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가 버린 시가 꽁초를 한 귀부인이 주워 다이아몬드 장식함에 넣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사실 여부를 세세히 확인하기 어려운 후대의 기록이지만, 1840년대 유럽이 리스트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잘 보여줍니다.
리스트는 단순한 피아니스트가 아니었습니다. 외모와 몸짓, 무대 배치, 프로그램까지 하나의 공연으로 설계한 스타였습니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1844년 파리 연주 시즌을 총평하는 기사에서 이 집단적 열광에 '리스트마니아(Lisztomania, 리스트를 향한 광적인 열풍)'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만 이 표현이 당대에 곧바로 유행어가 된 것은 아니었고, 후대에 반복 인용되며 지금과 같은 상징적 표현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리스트는 인기가 절정이던 1847년 순회공연을 멈췄습니다. 돈이 떨어진 것도, 연주 실력이 쇠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충분히 벌었기 때문에 돈보다 더 비싼 것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작곡할 시간이었습니다.
- 인물: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 주요 활동: 피아니스트·작곡가·지휘자·교육자
- 순회공연기: 1839~1847년 유럽 전역에서 활동한 스타 피아니스트(전주가 된 1838년 페스트 자선공연 포함)
- 전환점: 1847년 순회공연 중단, 1848년 바이마르에 본격적으로 정착
- 주요 작품: 《초절기교 연습곡》, 피아노 소나타 나단조, 《파우스트 교향곡》, 교향시 《전주곡》
- 경제 렌즈: 높은 공연 수입을 포기하고 작곡 시간과 오케스트라를 선택한 음악가
리스트마니아, 이름 자체가 공연 상품이 되다
프란츠 리스트는 1839년부터 1847년까지 거의 끊임없이 유럽 순회공연을 이어 갔습니다. 그 전해인 1838년, 페스트(현재의 부다페스트 일부)에 대홍수가 발생하자 리스트는 빈에서 이재민을 돕기 위한 연속 자선공연을 열었는데, 이 일이 사실상 본격적인 순회공연기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정확한 공연 횟수는 집계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 연구는 1839~1847년 사이 150여 개 도시에서 1천 회 이상의 공연을 한 것으로 추산합니다.
그의 이동 범위는 글래스고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이어졌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다른 도시로 이동했고, 다시 리허설과 접견, 연회와 공연이 반복되었습니다.
리스트가 바꾼 것은 연주법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음악회는 성악가와 여러 기악 연주자가 번갈아 등장하는 혼합 프로그램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리스트는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공연 전체를 이끄는 현대적 독주회 형식을 정착시켰습니다.
여러 연주자가 나눠 갖던 무대의 시간과 관심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청중은 곡뿐 아니라 '리스트'라는 이름을 보기 위해 입장권을 샀습니다.
연주자 개인의 이름이 곧 공연 상품이 된 것입니다.
이 시기에 리스트가 자주 연주한 작품은 오페라 환상곡과 패러프레이즈였습니다. 관객이 이미 아는 오페라 선율 위에 빠른 옥타브와 넓은 도약, 폭발적인 종결부를 더했습니다.
익숙한 선율은 관객을 쉽게 끌어들였고, 다른 피아니스트가 따라 하기 어려운 기교는 리스트를 대체 불가능한 연주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페라 편곡을 돈벌이용 음악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음반과 방송이 없던 시대에 피아노 편곡은 다른 도시의 오페라와 관현악곡을 전달하는 중요한 음악 매체이기도 했습니다.
리스트는 흥행에 성공하면서 동시에 피아노가 전달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넓혔습니다.
|
| 피아노 앞에서 연주하는 리스트와 열광하는 청중 |
초절기교 연습곡, 세 판본으로 읽는 지갑과 음악
《초절기교 연습곡》은 소년기의 연습곡에서 극단적인 비르투오소 작품을 거쳐 시적인 최종판으로 변화했습니다. 세 판본은 리스트의 음악과 활동 방식이 함께 달라진 기록입니다.
