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오랜 기간 타국의 지배를 받아온 나라였다. 19세기 러시아의 혹독한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가운데, 당시 유럽 음악가들은 자기 민족적 특색을 반영하는 음악에 대한 고심을 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 가운데 시벨리우스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민족주의 음악가였다.
1865년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는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벨리우스가 겨우 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친척의 도움으로 생계가 곤란하진 않았다. 5세 때 고모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11세에 작곡을 하는 등 일찌감치 음악에 재능을 드러내었다.
시벨리우스는 헬싱키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음악에만 매달린 나머지 퇴학을 당하자 헬싱키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공부에 전념한다. 그는 작곡을 배우는 동시에 바이올 린 연주자로서의 꿈을 키웠으나 무대 공포증 때문에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1889년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 시벨리우스는 바그너에 매료되고 한스 폰 뷜로가 연주하는 베토벤에 감동하는 등 독일 음악에 경도되었다. 하지만 이후 빈으로 건너가 음악을 배우면서 헝가리와 루마니아에서 온 음악가들이 자국의 문화와 음악을 계승하려는 태도에 자극받아 핀란드 고유의 음악을 만들고자 결심했다.
음악적 결심과는 다르게 사생활은 바르지 못했는데, 베를린과 빈에서 지내던 시절에 심한 낭비와 술과 도박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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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우스 (출처 : sibeliusmuseum.fi) |
1891년 귀국한 후에는 1892년, 핀란드의 전설 '카렐리아'를 토대로 한 <쿨레르보 교향곡>을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아이노와 결혼에 골인하고 헬싱키 음악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벨리우스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핀란드의 제2의 애국가라고 불리는 교향시 <핀란디아>이다. 원래 역사극 〈역사적 정경〉을 위한 곡이었는데, 이를 연주회용 교향시로 각색이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핀란디아>를 작곡한 지 몇 해 뒤부터 시벨리우스는 헬싱키 근교의 자작나무 숲에 아내의 이름을 딴 '아이놀라'라는 집을 짓고 생애의 후반을 보냈다. 특이한 것은 정열적으로 민족적인 음악을 작고했던 시벨리우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핀란드가 독립국가가 된 다음부터는 1957년 사망할 때까지 30년이 넘는 시기 동안 중요한 작품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강 악화설, 정신병 발작설 등 여러 말들이 있으나 92세까지 장수했고 가족들과 관계가 원만했던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시벨리우스에게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조류가 돼버린 비조성음악에 맞서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벨리우스는 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뇌출혈 때문이었는데,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핀란드 지폐에 시벨리우스 초상화가 등장할 만큼 그는 국민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시벨리우스는 7개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모두 개성이 다르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들은 구성, 악기 사용법, 정서에 이르기까지 매번 환골탈태의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그 기저에 흐르는 정서는 핀란드의 자연, 북유럽 신화 우주적인 영적 세계라고 요약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에 의한 <쿨레르보>, <엔 사가>, 모음곡 <카렐리아>, <투오넬라의 백조>, <핀란디아>,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1번, 2번 7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