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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는 왜 가곡을 600곡이나 썼을까? 약화된 궁정 후원과 거실 음악의 탄생

인물 한눈에 보기
  •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 활동 시기: 1810년대~1820년대 비더마이어 시대(오스트리아 빈)
  • 대표 장르: 독일어 예술 가곡(Lied) 600여 곡(집계 기준에 따라 600~630곡)
  • 주요 인물: 요한 미하엘 포글(협력 성악가), 안톤 디아벨리(악보 출판업자)

비더마이어 시대, 약화된 궁정 후원과 거실의 부상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던 1810년대 후반은, 대규모 귀족 궁정의 전속 후원 모델이 급격히 약화되던 이른바 비더마이어(Biedermeier) 시대였습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메테르니히 체제의 엄격한 정치적 검열 속에서, 시민들은 광장이나 거대한 극장 대신 안전하고 아늑한 가정의 거실(Salon)에 모여 문학과 음악을 즐기는 내면의 세계로 침잠했습니다.

다만 이 변화를 단지 '전쟁이 끝나서'라는 한 줄로 설명하기는 부족합니다. 실제로는 세 가지 흐름이 겹쳐 있었습니다. 첫째, 귀족들이 직접 운영하던 사설 악단(Hauskapellen)이 19세기 들어 구조적으로 쇠퇴했습니다. 둘째, 문화 후원의 주도권이 왕실·귀족에서 신흥 부르주아 계층으로 서서히 넘어갔습니다. 셋째, 악보 출판업과 악기 제작업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산업으로 성장하며, 가정에서 소비할 음악 상품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유통망이 갖춰졌습니다. 하이든 시대처럼 특정 귀족 가문에 전속으로 고용되어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작곡가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고, 슈베르트 역시 대형 연주회를 직접 열거나 오페라를 올려 수익을 창출할 거대 자본이 없었기에, 이 새로운 유통망을 통해 중산층 거실에 도달할 수 있는 음악에 눈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피아노 주위에 모여 음악을 즐기는 19세기 오스트리아 빈의 중산층 가족의 평화로운 거실 풍경
피아노 주위에 모여 음악을 즐기는 19세기 오스트리아 빈의 중산층 가족의 평화로운 거실 풍경

대형 무대 대신 거실을 선택한 가곡

슈베르트는 막대한 제작 비용이 드는 대형 교향곡 상연 대신, 피아노 한 대와 성악가 한 명만 있으면 연주가 가능한 독일어 예술 가곡인 리트(Lied) 창작에 평생의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만약 슈베르트에게 에스테르하지 가문처럼 전속 오케스트라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면, 그는 교향곡 작곡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쏟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제작 부담이 낮고, 앞서 말한 새 유통망(악보 출판·가정용 피아노 보급)에 정확히 들어맞는 형식을 찾아야 했습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많은 가곡을 남긴 것을 오직 생존을 위한 계산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와 실러(Friedrich Schiller) 등의 시를 깊이 사랑했고, 문학의 텍스트에 선율을 입히는 것을 예술적 소명으로 즐겼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곡은 피아노가 중산층 가정으로 점차 널리 들어가던 시대의 거실에서 소비되기 좋은 악보 상품이기도 했습니다. 문학적 애정과, 그 애정을 담을 그릇을 정해준 시장의 구조가 함께 작용한 결과물이 바로 그의 가곡이었던 셈입니다.

항목 베토벤이 경험한 시장 슈베르트가 직면한 시장
주요 수익 기반 귀족 후원자들의 종신 연금, 대형 연주회 대중 대상의 가곡 및 피아노 소품 악보 출판
음악의 주 소비 공간 거대한 공공 연주회장, 화려한 귀족 궁정 비더마이어 시대 중산층의 사적인 거실
수익의 안정성 다중 후원 구조로 비교적 안정적 유지 출판 계약 및 단발성 판매에 의존하여 불안정함

슈베르티아데와 마왕의 출판: 지인 네트워크가 떠받친 데뷔

그의 음악을 후원하고 연주하기 위해 지인들이 모였던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는 정식 티켓을 파는 극장이 아니라 친구들의 사적인 거실 친목 모임이었습니다. 1815년 이그나츠 폰 존네라이트너의 자택에서 시작해 이후 프란츠 폰 쇼버 등이 주최를 이어받았고, 참석 인원은 소수부터 100명 이상까지 다양했으며 극작가 그릴파르처나 베토벤도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규모가 커지기도 했습니다. 이 모임에서 당대 최고의 바리톤 요한 미하엘 포글(Johann Michael Vogl, 1817년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소개로 슈베르트와 인연을 맺었습니다)이 신곡을 부를 때 그 감동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 대중의 악보 구매로 이어지는 비공식적인 신곡 쇼케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특히 괴테의 시에 극적인 피아노 반주를 입힌 걸작 〈마왕(Erlkönig)〉의 출판 일화는 슈베르티아데의 힘을 잘 보여줍니다. 1815년 작곡된 이 곡은 몇 차례 개정을 거쳐, 1821년 빈의 '카피와 디아벨리(Cappi und Diabelli)' 출판사를 통해 슈베르트의 첫 번째 작품번호(Op. 1)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출판은 정식 출판 계약이 아니라 존네라이트너 가문 등 지인들의 사설 구독으로 인쇄 비용을 먼저 마련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이는 정식 시장에 진입하기 전, 지인 네트워크가 작품의 출판을 든든하게 떠받친 19세기식 자비 출판에 가까웠습니다.


