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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우스(Jean Sibelius)의 생애와 음악(작품)

러시아 제국의 검열관들은 이 곡의 제목을 무대에 올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핀란드 봄의 각성이 주는 행복한 감정이라는 엉뚱한 이름을 프로그램에 적어 넣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핀란드의 제2 국가로 불리는 핀란디아가 태어난 방식입니다. 이 곡을 쓴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는 음악으로 한 나라의 정체성을 빚어낸 작곡가였습니다.

시벨리우스 한눈에 보기
  • 생몰년: 1865년 12월 8일 하멘린나 출생, 1957년 9월 20일 아이놀라에서 사망(91세)
  • 대표작: 교향시 핀란디아, 교향곡 전 7곡,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 거처: 1904년 예르벤패에 지은 자택 아이놀라
  • 수수께끼: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 가까이 이어진 야르벤패의 침묵
  • 상징성: 핀란드의 러시아 지배 저항운동과 민족음악운동을 대표

러시아 지배 아래의 핀란드, 민족주의 음악가의 등장

핀란드는 강대국 사이에 낀 지리적 여건 탓에 오랫동안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9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의 혹독한 통치 아래 있었고, 이 시기 유럽 곳곳의 음악가들은 자기 민족의 색채를 음악에 어떻게 담을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장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정신과 저항을 대표하는 민족주의 음악가로 떠올랐습니다.

유년기, 음악으로 방향을 틀다

시벨리우스는 1865년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스웨덴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친척들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습니다. 다섯 살에 고모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열한 살에는 이미 작곡을 할 만큼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성인이 된 시벨리우스는 헬싱키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마음은 온통 음악에 가 있었습니다. 결국 학업을 등한시해 퇴학당한 뒤, 그는 헬싱키 음악원에 들어가 마르틴 베겔리우스에게 사사하며 음악에 전념했습니다.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기도 했지만 심한 무대 공포증 때문에 연주자의 길을 접고 작곡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장 시벨리우스의 모습
시벨리우스

베를린과 빈, 관현악에 눈뜨다

1889년 베를린으로 유학한 시벨리우스는 알베르트 베커에게 배우면서 바그너의 음악에 깊이 빠졌고, 한스 폰 뷜로가 지휘하는 베토벤 연주에 감동받으며 독일 후기 낭만주의에 경도되었습니다. 이어 1890년부터 1891년까지 빈에서 로베르트 푹스와 카를 골드마르크에게 배우는 동안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이 시기 그는 오케스트라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악기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헝가리와 루마니아 출신 동료들이 자국의 음악을 계승하려는 열정에 자극받아 핀란드 고유의 정체성을 담은 음악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만 이 시절 그의 사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베를린과 빈에 머무는 동안 낭비벽에 시달리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내기도 했습니다.

국민 작곡가, 핀란디아의 탄생

1891년 귀국한 시벨리우스는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영감을 나누던 이른바 심포지온 시기를 거치며 핀란드 음악계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에서 깊은 영감을 얻어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대작 쿨레르보 교향곡과 레민캐이넨 모음곡을 잇달아 발표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92년 6월 10일에는 아이노 예르네펠트와 결혼했고, 같은 해부터 헬싱키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899년,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린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러시아의 언론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기획된 언론의 날 축전을 위해 언론 기념 음악을 작곡했는데, 이 가운데 마지막 두 곡을 다시 손질해 독립된 연주회용 작품으로 만든 것이 핀란디아였습니다. 문제는 이 제목 자체였습니다. 러시아 당국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는 이유로 핀란디아라는 이름의 연주를 막았고, 그래서 이 곡은 핀란드 봄의 각성이 주는 행복한 감정, 스칸디나비아 합창 행진곡, 즉흥곡 같은 위장 제목을 달고서야 무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핀란디아라는 이름을 되찾아 독자적인 작품으로 처음 연주된 것은 1900년 7월 2일이었습니다. 이 곡은 이후 핀란드의 제2 국가로 불릴 만큼 그의 가장 상징적인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아이놀라 시기와 원숙기

핀란디아를 완성한 지 몇 해 지난 1904년, 시벨리우스는 헬싱키 근교 예르벤패의 자작나무 숲에 아내의 이름을 딴 집 아이놀라를 지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창작에 몰두하는 한편 고질적인 재정난에도 시달렸습니다. 이 시기에 교향곡 4번부터 7번까지,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여러 교향시를 통해 자신만의 어법을 극한까지 다듬어 나갔습니다.

일곱 개의 교향곡, 멈추지 않은 혁신

시벨리우스의 일곱 교향곡은 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1898년부터 1899년에 걸쳐 쓴 1번과 1901년부터 1902년 사이에 쓴 2번은 민족적 색채와 낭만적 열기가 두드러지는 초기 양식을 보여줍니다. 1907년의 3번을 지나며 편성과 구성이 한결 간결해지기 시작하고, 1910년부터 1911년 사이에 쓴 4번은 내면을 파고드는 어둡고 절제된 어법으로 크게 돌아섭니다. 백조의 비상을 연상시키는 피날레로 유명한 5번(1914~1915년 작곡, 1916년과 1917~1919년 두 차례 개정을 거쳐 지금 연주되는 최종판 완성)과 6번(1922~1923년)을 거치며 군더더기는 갈수록 사라지고, 1924년에 완성한 7번에 이르면 단 하나의 악장 안에 교향곡 전체를 압축해 넣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후기로 갈수록 형식을 확장하기보다 응축해 가는 이 흐름이야말로 시벨리우스 교향곡의 가장 뚜렷한 궤적입니다.

