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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초 벨리니(Vincenzo Bellini)의 생애와 음악

  이탈리아 시칠리아 카나티아 지방에서 태어난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는 할어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교회의 지휘자이자 오르가니스트였다. 그는 세 살 때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6살 때 할아버지의 지도로 종교 음악을 쓸 정도로 음악 신동이었다. 또한 시적인 감성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시적 감수성은 후에 그의 오페라의 특징을 이루게 된다.

 

  벨리니는 18세에 가족들의 권유로 나폴리 왕립음악원에 입학했는데, 스승 징가렐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벨리니는 훗날 유려하고 기품 있는 선율을 작곡하게 된다. 또한 이곳에서 평생의 경쟁자인 도니제티와도 인연을 맺게 된다. 182524세에 졸업하면서 첫 번째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 학생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인 큰 성공을 거둔다. 이 성공으로 인하여 벨리니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으로부터 오페라 작곡을 위촉받아 1826<비앙카와 페르난도>를 작곡한다. 또한 지휘자 바르바이아는 1827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할 <해적>을 의뢰하게 된다. 이러한 성공은 젊은 벨리니를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했으며, 이후 도니제티와의 본격적인 경쟁구도가 성립된다.

 

  이 시기에 벨리니는 당시 가장 유명한 극작가인 펠리체 로마니를 만나게 된다. 벨리니는 항상 극작가들에게 구성이 단순하고 스토리 전개가 빨라야 한다고 요구했고, 로마니는 그의 이상적인 파트너가 되었다. 1830년 두 사람은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토대로 한 <카플레티 가와 몬테규 가>를 함께 만들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로마니는 당시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아주 멜로드라마적인 대본을 만들어 내었다.


빈센초 벨리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빈센초 벨리니 (출처 : bbc.co.uk)


  이듬해인 1831년 밀라노 카르카노 극장에서 초연된 <몽유병의 여인>은 유럽과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공연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이때 벨리니는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던 노래의 한 부분을 연상시키는 듯한 악절을 집어넣었는데, 이것으로 인해 오페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벨리니는 이 작품에서 주연을 맡게 된 테너 가수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와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를 극찬하며, 이후의 작품에서도 초연하게 되는 성악가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오페라의 음악이 성악가의 기량과 최상의 조건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작곡하였다.

 

  벨리니의 작품 중 지금까지 가장 사랑 받는 작품은 <노르마 Norma>이다. 1831년 밀라노의 스칼라에서 초연은 실패하였으나 이후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고, 벨리니도 매우 애착을 가졌던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저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합창 전쟁, 전쟁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영웅 오페라이며, ‘프리 마돈나오페라로도 불린다. 그 이유는 이 작품에서 노르마를 맡은 가수는 벨칸토 창법의 명수로서 재주와 품격을 갖추어야 하고, 아울러 혼자서도 무대를 제압할 수 있는 연기력과 탁월한 카리스마를 소유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제1막에서 노르마의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와 제2막의 여성 이중창인 들어 주소서, 노르마”(mira, o Norma), 그리고 노르마와 그의 애인이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피날레 대목에서의 정열적 아리아가 유명하다.

 

  1833년 베니스에서 <텐다의 베아트리체>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노르마> 이후 벨리니는 로마니와 의견충돌로 6년 간의 협업이 끝났다. 이후 파리로 건너간 벨리니는 <청교도>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카를로 페폴리가 쓴 대본이 엉성하였음에도 아름다운 멜로디와 호화로운 무대 등으로 약점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벨리니는 <청교도>의 초연한 8개월 후 결혼과 새로운 오페라 작곡 등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요절하였다.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은 대장의 금성 염증 때문이었다.

 

  벨리니는 사랑했던 첫 여인이 있었으나 여자쪽 부모의 반대로 결혼해 실패하였다. 그후 1828년 주디타 투리나(Giuditta Turina)라를 제노바에서 만난 이후 5년 동안 연인 관계를 지속하였으나, 사실 이 여성은 다른 남성과 결혼한 상태였다.

 

  벨리니는 19세기 초 로시니, 도니체티와 함께 벨칸토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로시니와 도니제티의 음악이 비교적 단순하고 명랑했던 반면, 벨리니의 음악은 매우 서정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벨리니는 극적인 면보다는 서정적 요소, 고도의 성악적 기교, 표현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였다.

 

  그는 오페라 11곡과 성악곡 26곡을 남겼는데, 그중 <몽유병의 여인>, <노르마>, <청교도>는 벨리니의 3대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지금까지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오페라 아리아 역시 뛰어난 아름다움과 고난도의 기술을 자랑한다.

 

  벨칸토 오페라는 베르디와 베리즈모 오페라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1950년 이후 그 가치가 재조명 되었다. 벨리니의 오페라가 재조명되는데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창법을 구사하는 세기의 소프라노인 마리아 칼라스와 존 서덜랜드의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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