핵심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가 아닙니다.
기초 연습곡에서 극단적인 기교로, 다시 기교의 정제와 시적 표현으로 이동했습니다.
| 판본과 시기 | 음악적 성격 | 활동 맥락 |
|---|---|---|
| 소년기 연습곡 1826년 작곡, 출판 시점은 자료마다 엇갈림 |
체르니의 연습곡 전통이 남은 청소년기 작품 | 신동 연주자이자 피아노 교사로 생계를 모색하던 시기 |
| 《12개의 대연습곡》 1837년경 개작·1840년 출판 |
두꺼운 음향과 극단적인 난도가 강조된 비르투오소 작품 |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도약하던 시기 |
| 《초절기교 연습곡》 최종판 1851년 완성·1852년 출판(체르니에게 헌정) |
중복을 덜고 선율·음색·표제를 강화한 시적 작품 | 바이마르에서 작곡가적 완성도를 추구하던 시기 |
가장 처음 쓴 1826년 판본은 정확히 언제 세상에 나왔는지를 두고 출처마다 말이 다릅니다. 다만 이후 널리 퍼져 리스트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것은 확실히 1837년경 개작한 《12개의 대연습곡》부터로, 음표가 가장 빽빽한 판본입니다. 손의 한계를 시험하는 넓은 도약과 옥타브, 두꺼운 화음이 이어집니다.
이 난도는 리스트의 독점적인 무기였습니다. 다른 피아니스트가 쉽게 연주할 수 없는 작품은 리스트만의 공연 가치를 높였습니다.
초절기교는 예술적 표현인 동시에 경쟁자가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차별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이마르에 정착한 리스트는 이 곡을 다시 고치면서 음표를 더하지 않고 덜어냈습니다. 중복된 성부와 지나치게 두꺼운 서법을 정리해 선율과 음색이 더 잘 들리도록 했습니다.
〈마제파〉·〈풍경〉·〈환영〉 같은 표제도 작품의 시적 성격을 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손가락 훈련곡이 짧은 피아노 교향시처럼 바뀐 것입니다.
순회공연기의 기교가 "이 연주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증명했다면, 바이마르기의 기교는 "이 음향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리스트는 기교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기교가 해야 할 일을 바꾸었습니다.
많이 벌수록 작곡할 시간은 사라졌다
리스트의 순회공연기는 현금 수입이 가장 많았지만 장기간 집중해야 하는 작품을 완성하기에는 가장 불리한 시기였습니다.
그의 수입은 자신의 몸과 무대에 직접 묶여 있었습니다. 리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야 돈이 들어왔고, 공연을 쉬면 수입도 줄었습니다.
공연이 끝나도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도시로 이동하고, 리허설과 접견, 연회와 팬 응대가 이어졌습니다. 19세기의 마차 여행은 느리고 고단했습니다.
무대에서는 매번 성공해야 했습니다. 첫 청취에서 귀를 사로잡는 선율,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교, 박수를 끌어내는 종결부가 유리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피아노 한 대로 옮긴 《돈 조반니의 회상(Réminiscences de Don Juan, 돈 조반니의 추억)》 같은 작품이 강한 효과를 발휘한 이유입니다.
반면 《파우스트 교향곡》이나 교향시처럼 오랜 구상과 반복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작품은 이동하는 마차와 호텔방만으로 완성하기 어려웠습니다.
관현악곡은 악보에 음표를 적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실제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을 때 악기 사이의 균형이 맞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리스트는 현금은 풍부했지만 작곡가로서는 '시간 빈곤'에 빠져 있었습니다.
전성기에 이미 돈을 다시 음악에 쓴 사람
리스트는 순회공연 전성기부터 자신의 수입과 흥행력을 자선과 음악 기념사업에 사용했습니다.