말년과 야르벤패의 침묵

시벨리우스의 국제적 인기는 1930년대에 정점을 찍었고, 그의 일흔 번째 생일은 국제적인 행사로 치러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 195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야르벤패의 침묵이라 불리는 긴 창작 공백기를 보냈습니다. 이 침묵의 원인은 여러 갈래로 설명됩니다. 이미 거장의 자리에 오른 그는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고, 1940년대 아이놀라에서 있었던 대대적인 원고 소각 자리에서 오랫동안 매달렸던 교향곡 8번의 원고가 사라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아내 아이노의 회고에 따르면 이때 함께 타 없어진 원고 가운데는 카렐리아 모음곡의 일부 악보도 있었습니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처럼 무조음악이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흐름이 되어 가는 동안, 조성음악의 틀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 온 그는 이 흐름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평생 그를 괴롭힌 알코올 문제와 말년의 심한 손 떨림은 악보를 그리는 일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고, 살아 있는 기념비와도 같았던 그에게 쏟아지는 국민적 기대는 오히려 창작을 가로막는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시벨리우스 자신은 이 모든 정교한 설명과는 결이 다른 말을 남긴 적도 있습니다. 그저 이제 충분히 썼다고 느꼈다는 훨씬 단순한 진술입니다. 일각에서 제기된 건강 악화설이나 정신병 발작설은 그가 91세까지 살았고 가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 긴 침묵의 시기 그가 남긴 것은 1948년 핀란디아 찬가를 혼성합창으로 편곡한 것을 비롯한 몇몇 소규모 정리 작업뿐이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1957년 9월 20일, 91세로 아이놀라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다음 생일을 석 달 남짓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사인은 뇌출혈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한때 쓰이던 100마르카 지폐에 그의 초상이 실릴 만큼 그는 핀란드 최고의 국민 영웅으로 남았습니다. 이 지폐는 핀란드가 2002년 유로로 화폐를 전환하면서 더는 유통되지 않습니다.

핀란드의 자연과 신화를 담은 음악 세계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핀란드의 광활한 숲과 수많은 호수, 북유럽 신화에서 비롯된 독창적이고 장엄한 색채가 특징입니다. 앞서 살펴본 일곱 교향곡 외에도 그는 핀란드의 자연과 신화를 소재로 한 교향시를 여럿 남겼습니다. 칼레발라에 바탕을 둔 초기 걸작 쿨레르보, 하나의 전설이라는 뜻의 환상적인 엔 사가, 투오넬라의 백조를 포함한 네 편으로 이루어진 레민캐이넨 모음곡, 칼레발라의 한 장면을 그린 포효아의 딸, 인상주의적 색채가 인상적인 바다의 여인, 그리고 앞서 살펴본 핀란디아가 있습니다. 마지막 교향시로 꼽히는 타피올라는 북유럽 숲의 정령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극도로 응축된 형식과 독창성을 보여줍니다.

북유럽 특유의 차가운 서정과 뜨거운 열정이 공존하는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는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바이올린 협주곡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연극을 위해 쓴 카렐리아 모음곡과 슬픈 왈츠,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부수음악 역시 오늘날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핀란디아는 왜 다른 제목으로 연주되었나요?

러시아 당국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이 제목 자체의 연주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핀란드 봄의 각성이 주는 행복한 감정이라거나 스칸디나비아 합창 행진곡, 즉흥곡 같은 이름으로 위장해 무대에 올려야 했습니다. 어떤 제목을 붙였는지는 공연마다 제각각이어서 기록마다 혼란스러울 정도입니다.

Q. 핀란디아는 언론 기념 음악의 일부였나요?

그렇습니다. 언론 기념 음악 전체가 아니라 그 가운데 한 곡이 아닌 두 곡을 골라 별도의 연주회용 작품으로 다시 짠 결과물이 핀란디아입니다. 독자적인 이름으로 처음 무대에 오른 날짜는 1900년 7월 2일입니다.

Q. 야르벤패의 침묵은 왜 일어났나요?

완벽주의와 자기검열, 무조음악이 대세가 된 시대와의 거리감, 알코올과 손 떨림 같은 건강 문제, 국민 영웅이라는 부담감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로 추정됩니다. 다만 시벨리우스 스스로는 그저 이제 충분히 썼다고 느꼈다는 훨씬 단순한 말을 남긴 적도 있어, 화려한 가설들과 나란히 새겨들을 만합니다.

Q. 교향곡 8번은 정말 불태워졌나요?

부인 아이노가 남긴 회고가 그 근거입니다. 아이놀라에서 대규모로 원고를 태운 자리가 있었고, 그 불길 속에 8번 교향곡뿐 아니라 카렐리아 모음곡 악보 일부도 함께 사라졌다고 전해집니다. 정확한 연도까지는 특정되지 않고 1940년대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Q. 시벨리우스는 몇 세에 세상을 떠났나요?

91세였습니다. 1865년 12월 8일생으로 1957년 9월 20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92번째 생일을 채우지 못하고 눈을 감은 셈입니다.

Q. 시벨리우스는 지금도 핀란드 화폐에 등장하나요?

지금은 아닙니다. 예전에 쓰이던 100마르카 지폐에 그의 초상이 실려 있었지만, 핀란드가 2002년 유로로 화폐를 전환하면서 이 지폐 자체가 유통을 멈췄습니다.

Q. 시벨리우스의 일곱 교향곡은 어떤 흐름으로 변해 갔나요?

초기작인 1번과 2번은 민족성과 낭만적 기운이 강하지만, 3번부터는 편성이 눈에 띄게 단출해집니다. 4번에서는 어둡고 내밀한 색채로 크게 방향을 틀고, 5번과 6번을 거치며 구성이 계속 정제되다가, 마지막 7번은 여러 악장을 통째로 하나로 녹여 낸 형태로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