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발디의 생애와 작품, 붉은 사제, 협주곡의 표준을 만든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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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토니오 비발디를 〈사계〉의 작곡가로 기억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계〉만의 작곡가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토리노 국립대학도서관에는 비발디의 자필 악보가 27권으로 묶여 보존되어 있고, 그 안에는 협주곡 300곡 가까이와 오페라 악보들, 100곡이 넘는 성악·종교 작품이 들어 있습니다.

비발디가 실제로 한 일은 협주곡이라는 형식을 굳히고, 자기 음악을 암스테르담에서 인쇄해 유럽 전역으로 퍼뜨린 일이었습니다. 이 글은 베네치아 산 조반니 인 브라고라 교구의 세례 기록, 토리노 자필 악보, 비발디 본인의 1737년 편지, 그리고 1939년 시에나에서 다시 울린 그의 음악까지, 비발디의 생애와 작품을 정리합니다.

작곡가 한눈에 보기

  • 이름: Antonio Lucio Vivaldi
  • 출생·사망: 1678년 3월 4일 베네치아 ~ 1741년 7월 28일 빈
  • 별칭: 일 프레테 로소(Il Prete Rosso, 붉은 사제)
  • 시대·국적: 이탈리아 후기 바로크
  • 작품 식별: 료옴 페어차이히니스(RV)
  • 대표작: 〈조화의 영감〉 Op. 3, 〈사계〉(〈화성과 창의의 시도〉 Op. 8 중)
  • 자필 악보 소장: 토리노 국립대학도서관 폰도 포아-조르다노 (※ 전시·열람 일정은 변동 가능)
피에르 레오네 게치가 그린 비발디의 캐리커처
피에르 레오네 게치가 1723년 로마에서 펜으로 그린 붉은 사제 비발디의 캐리커처다.

1. 비발디 생애, 산파의 임시 세례에서 빈민 묘지까지

위태로운 탄생, 그리고 붉은 머리의 가문

비발디의 첫 호흡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1678년 3월 4일, 산파는 갓 태어난 그를 곧바로 집에서 임시 세례했습니다. 베네치아 산 조반니 인 브라고라 교구의 세례 기록에 그 사실이 그대로 적혀 있고, 정식 교회 세례는 약 두 달 뒤인 5월 6일에 거행됐습니다. 산파의 임시 세례는 사망 위험이 의심될 때만 허용되던 절차였습니다.

왜 그런 위급함이 있었는지는 학계도 단정하지 않습니다. 평생 비발디를 따라다닌 호흡기 질환의 첫 신호였다는 추정이 있지만,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는 본래 이발사였다가 직업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사람으로, 1685년부터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주자로 일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붉은 머리카락이었기에 아버지는 산 마르코의 기록에 로시(붉은이)라는 별칭으로 올라 있습니다. 훗날 안토니오가 받게 될 별명 일 프레테 로소(붉은 사제)는 그 가문 내력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사제 서품과 가슴의 조임

비발디는 열다섯 살이던 1693년 9월에 삭발례를 받고 성직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0년의 학업을 거쳐 1703년 3월 23일 사제 서품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베네치아의 자선 기관 피에타에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서품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 집전을 그만두었습니다. 본인이 평생 strettezza di petto(가슴의 조임)이라 부르던 증상 때문이었고, 1737년 편지에서는 25년째 미사를 드리지 않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학계에서는 천식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지만, 협심증이나 다른 호흡기 질환의 가능성도 함께 거론됩니다. 정확한 의학적 정체는 사료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사 집전 의무에서 사실상 자유로워진 이 사제는 그 시간을 모두 음악에 쏟아부었다는 점입니다.