1838년 페스트에 대홍수가 발생하자 리스트는 빈에서 여러 차례 연속 자선공연을 열어 거액을 기부했습니다. 이 일은 프랑스와 독일어권을 오가며 활동하던 그가 자신의 헝가리인 정체성을 새롭게 자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이 자선 공연의 성공은 이후 대규모 순회공연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Bonn)의 베토벤 기념비 건립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모금이 난항을 겪자 리스트는 상당한 개인 기부를 하고 기금 마련 연주회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참여로 필요한 자금이 마련되었고, 베토벤 기념비는 1845년 8월, 알려진 바로는 8월 12일 본에서 제막되었습니다.
리스트에게 연주력은 개인의 부를 늘리는 기술인 동시에 공공 문화사업의 자금을 모으는 수단이었습니다.
따라서 리스트가 바이마르에서 예술가로 변한 이유를 가난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이미 가장 많은 돈을 벌던 시기부터 돈을 음악적 영향력으로 바꾸고 있었습니다.
바이마르, 낮은 보수로 작곡할 시간을 사다
리스트는 1848년 바이마르에 본격적으로 정착해 '특별 궁정악장(Kapellmeister Extraordinaire)'이라는 직함으로 궁정 오케스트라의 지휘와 새로운 작품의 공연에 집중했습니다. 이 활동은 대공비 마리아 파블로브나의 후원 아래 1859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바이마르에서 받은 보수는 고정적인 고액 연봉이 아니었습니다. 연구된 궁정 기록에 따르면 리스트의 보수는 실제로 제공한 업무에 따라 한 해 약 330탈러에서 1,500탈러 사이를 오르내렸습니다.
이는 순회공연 전성기의 수입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었고, 다른 주요 궁정악장과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이마르 시절을 궁핍기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리스트는 이미 순회공연을 통해 명성과 재정적 기반을 확보했습니다.
또한 '특별 궁정악장'이라는 비교적 느슨한 지위는 바이마르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활동할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했습니다.
바이마르가 리스트에게 제공한 가장 중요한 보상은 현금이 아니었습니다.
시간과 오케스트라였습니다.
순회공연 시절 리스트의 생산 도구는 자신의 열 손가락이었습니다. 바이마르에서는 오케스트라 전체가 그의 연구실이 되었습니다.
리스트는 새로운 작품을 쓰고, 궁정 오케스트라로 시험하고, 초연한 뒤 다시 고칠 수 있었습니다. 바이마르에서 작곡·초연·개정된 작품이 이후 다른 도시로 퍼져 나갔습니다.
1850년 8월 28일에는 정치적 망명으로 독일에 들어올 수 없었던 바그너를 대신해 오페라 《로엔그린》의 세계 초연을 지휘했습니다. 이 날짜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괴테가 태어난 날을 골라 지휘봉을 든 것입니다.
바이마르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낙원은 아니었습니다. 제한된 예산과 극장 행정, 보수적인 세력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리스트는 순회공연에서는 얻기 어려웠던 것을 얻었습니다. 당장 성공하지 않더라도 다시 시험하고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돈 조반니의 회상》, 교향시 《전주곡》, 《회색 구름》을 차례로 들어 보세요. 첫 곡에서는 객석을 독점한 스타 피아니스트가, 두 번째 곡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연구실로 삼은 작곡가가, 마지막 곡에서는 즉각적인 박수에서 멀어진 노년의 실험가가 들립니다.
교향시, 한 번의 흥행보다 오래 남을 영향력
리스트는 바이마르에서 초기 12곡의 교향시를 완성·개정하며 이 장르를 음악사에 정착시켰습니다.
교향시(symphonic poem, 독일어 symphonische Dichtung, 문학·회화·신화·역사적 내용을 하나의 관현악 악장으로 풀어낸 표제음악)는 기존 교향곡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조직합니다.
리스트 이전에도 표제음악은 존재했습니다. 베토벤과 베를리오즈 역시 자연·문학·서사를 음악과 연결했습니다.
리스트의 공헌은 흩어져 있던 가능성을 하나의 장르와 작곡 원리로 밀어붙인 데 있습니다.
