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백조(Le Cygne)'의 우아한 첼로 선율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카미유 생상스의 걸작 《동물의 사육제》는 짧고 명쾌하며 유머러스하여 "동물학적 대환상곡"이라는 부제만큼이나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곡가 생상스는 생전에 공개 연주와 출판을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생상스가 36년 동안 숨기려 했던 이 유쾌하고 풍자 가득한 음악적 동물원을 함께 거닐며, 각 곡에 숨겨진 비밀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작곡 배경: 개인적인 농담에서 탄생한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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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간을 연주하는 카미유 생상스 |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1835-1921)는 1886년 2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프라하 근교의 쿠르딤으로 추정됨)에 머물던 중 이 곡을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은 생상스가 단 며칠 만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그는 자신의 주요 작품인 《교향곡 제3번 '오르간'》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곡이 너무 재미있어서 잠시 그 작업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곡은 본래 비공개적인 연주를 위해 만들어진 기회음악이었습니다. 생상스는 그의 친구인 첼리스트 샤를 조제프 르부크(Charles-Joseph Lebouc)가 매년 사육제(카니발, Mardi Gras)의 마지막 날에 주최하는 개인적인 음악회를 위해 이 곡을 헌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육제'란 명칭을 붙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육제(Carnaval, 謝肉祭 - 한자로는 고기에 안녕을 고하는 축제)란 사순절 기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절제와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이런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사람들은 미리 고기를 많이 먹어두려 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육제입니다. 사육제 기간 동안에는 맛있는 음식과 고기와 술을 많이 먹고 유쾌한 축제 분위기를 가집니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행사의 내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일상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탈선이 상당한 수준까지 허용된다는 점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육제를 지배하는 정신은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생상스가 공격적인 반(反)바그너주의 때문에 투어가 취소되는 등 겪었던 좌절감을 해소하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는 이 작품을 유머러스한 음악적 농담(Suite de facéties musicales)으로 간주했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의 구상은 생상스가 20대 후반이던 1861년/65년경 파리의 음악학교 교사 시절, 패러디 음악 수업 중에 학생들이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던 오래된 아이디어였습니다.
2. 구조 및 악기 편성: 특이한 실내악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는 총 14곡의 짧은 악장으로 구성된 조곡(組曲, Suite)이며, '동물학적 대환상곡(Grande fantaisie zoologique)'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전곡을 연주하는 데는 약 20~22분이 소요됩니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실내악 편성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금관악기는 전혀 사용되지 않은 변칙적인 앙상블 편성입니다. 전체 앙상블은 11개의 악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요 편성 악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 피아노 2대
- 현악 5중주 (바이올린 2,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 플루트 (피콜로 겸함)
- 클라리넷
- 글라스 하모니카 (희귀 악기로, 흔히 첼레스타나 글로켄슈필로 대체됨)
- 실로폰
글라스 하모니카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약 250년 전에 발명한 희귀 악기로, 물을 채운 크리스털 글라스를 회전시켜 젖은 손가락으로 만져 소리 내는 신비로운 음색을 냅니다.
현재는 각 파트에 여러 명의 연주자를 두는 관현악 편성으로도 자주 연주되지만, 원곡 실내악 편성으로 연주하는 것을 선호하는 음악 팬들도 많습니다.
3. 초연 및 사후 출판
작품의 초연은 1886년 3월 9일, 사육제(Mardi Gras)를 맞이하여 첼리스트 르부크의 개인적인 음악회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졌으며, 작곡가 생상스와 루이 디에메(Louis Diémer)가 피아노를 맡는 등 당대 명연주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초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프란츠 리스트 역시 성공 소식을 듣고 출판을 기대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생상스는 이 유머 가득한 작품이 자신의 다른 진지한 예술 작품보다 더 큰 인기를 얻어 자신의 명성을 깎아내릴까 두려워하여, 《백조》 악장을 제외한 전곡의 생전 출판과 공개 연주를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유일한 예외: 《백조》
총 14곡 중 유일하게 생전에 공개 연주 및 출판이 허용된 곡이 바로 제13곡 《백조》(Le Cygne)입니다.
이 곡은 첼로 독주와 두 대의 피아노 반주로 구성되었지만, 단독으로 출판될 때는 르부크에 의해 첼로와 피아노 1대의 형태로 편곡되어 나왔습니다.