페라라 사건과 안나 지로

비발디 말년의 가장 결정적 타격은 페라라에서 일어났습니다. 안나 지로는 만토바 출신의 메조소프라노로, 1724년 베네치아에서 데뷔했고 1726년 〈템페의 도릴라〉부터 비발디의 오페라에 섰습니다. 비발디의 제자이자 그가 가장 자주 기용한 가수였고, 그녀와 이복 언니 파올리나는 비발디의 건강을 돌보며 연주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지 않는 사제, 그리고 두 여성과의 동행. 이 조합은 18세기 교황령의 도덕적 감수성에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1737년 말, 페라라의 추기경 톰마소 루포는 비발디에게 페라라 입국 금지를 명했습니다. 비발디가 1738년에 새로 손질해 준비한 〈파르나체〉는 1739년 페라라 카니발 시즌에 공연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비발디 본인은 1737년 11월 16일 후원자 귀도 벤티볼리오 후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적었습니다. 추기경은 자신이 미사를 집전하지 않는 사제이며 가수 지로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입국을 막았으나, 지난 14년간 자신과 지로 자매는 유럽 여러 도시에서 함께 활동했고 어디서도 그들의 단정함은 의심받지 않았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이 편지는 비발디의 건강과 사생활에 관해 본인이 남긴 몇 안 되는 1차 사료입니다.

학계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미사를 집전하지 않은 이유는 본인의 호흡기 질환이었고, 지로와의 관계 성격은 1차 사료만으로는 직업적 동반자 관계 이상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후대 작가들이 그린 연인설은 추정의 영역에 있습니다. 한편 추기경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공연 무산은 비발디에게 막대한 경제적 타격이 되어 말년의 몰락을 재촉했습니다.

빈에서의 마지막

1740년, 비발디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후원을 기대하며 빈으로 떠났습니다. 왜 그해 베네치아를 떠났는지 비발디가 직접 남긴 말은 없습니다. 황제와는 1728년 9월 9일, 트리에스테로 향하던 카를 6세가 머문 리피차의 황실 종마장에서 만난 인연이 있었습니다. 황제 앞에서 연주하고 메달을 받은 일은 황실 기록으로 확인되며, 기사 작위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빈에서 그는 케른트너토르 극장 바로 옆, 한 과부의 집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 건물은 19세기에 헐렸고 지금은 그 자리에 자허 호텔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비발디가 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740년 10월 20일 황제가 세상을 떠났고, 후원의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습니다. 그 뒤 아홉 달 남짓 빈에서 그가 무엇으로 살았는지는 기록이 드뭅니다.

1741년 7월 28일, 비발디는 빈에서 사망했습니다. 슈테판 대성당의 기록에 따르면 장례는 가장 낮은 등급으로 치러졌고, 종도 가장 작은 것만 울렸습니다. 장례비는 모두 19굴덴 45크로이처였습니다. 그는 시립 병원 소유의 묘지에 묘비 없이 묻혔고, 그 묘지는 이후 사라졌습니다. 그 터는 오늘날 카를 교회 옆 빈 공과대학 자리입니다. 한때 유럽 음악 시장을 흔들었던 작곡가의 마지막은 그렇게 조용했습니다.

2. 작품 활동: 피에타, 암스테르담, 오페라, 〈사계〉

피에타: 30년의 살아있는 음악 실험실

비발디 음악의 거의 모든 것이 한 건물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는 표면적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는 자선 기관이었지만, 18세기 베네치아 4대 오스페달레 가운데 음악적 명성이 가장 높았습니다. 비발디는 1703년 임명 이후 1709년 이사회 표결에서 한 차례 밀려났다가 1711년 다시 고용됐고, 1716년에는 마에스트로 데 콘체르티(합주 책임자)가 됩니다. 이렇게 직책 변동을 반복하며 1740년까지 단속적으로 약 30여 년 이 기관과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피에타는 비발디에게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음악 실험실이었습니다. 어떤 새로운 화성, 어떤 낯선 악기 편성을 떠올리든 다음 주에 시연해 줄 오케스트라가 손 닿는 곳에 있었습니다. 클라리넷의 전신인 샬뤼모, 음색이 독특한 비올라 다모레, 만돌린, 류트 같은 변종 악기를 위한 협주곡이 다수 남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716년 오라토리오 〈승리한 유디트〉에서는 남성 배역까지 모두 피에타의 여성 가수들이 소화했는데, 이는 피에타라는 닫힌 환경이 곧 비발디의 작곡 한계조건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조화의 영감〉과 암스테르담 출판