그는 처음 등장한 선율을 작품의 상황에 따라 리듬·조성·음색을 바꾸어 다시 제시했습니다. 이를 주제 변형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선율이 여러 모습으로 변하면서 작품 전체를 묶기 때문에, 고정된 형식보다 문학적 흐름을 유연하게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교향시는 리스트의 피아노 공연처럼 즉각적인 흥행을 보장하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보수적인 청중과 비평가의 반발도 컸습니다.
그러나 리스트가 시장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청중과 보상의 시간표가 바뀌었습니다.
순회공연에서는 입장권을 산 관객의 즉각적인 박수가 보상이었습니다. 바이마르에서는 동료 음악가와 비평가, 새로운 음악을 받아들일 청중, 그리고 후대에 남을 영향력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리스트는 더 많은 표를 파는 명성에서 새로운 음악을 제안하는 권위로 자신의 명성의 성격을 바꾸었습니다.
오페라 환상곡은 리스트가 직접 연주할 때 가장 강한 가치를 가졌습니다. 반면 교향시는 리스트가 무대에 없어도 다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에 묶여 있던 음악적 영향력을 악보와 장르로 옮긴 것입니다.
|
| 리스트가 바이마르 시기에 거주했던 알텐부르크 저택 |
공연 경제에서 증여 경제로
리스트의 경제 활동은 공연으로 돈을 버는 단계에서 창작 환경을 만들고 지식을 나누는 단계로 이동했습니다.
| 시기 | 경제·작업 구조 | 음악적 결과 |
|---|---|---|
| 순회공연기 | 높은 공연 수입, 잦은 이동, 즉각적인 관객 반응 | 오페라 환상곡, 패러프레이즈, 극적인 피아노 기교 |
| 바이마르기 | 낮고 유동적인 보수, 작곡 시간, 오케스트라와 극장 | 교향시, 교향곡, 소나타, 기존 작품의 대규모 개정 |
| 말년 | 축적된 명성과 여러 도시의 지원, 무상 교육 | 종교음악, 후기 실험작, 다음 세대의 연주자 양성 |
바이마르에서 리스트는 자신의 음악만 지휘하지 않았습니다. 바그너·베를리오즈·슈만 등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을 공연하며 새로운 음악이 들릴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정치적 망명 중이던 바그너에게 도덕적·경제적 지원을 제공했고, 《탄호이저》·《로엔그린》 등 그의 오페라가 공연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말년에는 교육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리스트는 로마·바이마르·부다페스트를 오가며 여러 학생이 함께 참여하는 공개 수업을 열었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연주법을 비밀에 부쳐 희소성을 유지하기보다 다음 세대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리스트의 경제 활동은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공연 경제에서 창작 경제로, 다시 증여 경제로 이동했습니다.
가장 화려했던 손이 가장 적은 음표로
프란츠 리스트는 1865년 7월 31일 로마에서 가톨릭교회의 네 가지 하급 성직인 소품을 받아 '아베 리스트(Abbé Liszt)'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리스트가 사제가 되어 로마에 은둔한 채 종교음악만 썼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이후에도 로마·바이마르·부다페스트를 오가며 가르치고 작곡했습니다.
종교적 합창곡과 오라토리오를 쓰는 동시에 세속 피아노곡과 대담한 실험 작품도 남겼습니다.
1881년 8월 24일에 작곡한 《회색 구름(Nuages gris, 잿빛 구름)》은 짧고 불안합니다. 선율은 길게 노래하지 않고, 화음은 익숙한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1885년의 《무조의 바가텔(Bagatelle sans tonalité, 조성 없는 소품)》은 제목부터 전통적인 조성 체계에서 멀어지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이 작품들을 곧바로 쇤베르크식 무조음악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칩니다. 리스트의 후기 작품 전체가 하나의 급진적 양식으로 통일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리스트가 말년에 즉각적인 환호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화성과 음향을 시험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미 생계와 스타성을 증명한 작곡가는 매 작품에서 자신의 기교를 다시 입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젊은 리스트의 음악은 관객이 즉시 반응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말년의 일부 작품은 후대가 언젠가 이해하기를 기다리는 음악에 가까웠습니다.
