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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와 루터의 공통점

마태수난곡을 듣다 보면 같은 선율이 몇 번이고 되돌아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 피 흘리신 우리 주라는 코랄인데, 그때마다 화성이 조금씩 달라져 있습니다. 이 선율을 반복해 쓰는 방식 자체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혼자만의 발명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가 백 년도 더 전에 심어 놓은 회중찬송 전통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지만, 신학과 음악은 세대를 건너 이어졌습니다.

바흐와 루터, 시간을 건넌 연결
  • 마르틴 루터: 1483년 11월 10일 아이슬레벤 출생, 1546년 2월 18일 아이슬레벤 사망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년 3월 21일 아이제나흐 출생, 1750년 7월 28일 라이프치히 사망
  • 시간차: 루터 사망부터 바흐 출생까지 정확히 139년
  • 지리적 접점: 두 사람 모두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와 인연이 있음
  • 음악적 접점: 루터의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바흐가 칸타타로 재작곡

만난 적 없는 두 사람, 139년의 시간차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에 태어나 1546년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그로부터도 한참 뒤인 1685년 3월 21일에 태어나 1750년 7월 28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루터가 사망한 해부터 바흐가 태어난 해까지는 정확히 139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며 서로를 알았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뒤바꾼 신학과 예배 관습, 그리고 그가 직접 심은 음악 전통이 백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바흐라는 작곡가의 손에서 정교한 예술로 재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살펴볼 공통점은 두 사람의 개인적 인연이 아니라,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물려준 유산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루터와 바흐를 나란히 보여주는 이미지
루터(좌)와 바흐(우)

아이슬레벤과 아이제나흐, 겹치면서도 다른 지역

루터가 태어난 아이슬레벤은 당시 작센 선제후국이 아니라 만스펠트 백작령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그곳의 광부였습니다. 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는 작센안할트주에 속해 있다 보니 단순히 작센 출신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지만, 루터가 살던 시절의 실제 소속은 작센이 아니라 만스펠트였습니다.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는 튀링겐 지방의 도시로, 두 사람의 출생지는 같은 독일 중부 문화권에 속하면서도 엄밀히는 서로 다른 영방이었습니다.

다만 아이제나흐라는 도시 하나만 놓고 보면 두 사람의 인연은 뜻밖에 깊습니다. 루터는 소년 시절 이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성 게오르크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했습니다. 훗날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된 뒤에는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감춘 채 아이제나흐 인근 바르트부르크성에 몸을 숨겼고, 그곳에서 1522년 3월까지 머무르며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단 열 주 만에 독일어로 옮겼습니다.

바흐는 그로부터 백 수십 년 뒤인 1685년 3월 21일, 바로 이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이틀 만인 3월 23일 루터가 소년 시절 노래하던 바로 그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대부였던 고타의 시립악사 제바스티안 나겔의 이름을 따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바흐는 아홉 살이던 1694년에 어머니를, 그로부터 여덟 달 뒤인 1695년 2월에는 아버지마저 잃고 큰형이 사는 오르드루프로 옮겨 갔습니다.

루터가 만든 코랄, 회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

종교개혁 이전 예배에서 노래는 라틴어 전례성가를 훈련된 성가대가 부르는 것이었고, 일반 회중은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루터는 이 관습을 바꾸어,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독일어 단선율 찬송인 코랄을 예배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신학의 핵심을 사제만이 아니라 회중 전체가 직접 노래로 고백하게 만든 것입니다.

루터 자신도 여러 편의 코랄을 직접 작사·작곡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 1527년에서 1529년 사이에 가사와 선율을 모두 손수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시편 46편을 바탕으로 한 이 곡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압축해 담고 있어 종교개혁의 전투가로 불립니다.

바흐의 칸타타와 수난곡 속 루터의 선율

바흐는 루터가 남긴 코랄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성부가 얽히는 대위법으로 재조립했습니다. 루터가 직접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종교개혁 기념일을 위한 칸타타 BWV 80으로 다시 태어났고, 오르간을 위한 코랄 편곡 BWV 720과 네 성부 합창곡 BWV 302·303으로도 거듭 변주되었습니다.

마태수난곡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의 활용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되풀이되는 오 피 흘리신 우리 주는 루터 자신이 지은 곡이 아니라, 한스 레오 하슬러가 1600년 무렵 만든 세속 연가 선율에 루터보다 한 세기 뒤에 태어난 파울 게르하르트가 신앙시를 붙인 곡입니다. 바흐는 이 코랄의 다섯 절을 작품 곳곳에 네 가지 서로 다른 화성으로 배치했습니다. 같은 선율이 장면이 바뀔 때마다 다른 화성 옷을 입고 돌아오면서, 청중은 익숙한 멜로디를 통해 수난 이야기의 감정 변화를 몸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회중이 함께 부르던 친숙한 선율을 극적 장치로 바꾸어 놓은 셈입니다.