비발디를 베네치아의 작곡가에서 유럽의 작곡가로 바꿔놓은 결정적 사건은 1711년에 일어났습니다. 피에타 밖에 있다가 다시 고용되는 그해, 그는 첫 협주곡집 〈조화의 영감〉(Op. 3)을 베네치아가 아닌 암스테르담의 에티엔 로제 출판사에서 펴내고 토스카나 대공의 후계자인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에게 헌정했습니다. 앞서 낸 소나타집 Op. 1과 Op. 2는 베네치아에서 찍었고, Op. 2는 베네치아를 방문한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4세에게 바친 것이었습니다.

로제 출판사는 베네치아 인쇄소들보다 앞선 동판 인쇄 기술과 유럽 각지로 닿는 도서 유통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같은 악보가 여러 나라의 음악가 손에 비교적 빨리 닿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조화의 영감〉은 출판 직후부터 유럽 각지에서 널리 연주되고 필사됐고, 1711년 이후 비발디의 출판 작품은 모두 암스테르담에서 초판이 나왔습니다.

오페라 흥행사 비발디

교회에서 자유로워진 사제는 무대 위에서 또 다른 얼굴을 갖게 됩니다. 비발디는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 50편 가까운 오페라를 작곡했고, 말년에 벤티볼리오 후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 오페라 94편을 썼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작곡가에 그치지 않고 가수 섭외, 무대 제작, 티켓 판매까지 직접 관여한 흥행사였습니다. 1718년부터 1720년까지는 만토바에서 헤센다름슈타트의 필리프 공을 섬기는 궁정 악장으로 일했고, 1720년대에는 베네치아와 로마를 오갔습니다. 본인 편지에 따르면 로마에서는 교황 앞에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너무 눈에 띄는 사람은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1720년 무렵 베네치아의 작곡가 베네데토 마르첼로가 익명으로 낸 풍자 소책자 〈유행 극장〉의 표지에는 사제 모자를 쓰고 바이올린을 켜는 작은 천사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인쇄된 이름 가운데 ALDIVIVA라는 낱말이 A. Vivaldi의 철자를 뒤섞은 것입니다. 오페라와 악보 판매로 그가 실제로 얼마를 벌고 어떻게 잃었는지는 비발디의 지갑 사정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사계〉: 시와 음악이 만나는 자리

〈사계〉는 1725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의 시도〉(Op. 8)의 첫 네 곡입니다. 비발디는 각 계절에 해당하는 소네트 한 편씩을 악보에 함께 적어 넣었고, 음악이 그 시의 장면을 묘사하도록 설계했습니다. 다만 그 소네트를 누가 썼는지는 확정돼 있지 않고, 시구의 베네치아식 표기를 근거로 비발디 본인이라는 추정이 유력할 뿐입니다. 〈사계〉는 표제 음악의 이른 대표 사례로 꼽힙니다.

이 협주곡집은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에게 헌정됐습니다. 비발디는 헌정사에서 백작이 이 네 곡을 출판 훨씬 전부터 들어 왔다고 적었으니, 〈사계〉는 1725년보다 몇 해 앞서 이미 연주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만토바 궁정에 머물던 1718~1720년 무렵 그곳 들판의 사계절이 이 곡의 바탕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계절별 더 깊은 감상은 별도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처음 듣는 분이라면 비발디의 소네트를 한 번 읽고 음악을 들어보기를 권합니다. 〈봄〉: 새소리, 시냇물, 짖는 개의 음악적 형상화, 〈여름〉: 나른한 더위와 격렬한 폭풍우의 대비, 〈가을〉: 수확의 흥취와 아침의 사냥 장면, 〈겨울〉: 떨림의 트레몰로와 난로 곁의 평온에서 각 곡의 악구별 분석을 보실 수 있습니다.

