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다루는 내용"
-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누구인가? : 단 몇 번의 공연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가 된 이유
- 은둔의 천재, 그의 기이하고 완벽한 일화들 : 아우디 자동차와 맞바꾼 공연, 리허설의 전설
- 결정판! 꼭 들어야 할 명반 & 영상 가이드 : 무엇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 그가 남긴 유산 : 왜 지금도 모든 지휘자들의 우상으로 남았는가
서문 : '전설'의 서막
단 9장의 정규 음반, 평생 공식적으로 지휘한 횟수는 고작 96회. 현대의 유명 지휘자들이 1년에 소화하는 연주 횟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기록만으로, 어떻게 한 예술가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열정적인 몸짓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카를로스 클라이버
여기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1930-2004)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단순한 지휘자를 넘어 하나의 '신화'로 통합니다. 무대 위에서는 불꽃같은 에너지로 모든 것을 불태웠지만, 무대 밖에서는 그림자처럼 살기를 원했던 은둔의 천재. 이 글은 단 몇 번의 공연으로 영원을 증명한 그의 삶과, 왜 수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여전히 그의 희귀한 음반과 영상을 성서처럼 여기는지에 대한 탐구입니다.
1. 아버지라는 그림자, 화학도에서 지휘자로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열쇠는 그의 아버지, 역시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였던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 1890-1956)입니다. 에리히는 나치의 압제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아르헨티나로 망명했으며, 아들 카를로스가 음악가로서 겪을 고통을 우려해 그의 진로를 극도로 반대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카를로스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지만, 피 속에 흐르는 음악에 대한 열망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휘자의 길로 들어섭니다. 하지만 '에리히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가 완벽주의에 집착한 것은 어쩌면 아버지라는 거대한 존재를 이해하고 뛰어넘으려는, 한 아들의 평생에 걸친 분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능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2. '인간 클라이버'를 말해주는 일화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완벽주의자', '괴팍한 은둔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공연을 코앞에 두고 취소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리허설 중 단 하나의 음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대로 지휘봉을 놓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이한 고집 뒤에는 타협을 불허하는 "완벽한 음악적 순간"에 대한 예술가적 집념이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사랑한 지휘자
클라이버는 공연 제의를 거절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그를 무대에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미끼'는 바로 최신형 스포츠카였습니다. 1996년,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 측은 그의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현금 개런티 대신 그가 원했던 최신형 아우디 A8을 구해다 주어야만 했습니다. 완벽한 음악을 위해서라면 돈은 중요하지 않았지만, 완벽한 기계 공학의 산물인 자동차에 대한 열정은 그를 움직이게 한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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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아우디 A8 |
"새해 복 많이!" 만 수십 번 외친 리허설
1989년 빈 신년음악회 리허설 당시, 클라이버는 왈츠가 끝난 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관객을 향해 외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Prosit Neujahr!)"라는 단 한 마디를 수십 번씩 연습시켰습니다. 음악의 일부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공연 전체의 분위기와 타이밍, 감정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이 일화는 그의 완벽주의가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악보를 믿지 마세요"
그는 단원들에게 "악보에 쓰인 대로만 연주하지 말고, 그 음표 너머에 있는 작곡가의 영혼을 상상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에게 악보는 단순한 설계도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음악을 재창조하기 위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모든 음표는 마치 처음 연주되는 것처럼 생생한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3. 클라이버의 명반 & 영상 가이드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극히 적지만, 남겨진 모든 음반과 영상은 예외 없이 '결정판(First Choice)'으로 꼽힙니다.
3-1. 대표 음반 (CD /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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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 7번 (DG, 1974-76)
감상 포인트 : 클라이버를 상징하는 절대적인 명반입니다. 특히 5번의 첫 네 개 음표, '빠바바밤'이 어떻게 다른 지휘자들과 다른지 집중해서 들어보십시오. 주저함 없이 단칼에 내리꽂는 듯한 폭발적인 에너지와 1악장 전체를 관통하는 불타는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4악장에서 모든 것을 터뜨리는 환희와 해방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 해석'입니다.
(유튜브에서 'Carlos Kleiber Beethoven 5'를 검색해 직접 확인해 보세요.) -
브람스 교향곡 4번 (DG, 1981)
감상 포인트 : 브람스 특유의 비극미와 묵직한 정서를 압도적인 조형미로 쌓아 올린 명연입니다. 특히 마지막 4악장 파사칼리아의 30개의 변주가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처럼 정교하게 구축되는지 집중해보세요. 클라이버는 이 복잡하고 지적인 구조 속에서도 결코 뜨거운 감정의 흐름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성과 감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Carlos Kleiber Brahms 4'를 검색해 전설적인 피날레를 감상해 보세요.) -
슈베르트 교향곡 3번 & 8번 '미완성' (DG, 1978)
감상 포인트 : 그의 지휘 아래 빈 필하모닉의 유려한 현악기 선율이 왜 슈베르트 음악의 정수로 불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미완성' 교향곡에서 비극적 정서를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담긴 내면의 고뇌와 슬픔의 깊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3-2. 대표 공연 영상 (DVD / Blu-ray /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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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신년음악회 (1989, 1992)
필수 시청! 영상으로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그의 무대이자,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딱딱한 완벽주의자의 이미지를 벗고, 관객과 다정하게 교감하며 유머와 품격으로 음악회를 이끄는 그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그의 춤추는 듯한 지휘에 맞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연주하는 빈 필하모닉 단원들의 모습은 음악이 주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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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신년음악회 (1989, 1992)
필수 시청! 영상으로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그의 무대이자,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딱딱한 완벽주의자의 이미지를 벗고, 관객과 다정하게 교감하며 유머와 품격으로 음악회를 이끄는 그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그의 춤추는 듯한 지휘에 맞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연주하는 빈 필하모닉 단원들의 모습은 음악이 주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합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하는 1989년 빈 신년음악회 영상 (출처: YouTube)
마치며 : 순간으로 영원을 증명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양(Quantity)이 아니라 질(Quality)로, 반복되는 경력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완벽한 순간으로 영원을 증명한 지휘자였습니다. 후대의 수많은 거장들(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 등)이 그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클라이버처럼 지휘하고 싶다"는 말은 젊은 지휘자들에게 최고의 찬사로 통합니다.
그의 음반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를 넘어, 한 위대한 예술가가 도달하고자 했던 '찰나의 영원'을 함께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시대를 넘어, '순간'의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를 증명하는 영원한 아이콘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