슈베르트의 마왕 디아벨리 출판사 악보 표지
 마왕 디아벨리 출판사 악보 표지

악보 출판과 프리랜서 작곡가의 현실

1825년 무렵, 슈베르트의 형편이 한동안 나아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어떤 출판사와 정확히 어떤 규모의 계약을 맺었는지 구체적인 근거까지는 확인되지 않으며, 안톤 디아벨리와의 관계도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한동안 슈베르트의 곡을 위탁판매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찍어내다가, 그 방식 자체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난 성공'이라기보다 '악보 출판 시장이 그의 음악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는 당장의 생활비와 방값을 마련하기 위해, 장기적인 수익보다 즉시 받을 수 있는 현금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러 작품의 판권을 일시불로 넘기는 방식은 훗날 보면 불리해 보이지만, 고정 연금이 없던 프리랜서 작곡가에게는 매우 현실적이고 절박한 선택이었습니다.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오페라 극장에서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지만, 개인 소비자의 거실로 파고든 그의 가곡은 중산층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며 슈베르트의 이름을 가장 오래 남긴 장르가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귀족 사설 악단의 쇠퇴와 부르주아 출판·악기 산업의 성장이라는 구조적 변화가 청중을 궁정에서 거실로 옮겨놓았고, 그 새 청중에게 딱 맞는 저비용·고이동성 형식이 가곡이었기에 슈베르트는 그 형식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마왕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작곡됐나요?

1815년, 슈베르트가 18세 때였습니다. 친구 요제프 폰 슈파운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날 오후 슈베르트를 찾아갔더니 괴테의 시 〈마왕〉을 소리 내어 읽으며 방 안을 서성이다가, 순식간에 종이에 곡을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 다만 이 곡이 곧바로 완성형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몇 차례 개정을 거쳐 1821년 출판된 판본에 이르렀습니다. 하루 만에 영감으로 완성됐다는 식의 낭만적 일화와, 실제로는 여러 차례 손을 본 완성 과정이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Q. 마왕 출판 자금은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모았나요?

존네라이트너(Sonnleithner) 가문이 모금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정식 출판사와 계약을 맺기 전, 지인들이 사설 구독(private subscription) 형태로 인쇄 비용을 미리 부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반응이 좋자 1821년 3월 7일 빈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공개 초연이 열렸는데, 이때 슈베르트와 오래 협력한 바리톤 요한 미하엘 포글이 노래를 부르고 안젤름 휘텐브레너가 피아노를 맡았습니다. 이 초연의 반응이 워낙 좋아 〈마왕〉을 포함한 여덟 작품(Op.1~8)이 그해에 한꺼번에 출판됐고, 〈마왕〉 초판은 모리츠 폰 디트리히슈타인 백작에게 헌정됐습니다.

Q. 슈베르트의 정확한 가곡 수는 몇 곡인가요?

자료마다 폭이 있습니다. '600여 곡'이라는 표현이 가장 널리 쓰이지만, 세는 기준에 따라 600곡에서 630곡 사이로 집계되기도 합니다. 미완성 스케치나 개정판을 별도로 셀지, 같은 시에 붙인 여러 버전을 몇 곡으로 셀지 등 집계 기준이 통일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일한 확정 숫자보다는 '600곡대'라는 규모 자체가 핵심입니다.

Q. 슈베르트는 정확히 어떤 병으로 죽었나요?

1828년 사망 당시 공식적으로는 장티푸스로 기록됐습니다. 다만 통속적으로는 매독 후유증이나 그 치료 과정의 수은 중독이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오래 돌았습니다. 최근 학계에서는 위장 질환, 백혈병, 빈혈, 하시모토 갑상선염 등 여러 다른 가설도 함께 제기되고 있어, 확정된 정설은 아직 없는 상태입니다. 특정 사인을 단정하기보다 '말년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정확합니다.

▶ 오늘의 감상 포인트

슈베르트의 가곡은 단순한 영감의 폭발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극장 대신 중산층의 거실을 선택해야 했던 프리랜서 작곡가의 치열한 생존 전략이 빚어낸 내밀한 예술입니다. 오늘 밤 〈마왕〉이나 〈송어〉를 들으실 기회가 있다면, 화려한 궁정이 아니라 퇴근 후 촛불 아래 옹기종기 모여 피아노 악보를 펼쳤을 200년 전 빈 사람들의 거실 풍경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