3. 비발디 음악의 특징, 협주곡의 표준을 만든 형식 감각

3악장 구조와 리토르넬로 형식

비발디의 가장 큰 음악사적 공헌은 어떤 한 곡이 아니라 협주곡이라는 형식 자체입니다.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 구성은 비발디 이전에도 쓰였지만, 그는 이 틀을 수백 곡의 협주곡에 되풀이해 쓰면서 사실상 표준으로 굳혔고, 각 악장의 골격이 되는 리토르넬로 형식(되돌아오는 악구)을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리토르넬로의 작동 원리는 단순합니다. 오케스트라 전체가 연주하는 주제(투티)가 일종의 기둥처럼 반복되고, 그 사이사이 독주자가 새로운 조성과 새로운 음형으로 일탈했다가 다시 주제로 귀환합니다. 청중에게는 익숙한 기둥이 안정감을 주고, 그 사이의 일탈이 긴장과 흥분을 만듭니다. 이 구조가 없었다면 청중은 매 악장마다 처음부터 다시 길을 외워야 했을 것입니다.

표제 음악과 색채 실험

비발디는 음악으로 자연을 묘사하는 데 능했습니다. 〈사계〉의 〈봄〉 1악장에 적힌 새들의 노래는 바이올린 음형으로 그대로 옮겨져 있고, 2악장에서는 잠든 양치기를 그리는 독주 바이올린 아래로 비올라가 비발디 본인이 짖는 개라고 적어 둔 거친 반복음을 계속 냅니다. 〈여름〉의 폭풍우, 〈가을〉의 술 취한 농부, 〈겨울〉의 떨림. 청각적 그림 같은 이 묘사들은 표제 음악의 이른 본격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표제를 붙인 곡은 〈사계〉만이 아닙니다. 같은 Op. 8 안에도 5번 〈바다의 폭풍〉, 6번 〈기쁨〉, 10번 〈사냥〉처럼 제목이 붙은 협주곡이 들어 있습니다. 다만 〈사계〉만은 출판하면서 소네트 전문과 악보 곳곳의 장면 설명을 덧붙였다고 비발디가 헌정사에 밝혔습니다. 곡이 먼저 있었고, 시와 설명은 인쇄본을 위해 다듬어 붙인 것입니다.

다작(多作): 한계인가, 발명인가

비발디의 다작에 대한 평가는 학자에 따라 갈립니다. 비발디가 협주곡 500곡이 아니라 같은 협주곡을 500번 썼다는 유명한 농담은 흔히 20세기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말로 인용되지만, 같은 시대 작곡가 루이지 달라피콜라에게 돌리는 견해도 있어 귀속이 확정돼 있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 음악학자 마이클 탤벗은 그의 비발디 연구에서 표면적 유사성 아래에는 화성 진행, 악구 길이, 독주의 위계 같은 요소에서 끊임없이 변주가 일어난다고 반박했습니다.

두 시각의 긴장은 사실 하나의 본질에서 나옵니다. 비발디는 형식의 발명가였고, 발명가는 자기 발명품을 끝까지 시험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한 형식의 가능성과 한계는 그 형식을 가장 오래, 가장 많이 다뤄본 사람만이 압니다.

4. 비발디가 후대에 남긴 것, 바흐와 토리노 발견

바흐가 비발디에게서 배운 것

독일 바이마르의 젊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비발디의 악보를 처음 손에 쥔 것은 1713~1714년경으로 추정됩니다. 바흐의 첫 전기 작가 포르켈은 1802년에 펴낸 바흐 전기에서 바흐가 비발디의 협주곡을 통해 음악적 사고의 질서, 연관성, 비례를 배웠다고 적었습니다. 흔히 바흐가 비발디에게서 음악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는 식으로 의역되어 알려진 표현의 출처가 바로 여기입니다.