가장 화려한 피아니스트였던 사람이 가장 적은 음표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리스트마니아라는 말은 리스트 생전에도 널리 쓰였나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이네가 이 표현을 쓴 것은 1844년 4월 25일, 파리 특파원으로 있던 신문에 그해 파리 연주 시즌을 총평하며 쓴 기사에서 딱 한 번이었습니다. 리스트가 활동하던 당시에 이 단어가 일상적으로 통용됐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을 흔한 역사적 표현처럼 쓰는 것은, 후대의 학자와 저술가들이 하이네의 재치 있는 조어를 반복 인용하며 굳어진 결과에 가깝습니다.
Q. 1838년 페스트 홍수 자선공연은 정확히 몇 회, 얼마를 모았나요?
단발성 공연이 아니라 8~10회에 걸친 연속 자선공연이었고(정확한 횟수는 자료마다 약간 다릅니다), 총 2만 4천 포린트를 모아 기부했습니다. 이는 당시 개인이 헝가리에 전달한 기부금 중 최대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단순한 선행처럼 보이지만, 프랑스와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그가 고국을 향한 소속감을 다시 확인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Q. 초절기교 연습곡의 첫 번째 판본, 1826년판은 출판됐나요?
이 부분은 자료마다 엇갈립니다. 일부 자료는 1826년 마르세유·파리에서 Op.6으로 곧바로 출판됐다고 전하는 반면, 다른 자료는 이 초판이 리스트 생전에 정식 출판되지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여러 1차·권위 있는 전기를 교차확인했지만 이번 조사만으로는 어느 쪽이 맞는지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1837년경 개작한 두 번째 판본이 1840년 출판됐다는 사실입니다. 최종판(1852년 출판)은 어린 시절 리스트를 가르쳤던 스승 카를 체르니에게 헌정됐고, 그중 가장 유명한 〈마제파〉는 최종판보다 앞서 1846년 말 별도로 먼저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Q. 로엔그린 초연 날짜는 왜 하필 8월 28일로 잡혔나요?
괴테의 생일(1749년 8월 28일)에 맞춘 선택이었습니다. 바이마르는 괴테와 실러가 활동했던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상징적 도시였고, 리스트는 이 도시의 문화적 유산과 자신이 이끄는 새로운 음악을 의도적으로 연결 지으려 했습니다. 흥행보다 상징성을 앞세운 선택으로, 바이마르 시기 리스트가 무엇을 지향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Q. 바이마르의 리스트는 가난했나요?
가난한 궁정 음악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특별 궁정악장(Kapellmeister Extraordinaire)'이라는 다소 느슨한 직함으로 받은 보수는 순회공연 수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었지만, 리스트는 이미 명성과 재정적 기반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정확한 급여 산정 방식까지는 이번 조사로 확정하지 못했으나, 궁정 기록을 인용한 기존 연구들의 추정치와 상충하는 근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느슨한 직함 덕분에 바이마르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점이 리스트에게는 급여 액수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프란츠 리스트의 생애는 가난이 명작을 만든다는 단순한 공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순회공연기의 리스트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관객의 취향과 이동 일정에 묶여 있었습니다. 바이마르에서는 수입이 줄었지만 작곡 시간과 오케스트라를 얻었습니다.
경제적 조건은 작품의 가치를 직접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리스트가 선택할 수 있는 장르·청중·작품 규모·작업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리스트는 돈이 될 때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더 많은 돈이 아니라 작곡할 시간을 샀습니다.
그 시간이 피아노 스타를 교향시의 개척자로 바꾸었습니다.
오늘 리스트의 변화를 직접 듣고 싶다면 《돈 조반니의 회상》으로 순회공연기의 폭풍을, 《초절기교 연습곡》으로 기교의 변화를, 교향시 《전주곡》으로 바이마르의 새로운 음악을 이어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시대 음악가들의 경제적 선택은 '지갑 사정으로 읽는 클래식' 시리즈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