바흐의 책장에 꽂혀 있던 루터의 저작들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 작성된 재산목록에는 쉰두 권의 신학서적이 기록되어 있고, 그 가운데 마르틴 루터의 저작과 고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음악가로서의 활동과는 별개로, 바흐가 상당한 규모의 개인 신학 장서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 권짜리 칼로프 성경입니다. 바흐는 1733년 이 성경에 직접 서명을 남겼고,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348곳에 밑줄과 강조 표시, 여백 메모를 남겼습니다. 역대상 25장, 다윗이 성전 음악을 조직하는 대목 옆에는 이 장이 모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음악의 참된 토대라고 적었고, 역대하 5장의 성전 봉헌 장면 옆에는 경건한 음악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그 은혜와 함께 임재하신다고 적었습니다. 출애굽기의 두 합창대 관련 구절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를 전주곡에 대한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이 성경은 현재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콘코디아 신학교 도서관에 1938년부터 소장되어 있습니다.

음악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두 사람이 공유한 믿음

바흐는 많은 자필 악보의 끝에 라틴어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뜻의 문구를, 시작 부분에는 예수여 도우소서라는 뜻의 문구를 적어 넣곤 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음악을 개인의 명성이나 청중의 감상이 아니라 신앙 고백의 행위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루터가 라틴어 전례성가를 회중이 부르는 독일어 노래로 바꾸어 신학을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과 같은 방향입니다.

물론 루터가 신학과 코랄이라는 재료를 남겼다고 해서 바흐의 음악적 성취가 저절로 따라온 것은 아닙니다. 대위법으로 코랄을 재조립하고, 같은 선율에 매번 다른 화성을 입히는 작업은 바흐 자신의 오랜 훈련과 창작이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다만 그 훈련이 향한 방향, 그러니까 회중이 함께 부르던 노래를 예배의 중심에 두고 그것으로 신학을 전달한다는 발상 자체는, 139년 전 루터가 예배 관습을 바꾸며 놓아둔 길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바흐와 루터는 실제로 만난 적이 있나요?

만난 적이 없습니다. 루터가 세상을 떠난 1546년부터 바흐가 태어난 1685년까지는 정확히 139년의 시간차가 있어,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시대를 함께 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연결은 만남이 아니라 신학과 음악 전통이 세대를 넘어 전해진 결과입니다.

Q. 루터는 정말 작센 출신인가요?

다릅니다. 루터의 출생지 아이슬레벤은 종교개혁 당시 작센 선제후국이 아니라 만스펠트 백작령 소속이었고, 아버지도 그 지역의 광부였습니다. 지금은 작센안할트주에 편입돼 있어 흔히 작센 출신으로 오해받지만, 실제 당대 소속은 따로 있었던 셈입니다.

Q.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는 루터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관계가 깊습니다. 소년 루터가 다니던 라틴어 학교와 그가 노래하던 성가대가 있던 교회가 바로 이 도시에 있었고, 훗날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에는 근처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옮겼습니다. 바흐는 백 수십 년 뒤 이 도시에서 태어나 이틀 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Q.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나오는 코랄은 루터가 만든 곡인가요?

아닙니다. 마태수난곡에 쓰인 코랄 '오 피 흘리신 우리 주'의 선율은 하슬러가 16세기 말에 세속곡으로 만든 것이고, 가사는 루터보다 한 세기 뒤에 태어난 파울 게르하르트가 1656년에 붙였습니다. 루터가 가사와 선율을 모두 직접 지은 곡은 따로 있는데,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그 곡이며 바흐는 이 곡을 별도의 칸타타로 다시 작곡했습니다.

Q. 바흐의 책장에 루터의 책이 정말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바흐 사후 작성된 재산목록에 신학서 쉰두 권이 올라 있고, 그 목록에 루터의 저작과 요세푸스의 저작이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바흐가 1733년에 직접 서명한 세 권짜리 칼로프 성경입니다.

Q. 바흐가 성경 여백에 남긴 메모에는 어떤 내용이 있나요?

다윗이 성전음악을 조직하는 역대상 대목에는 교회음악의 근거를 강조하는 소감을, 성전을 봉헌하는 역대하 대목에는 음악과 하나님의 임재를 연결짓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두 합창대가 등장하는 출애굽기 구절 옆에도 짧은 메모가 붙어 있습니다. 확인된 메모만 348곳에 이릅니다.

Q. 바흐는 정말 악보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적었나요?

여러 자필 악보에 그런 표시를 남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곡을 마칠 때는 라틴어 약자 S.D.G.(Soli Deo Gloria, 하나님께만 영광)를, 시작할 때는 J.J.(Jesu Juva, 예수여 도와주소서)를 적어 넣는 습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정확히 몇 작품에 이런 표시가 남아 있는지 통계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