이 곡의 원곡 템포 표시는 Andantino grazioso (우아하고 적당히 느리게)였지만, 생전에 출판을 허가받은 첼리스트 르부크가 이 템포를 Adagio (매우 느리게)로 변경했는데, 이는 우아한 백조가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백조》의 인기로 인해 이 모음곡이 잊히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생상스의 사후인 1922년에 마침내 전곡이 출판되었으며, 가브리엘 피에르네(Gabriel Pierné)의 지휘로 콜론 관현악단에 의해 재연된 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4. 전곡 감상 포인트 (풍자와 패러디의 향연)
《동물의 사육제》는 총 14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곡이 어떤 악기로 어떻게 동물을 묘사하는지, 그리고 어떤 풍자가 숨어있는지 포인트를 짚어보며 감상해 봅시다.
제1곡 : 서주와 사자왕의 행진 (피아노, 현악 5부)
두 대의 피아노가 웅장한 트레몰로를 연주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면, 현악기들이 위풍당당한 행진곡을 시작합니다. 동물의 왕 사자의 장엄한 등장을 알리는 서곡입니다.
제2곡 : 암탉과 수탉 (피아노, 클라리넷, 현악 3부)
클라리넷과 피아노, 바이올린이 번갈아 "꼬꼬댁!"하고 우는 암탉과 수탉의 모습을 재미있게 그려냅니다.
제3곡 : 당나귀 (2대의 피아노)
피아노 두 대가 쉴 새 없이 빠르게 상행하고 하행하며, 길들여지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야생 당나귀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제4곡 : 거북이 (피아노, 현악 5부)
오펜바흐의 경쾌한 '캉캉' 춤곡을 현악기가 아주 느리고 무겁게 연주합니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이의 모습을 풍자한, 재치 넘치는 곡입니다. 이는 원래 맹렬하고 빠른 춤곡인 오펜바흐(Offenbach)의 오페레타 《천국과 지옥》의 유명한 캉캉(Galop infernal) 멜로디를 극도로 느린 템포로 연주하게 만든 것입니다.
제5곡 : 코끼리 (피아노, 더블베이스)
가장 낮은 소리를 내는 더블베이스가 육중한 코끼리가 우아하게 왈츠를 추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여기에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중 스케르초나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겁벌》 중 '요정들의 춤'처럼, 원래 가볍고 높은 악기를 위해 쓰였던 멜로디를 일부러 육중한 코끼리에게 할당하여 유머를 극대화했습니다.
제6곡 : 캥거루 (2대의 피아노)
피아노의 스타카토(짧게 끊어 연주) 주법이 높이 뛰었다가 잠시 멈추는 캥거루의 움직임을 실감 나게 표현합니다.
제7곡 : 수족관 (피아노, 플루트, 글라스 하모니카, 현악 4부)
피아노의 반짝이는 아르페지오 위로 플루트와 첼레스타(또는 글라스 하모니카)가 신비로운 선율을 연주하며,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과 물방울의 영롱한 빛을 환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몽환적인 분위기는 바로 '글라스 하모니카'라는 희귀 악기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신비로운 수중 생물을 묘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 글라스 하모니카(출처 :benjaminfranklinhouse.org) |
제8곡 : 귀가 긴 등장인물 (바이올린 2대)
두 대의 바이올린이 "히힝~"하는 당나귀(혹은 노새)의 길고 신경질적인 울음소리를 흉내 냅니다. 이는 당시 생상스가 싫어했던, 그의 음악에 대해 악의적인 평가를 내리던 '음악 평론가'들을 풍자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제9곡 : 숲속의 뻐꾸기 (피아노, 클라리넷)
피아노가 고요하고 평화로운 숲의 화음을 연주하는 가운데, 무대 뒤에 숨은 클라리넷이 "뻐꾹, 뻐꾹"하고 울음소리를 들려줍니다.
제10곡 : 새 (피아노, 플루트, 현악 5부)
플루트가 주인공이 되어 현악기들의 반주 위에서 지저귀며 빠르게 날갯짓 하는 새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제11곡 : 피아니스트 (피아노, 현악 5부)
동물이 아닌 사람이 등장하는 유일한 곡입니다. 피아니스트들을 "가장 미친 동물"로 풍자하며, 단순하고 지루한 음계 연습(하논이나 체르니 연습곡을 연상시키는)을 초보자처럼 서툴고 기계적으로 연주하게 묘사합니다. 심지어 악보에는 '일부러 서투르게 연주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제12곡 : 화석 (피아노, 클라리넷, 실로폰, 현악 5부)
실로폰의 마른 뼈 부딪치는 소리가 인상적인 곡입니다. 여기서 '화석'은 멸종된 동물뿐만 아니라 "죽은 음악" 또는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을 뜻하며, 여러 인용곡이 등장합니다.
