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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멘델스존 "지휘봉을 사용한 현대적 지휘의 선구자"

  지휘자를 소개하는 시리즈 두번째로 현대 지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펠릭스 멘델스존을 소개하고자 한다. 멘델스존은 1829년부터 지휘봉을 사용하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방식을 대중화한 인물로 평가된다.

핵심 요약

  • 지휘봉 사용을 대중화하며 ‘현대 지휘’의 출발점을 제시
  • 1829년 바흐 마태수난곡 부활 공연으로 역사적 전환점 마련
  • 18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유럽 정상급으로 견인
  • 정확성·투명성·절제의 해석, 엄정한 리허설로 전문성 확립
  • 빠른 템포 논란에도 세련되고 명료한 연주로 호평
  •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 설립—후대 지휘·작곡 교육에 지대한 영향

1. 인물 개요

  펠릭스 멘델스존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낭만주의 초기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멘델스존은 왕립 관현악단 단원들이 정기적으로 그의 집에서 가졌던 사적인 연주회에 참여하면서 앙상블을 이끄는 실질적 기량을 습득했다.

  그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부활시킨 인물로도 유명하다. 숀베르그는 <The Great Conductors>에서 멘델스존을 “현대 지휘자의 출발점”으로 언급한다. 이전까지 지휘자는 대체로 악장이나 체르마이스터가 단순히 박자만 맞추는 역할에 머물렀으나, 멘델스존은 지휘봉을 통해 오케스트라 전체를 통제하고 해석을 제시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현대 지휘의 선구자 멘델스존과 지휘봉
현대 지휘의 선구자 멘델스존과 지휘봉

2. 지휘자로서의 업적과 음악적 특징

– 멘델스존의 지휘자로서 가장 유명한 업적은 1829년 베를린에서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연주한 것이다. 이는 바흐 사후 처음으로 열린 공연으로, 바흐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 1835년 그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멘델스존은 이 악단을 유럽 최고의 앙상블 중 하나로 성장시키며, 오케스트라 연주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그의 지휘 아래, 오케스트라는 멘델스존 자신의 작품뿐 아니라 로베르트 슈만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했다.

– 라이프치히 부임 당시 그는 “음악가들을 완전히 통제할 권한”을 요구했고, 실제로 동시대 기록에는 “독재(dictatorship)”라는 표현이 쓰일 정도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단순한 권위주의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를 가족처럼 대하며 연주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 멘델스존의 지휘는 정확성, 투명성, 절제된 표현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거대한 악기로 다루며, 모든 파트가 균형 있게 들리도록 했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지휘를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전기와 같은 힘, 자석 같은 매혹”으로 묘사했다. 그의 눈빛과 손짓, 지휘봉의 움직임은 연주자들에게 직접 신호가 되었고, 청중에게는 음악 그 자체로 다가왔다. 실제로 그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하나의 악기처럼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멘델스존은 세심한 디테일과 높은 기준으로 리허설에 임했다. 그는 연주의 정밀함, 균형, 명료함을 강조했고, 완벽한 사운드를 위해 수차례의 리허설을 고집했다. 이를 통해 연주에 전문성과 품격을 불어넣었다. 리허설에서는 꼼꼼하고 세심했지만 권위적으로 군림하지 않았으며, 음악가들과의 협업을 중시했다.

– 다만 그의 빠른 템포는 논란을 낳았다. 슈만은 베토벤 9번의 1악장을 너무 빨리 끌고 간다며 비판했고, 바그너 역시 그의 빠른 템포가 음악을 해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멘델스존의 연주는 늘 세련되고 명료했으며, 절제 속에서도 낭만적 열정을 잃지 않았다.

– 멘델스존은 교향곡, 오페라, 오라토리오,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를 지휘했으며, 과거의 음악을 되살리는 동시에 동시대 작곡가들의 신작도 무대에 올려 청중에게 소개했다. 1840년대 영국 필하모닉 협회에서 그의 지휘는 공연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평가되었다.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멘델스존이 지휘하면 오케스트라가 전혀 다른 차원의 연주를 보여주었다고 평론가들은 기록했다.

– 1843년 그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해 지휘와 작곡을 가르쳤으며, 이는 후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역사적 위치

  멘델스존은 ‘최초의 현대 지휘자’라 불릴 수 있다. 이전까지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 중 고개로 지시하거나, 체르마이스터가 단순히 템포만 주도했다. 멘델스존은 지휘봉을 사용해 오케스트라 전체를 이끄는 방식을 정착시켰다.

  초기에 슈만은 “교향곡은 공화국처럼 지휘자 없는 자율적 앙상블이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지휘자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곧 멘델스존의 지휘 효과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의 균형 잡힌 해석과 리더십은 연주 수준을 끌어올렸고, 이는 곧 라이프치히를 유럽 교향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단순히 박자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해석자이자 예술 감독형 지휘자였다. 프로그램 기획, 역사적 맥락까지 고려하며 오케스트라를 이끈 멘델스존의 리더십은 오늘날 지휘자의 모델이 되었다.

4. 읽으면 더 좋은 관련 정보 링크

지휘의 역사와 지휘자의 역할

멘델스존의 생애와 음악(작품)

바흐 마태수난곡

5. 마무리

  멘델스존은 “작곡가”로서보다도, “지휘자”로서의 행보가 현대 지휘자의 기원을 보여준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리더십을 묘사할 때 낭만주의 문학, 과학, 유사과학, 정치의 어휘를 빌려 “마법”과 “신비”라는 언어를 썼다. 그만큼 그의 지휘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예술적 사건이었다.

  숀베르그는 멘델스존을 통해 지휘가 단순한 박자 맞추기를 넘어, 음악 해석과 역사적 의미를 결정하는 예술 행위임을 강조한다. 작곡가·연주자·청중 사이의 매개자로서 멘델스존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낭만주의 지휘자의 별을 근대 오케스트라 문화 속 가장 빛나는 별로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