, 또는 한스 호터와 미하엘 라우흐아이젠의 역사적 녹음이 권할 만합니다.

여기까지가 친숙해지셨다면 본격 후기작 〈겨울 나그네〉 D 911로 들어가도 좋습니다. 24곡 전체를 한 호흡으로 들으려면 약 70분이 필요하지만, 피셔-디스카우-외르크 데무스 또는 이안 보스트리지-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같은 후대 명연이 도와줄 것입니다. 슈베르트의 죽음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음악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슈베르트는 왜 '가곡의 왕'이라 불리나요?

슈베르트는 생애 동안 600곡이 넘는 예술가곡(Lied)을 작곡하며 시와 음악의 결합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곡에서 피아노 반주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의 풍경과 감정을 함께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며, 이 방식이 19세기 독일 예술가곡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Q. 슈베르트는 살아있을 때 유명했나요?

슈베르트는 빈의 친구·후원자 모임 안에서는 알려졌지만 빈 바깥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미완성 교향곡과 〈그레이트 교향곡〉은 사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았고, 그의 음악사적 위상은 1839년 로베르트 슈만이 그의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그레이트〉 원고를 발견하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매겨졌습니다.

Q. 슈베르트의 사망 원인은 정확히 무엇인가요?

슈베르트의 공식 사망 진단은 장티푸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1822년경부터 그가 앓아 온 매독, 그리고 당시 매독 치료에 쓰인 수은의 부작용이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 오늘날 다수 학자의 견해입니다. 확정 진단은 사료가 부족해 여전히 어렵습니다.

Q. 〈미완성 교향곡〉은 왜 미완성으로 끝났나요?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822년 작곡 시작과 매독 발병 시기가 겹친다는 점, 두 악장만으로도 작곡가가 표현할 것을 다 표현했다는 점, 단순히 다른 작업에 밀려 미루다 잊었다는 점 등 여러 가설이 학계에 공존합니다. 슈베르트 본인이 남긴 직접 설명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Q. 슈베르트 입문자에게 어떤 곡을 추천하나요?

처음 듣는 분께는 〈피아노 5중주 '송어' D 667〉의 4악장 변주곡을 먼저 권합니다. 약 7분 분량이고 슈베르트 음악의 친근한 서정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다음으로 즉흥곡 Op. 90 No. 3, 그리고 가곡 〈마왕〉을 차례로 들으시면 슈베르트의 작은 형식·서정·극적 표현을 단계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 — 짧은 생애가 만든 긴 그림자

프란츠 슈베르트는 31년의 짧은 생애 동안 빈의 친구 모임 안에서 거의 유일한 청중을 만나며 600여 곡의 가곡과 일곱 곡의 교향곡, 그리고 후대 모든 실내악 작곡가가 참고해야 할 표본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음악사적 자리는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 슈만·멘델스존·브람스·말러로 이어진 한 세기의 청취와 재발견이 만들어낸 자리입니다.

한 비평가가 그의 음악을 두고 '깊은 웅덩이 위를 조용히 건너가는 노래'라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담담하고 친근한 선율이 흐르지만, 그 아래에는 매독과 죽음의 그림자,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우상에 대한 경의, 그리고 인정받지 못한 30년의 침묵이 함께 흐릅니다. 슈베르트를 듣는 일은 이 양면을 한꺼번에 듣는 일입니다.

오늘 한 번 시도해 보실 만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송어 5중주〉 4악장을 7분 동안 끝까지 들어 보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슈베르트의 친근한 얼굴 전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둘째, 시간이 허락한다면 〈겨울 나그네〉의 첫 곡 '잘 자라(Gute Nacht)'를 한 번 들어 보십시오. 1827년 친구들 앞에서 슈베르트가 처음 들려주었을 때 모두를 당혹게 했던 그 어두운 시작이, 1년 뒤 그의 죽음을 어떻게 미리 그리고 있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