바흐의 학습은 추상적 감상이 아니라 실제 손으로 옮긴 작업이었습니다. 현행 작품 귀속을 따르면 그는 비발디의 협주곡 11곡을 독주 하프시코드용으로 7곡, 오르간용으로 3곡, 네 대의 하프시코드용으로 1곡 편곡하며 화성 진행과 리토르넬로 구조를 분해해 익혔고, 그중 6곡이 〈조화의 영감〉에서 나왔습니다. 〈조화의 영감〉 Op. 3 No. 8(RV 522)은 BWV 593의 오르간 협주곡으로, Op. 3 No. 10(RV 580)은 BWV 1065의 4대 하프시코드 협주곡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 학습의 흔적은 훗날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명료한 형식 감각으로 이어집니다. 우연히도 두 사람은 해를 달리해 같은 날, 7월 28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비발디 1741년, 바흐 1750년).

200년의 망각, 그리고 1926년 토리노

비발디의 사후 약 200년간 그의 이름은 음악사에서 거의 잊혔습니다. 그를 다시 세상에 불러온 것은 한 수도원의 보수 자금 마련 결정이었습니다. 1926년, 토리노에서 멀지 않은 카살레 몬페라토 인근의 산 카를로 살레지오회 수도원이 보유 자료를 매각하기로 했습니다. 그 자료는 1922년 두라초 백작 가문의 마르첼로가 사망하면서 수도원에 유증한 것이었고, 그 안에 비발디의 자필 악보 다수가 들어 있었습니다.

감정을 의뢰받은 토리노 대학교의 음악사 교수 알베르토 젠틸리는 그 가치를 즉시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도서관도 시도 살 돈이 없었습니다. 1927년, 토리노의 은행가 로베르토 포아가 어린 나이에 잃은 아들 마우로를 기리며 자료를 매입해 토리노 국립대학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라초 컬렉션 전체의 절반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제노바의 다른 두라초 후손에게 남아 있었고, 1930년 사업가 필리포 조르다노가 마찬가지로 일찍 떠난 아들 렌초를 기리며 매입해 기증하면서 1930년 10월 30일 컬렉션이 다시 하나가 됐습니다.

두 컬렉션을 합친 폰도 포아-조르다노는 27권 분량에 약 450개 작품을 담고 있고, 오늘날 알려진 비발디 자필 악보의 90% 이상이 여기 있다고 평가됩니다. 두 컬렉션에는 지금도 두 아이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1939년 시에나의 비발디 주간

악보가 돌아왔다고 곧바로 음악이 울린 것은 아닙니다. 토리노 악보는 몇 해 동안 도서관 안에 머물렀고, 전환점은 1939년 9월 16일부터 21일까지 시에나의 키지아나 음악원이 연 비발디 주간이었습니다. 작곡가 알프레도 카셀라가 예술감독을 맡아 〈글로리아〉(RV 589), 〈크레도〉, 〈스타바트 마테르〉와 오페라 〈올림피아데〉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때 연주된 〈글로리아〉는 카셀라가 손본 편곡판이었고, 비발디 원본대로의 악보는 1957년에야 출판됐습니다. 오늘날 합창단의 단골 레퍼토리가 된 이 곡의 이야기는 비발디 〈글로리아〉 RV 589에 따로 정리했습니다.

5. 비발디 대표곡, 사계와 주요 작품 목록

비발디는 협주곡 약 500곡, 오페라 50편 가까이, 그리고 60편이 넘는 종교 음악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입문자가 먼저 만나기 좋은 핵심 작품을 카테고리별로 정리합니다.

출판된 협주곡집

작품 출판 의의
Op. 3 〈조화의 영감〉 1711, 암스테르담 유럽적 명성의 출발점, 바흐 편곡의 모태
Op. 4 〈라 스트라바간차〉 1710년대 중반, 암스테르담 독주 바이올린의 기교 확장
Op. 8 〈화성과 창의의 시도〉 1725, 암스테르담 앞 4곡이 〈사계〉, 모르친 백작에게 헌정
Op. 9 〈라 체트라〉 1727, 암스테르담 카를 6세에게 헌정한 협주곡집
Op. 10 플루트 협주곡집 1728년경, 암스테르담 가로 플루트 협주곡집으로는 처음 인쇄된 것으로 꼽힘

개별 협주곡 추천

〈사계〉(RV 269, 315, 293, 297) 외에 입문자가 만나기 좋은 곡들로는 두 대의 바이올린이 대화하듯 주고받는 〈조화의 영감〉 Op. 3 No. 8(RV 522), 만돌린 협주곡(RV 425), 깊은 감정선의 첼로 협주곡(RV 401), 그리고 화려한 기교의 〈라 스트라바간차〉 Op. 4 No. 1(RV 383a) 등이 있습니다.