- 생상스 자신의 교향시 《죽음의 무도》 멜로디 (실로폰이 뼈가 부딪히는 소리를 흉내 냄)
- 프랑스 동요/민요 《내게 좋은 담배가 있네》 (J'ai du bon tabac)
- 《아, 엄마께 말씀드릴까요》 (Ah! vous dirai-je, maman - '반짝반짝 작은 별' 원곡)
- 《달빛에》 (Au clair de la lune)
-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로지나의 아리아
- 프랑스 군가였던 《시리아로 떠나면서》(En partant pour la Syrie)
제13곡 : 백조 (피아노, 첼로)
생상스가 유일하게 생전에 출판을 허락한, 이 모음곡에서 가장 유명한 곡입니다. 피아노의 잔잔한 물결 위로 첼로가 우아하고 서정적인 선율을 연주하며,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백조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립니다. 빼어난 선율미 때문에 다른 악기로 편곡하여 연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14곡 : 피날레 (전체 악기)
지금까지 등장했던 동물들이 모두 다시 나와 신나는 축제를 벌이며 화려하게 막을 내립니다. 떠들썩한 사육제의 마지막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5. 관련 에피소드 및 영향
가장 사랑받는 곡 《백조》의 탄생
《백조》는 첼로가 우아하게 물 위를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백조를, 피아노가 잔물결과 물에 비치는 빛을 묘사합니다. 러시아의 안무가 미하일 포킨은 이 곡에 영감을 받아 발레 《빈사의 백조》 (The Dying Swan)를 안무했으며, 전설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이 작품을 평생 약 4,000회 공연하여, 이 곡을 더욱 불멸의 명곡으로 만들었습니다.
해설이 있는 연주 및 현대적 해석
《동물의 사육제》는 곡의 특성상 해설자(Narrator)와 함께 연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랑스의 유머 작가 프란시스 블랑슈가 쓴 시적 해설과, 미국의 유머 작가 오그든 내쉬가 1950년에 쓴 우스꽝스러운 운문 해설이 유명합니다.
질다스 퓡지에와 에마뉘엘 수아레즈가 기악곡에 합창을 추가한 '노래하는 동물의 사육제' (Le Carnav(oc)al des Animaux)라는 혁신적인 버전을 만들었습니다. 이 버전은 동물의 사육제를 '통합 동물 종의 첫 번째 위대한 정상 회의'로 설정하며, 사자가 21세기에는 군주제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동물 왕'의 직위를 포기하며, 화석들은 인간들에게 "우리 아름다운 지구는 쌍둥이가 없다"며 지구 유산을 보호하라는 철학적인 경고를 전달합니다.
최고의 음반 추천
이 작품은 앙상블 구성에 따라 다양한 녹음이 존재합니다.
원곡인 실내악 버전으로는 카퓌송 형제(Renaud & Gautier Capuçon)의 녹음이 높이 평가됩니다. 앙상블의 정교함과 생생한 호흡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악 합주를 사용하는 관현악 편성 버전 중에서는 앙드레 프레빈(André Previn) 지휘의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녹음이 고전적인 명반으로 꼽힙니다.
또한 님므 예르비(Neeme Järvi) 지휘의 베르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녹음(Chandos 레이블)은 '글라스 하모니카'를 사용한 '수족관'을 포함하는 등, 현대적인 해석과 뛰어난 음질로 최고로 꼽히기도 합니다.
대중매체 속 등장
제7곡 《수족관》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 덕분에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978년 영화 《천국의 나날들》과 2008년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예고편에 사용되었으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1991)의 프롤로그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 2000》에서는 피날레 음악에 맞춰 플라밍고들이 요요를 가지고 노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무리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는 마치 화려한 동물 분장을 한 음악가들이 펼치는 비밀 코미디 쇼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우아한 왈츠를 추는 코끼리(《코끼리》)나 고고한 척하는 백조(《백조》)를 보지만, 그 안에는 음악계의 대가들(멘델스존, 베를리오즈)의 곡을 가져와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평론가들(《귀가 긴 등장인물》)에게 짓궂은 복수를 하는 작곡가 생상스의 재치 넘치는 모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패러디를 찾아내는 재미가 바로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