종교 음악

〈글로리아〉(RV 589)는 비발디 종교 음악의 대표작입니다. 첫 곡의 합창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 오라토리오 〈승리한 유디트〉(RV 644), 〈마니피카트〉(RV 610), 〈스타바트 마테르〉(RV 621)가 자주 연주됩니다.

오페라

비발디 오페라 가운데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20편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중 〈오를란도 푸리오소〉(RV 728), 〈파르나체〉(RV 711), 〈티토 만리오〉(RV 738), 〈올림피아데〉(RV 725) 등이 현대 무대에서 자주 부활하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비발디는 정말 사제였나요?

네. 1703년 정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다만 서품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의 조임이라 부르던 호흡기 질환을 이유로 미사 집전을 그만두었고, 이후 음악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별명 일 프레테 로소는 붉은 머리의 사제라는 뜻입니다.

Q. 〈사계〉는 언제 작곡되고 출판되었나요?

〈사계〉는 1725년 암스테르담의 르 센 출판사가 펴낸 〈화성과 창의의 시도〉 작품 8 중 첫 네 곡입니다. 작곡 시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헌정사에 출판 훨씬 전부터 연주됐다고 적혀 있어 1720년 전후로 추정됩니다. 각 계절을 묘사한 소네트가 악보에 함께 인쇄된 것이 특징이며, 소네트를 누가 썼는지는 확정돼 있지 않습니다.

Q. 안나 지로와 비발디는 연인 관계였나요?

학계는 단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1737년 11월 16일 비발디 본인이 벤티볼리오 후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안나 지로 자매의 신앙심과 품행이 흠잡을 데 없다고 강하게 변호했습니다. 일부 후대 작가들은 연인설을 제기했지만, 동시대 1차 사료에서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Q. 비발디 음악은 왜 한동안 잊혔다가 다시 발견되었나요?

비발디는 1741년 빈에서 객사한 뒤 약 200년간 거의 잊혔습니다. 1926년 토리노 인근 산 카를로 살레지오회 수도원에 소장돼 있던 두라초 백작 가문 컬렉션이 매물로 나오면서 그 안에서 비발디 자필 악보 다수가 확인됐습니다. 이후 1927년 포아 컬렉션, 1930년 조르다노 컬렉션 기증으로 양분돼 있던 자료가 토리노 국립대학도서관에서 재결합됐고, 1939년 시에나의 비발디 주간에서 그의 성악곡과 오페라가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습니다.

Q. 비발디 작품번호 RV는 무엇인가요?

RV는 덴마크 음악학자 페테르 료옴이 정리한 비발디 작품 목록 료옴 페어차이히니스의 약자입니다. 출판 당시 부여된 작품번호 Op.와 별개로, 현재 학계에서는 RV 번호를 표준 식별 기호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봄〉은 RV 269입니다.

Q. 비발디의 가장 큰 음악사적 공헌은 무엇인가요?

협주곡 형식의 표준화입니다.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 구조와 리토르넬로 형식을 굳혀 후대 협주곡의 골격을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기 악보를 암스테르담에서 인쇄해 유럽 전역에 퍼뜨리며 바흐 같은 다른 나라 작곡가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마무리하며

비발디의 자리는 〈사계〉 안에서만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는 형식의 발명가였고, 출판이라는 새로운 음악 유통의 가능성을 일찍 활용한 작곡가였으며, 베네치아의 닫힌 자선 기관 안에서 가장 많은 음악적 자유를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시대로부터 충분히 이해받지 못한 작곡가였고, 그의 음악 대부분은 200년 가까이 지난 뒤에야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에 〈봄〉을 들을 때는 2악장의 비올라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잠든 양치기 곁에서 개가 짖는 소리를, 비발디는 악보에 글로 적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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