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작품번호·조성: K.626, d단조
• 작곡: 1791년, 미완성으로 남음
• 위촉: 프란츠 안톤 폰 발제크 슈투파흐 백작, 보수 50두카트
• 자필 악보: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소장, 납품 악보와 작업 악보 두 권
• 통용 완성본: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 1792년 완성. 초판은 1800년 라이프치히
빈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에는 모차르트 〈레퀴엠〉의 원본 악보가 두 권으로 나뉘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중 위촉자에게 실제로 건네진 쪽의 첫 장을 펼치면, 오른쪽 위 구석에 잉크로 쓴 짧은 서명이 보입니다. "di me W: A: Mozart mpr", 내가 직접 쓴 것, 모차르트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연도가 적혀 있습니다. 792.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에 죽었습니다. 1792년에 그가 무엇을 직접 쓸 수는 없었습니다. 비평판 편집자들이 이 페이지의 필적을 하나씩 갈라낸 결과, 그 서명은 모차르트의 제자이자 조수였던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레퀴엠〉 이야기는 보통 두 갈래로 흐릅니다. 하나는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자와 독살설처럼 영화가 만들어 낸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모차르트가 라크리모사 8마디를 쓰다가 죽었다"는 한 줄 요약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정리되었습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생애를 따라가면 분명해집니다. 뒤의 요약은 틀리지는 않지만 너무 짧습니다.
악보 자체는 훨씬 구체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이 글이 답하려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레퀴엠〉에서 어디까지가 모차르트이며, 그 경계를 알고 나면 무엇이 다르게 들리는가.
위촉자에게 건네진 악보에는 1792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레퀴엠〉을 주문한 사람은 프란츠 안톤 폰 발제크 슈투파흐 백작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한 진혼 미사를 원했고, 남의 작품을 사서 자기 이름으로 연주시키는 취미가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보수는 50두카트였습니다. 훗날인 1838년, 빈 궁정도서관이 이 악보를 사들일 때 지불한 금액도 정확히 같은 50두카트였습니다.
모차르트가 죽은 뒤 미망인 콘스탄체는 이 주문을 끝내야 했습니다. 받은 돈을 돌려주지 않으려면 완성된 악보를 넘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그 일을 마친 사람이 쥐스마이어였고, 그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결정을 내립니다. 모차르트가 남긴 악보에 자기 글씨를 덧쓰지 않고, 모차르트의 원고를 통째로 새로 베낀 다음 그 사본에 빠진 부분을 채워 넣기로 한 것입니다. 그가 밝힌 이유는 "두 사람의 필적이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이었습니다.
결과는 그의 의도보다 훨씬 멀리 갔습니다. 쥐스마이어의 필체는 모차르트의 것과 워낙 비슷해서, 주문한 백작뿐 아니라 뒷날의 여러 감정가들까지 자기 앞에 놓인 것이 모차르트의 자필 총보라고 믿었습니다. 이 오해는 1839년이 되어서야 정리됩니다. 그해 2월, 문의를 받은 콘스탄체가 디에스 이레부터의 악보는 쥐스마이어가 쓴 것이라고 사실관계를 바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국립도서관의 두 권은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한 권은 백작에게 넘어갔던 납품 악보로, 겉보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전곡 총보이지만 앞의 두 곡을 빼면 전부 쥐스마이어의 글씨입니다. 다른 한 권은 모차르트의 책상에 남아 있던 작업 악보로, 곳곳이 비어 있는 미완성 원고 그대로입니다. 두 권이 같은 소장번호로 묶인 것은 1838년의 일입니다.
그 792라는 숫자가 언제 적혔는지도 문서로 좁혀집니다. 비평판 연구는 쥐스마이어의 기입을 1792년 2월 말 이전으로 봅니다. 하한은 그해 3월 4일에 남은 인수 기록입니다. 완성된 레퀴엠의 사본이 빈에 와 있던 프로이센 공사에게 넘어간 날짜입니다. 모차르트가 죽고 석 달이 지나기 전에 이 곡은 이미 완결된 전곡의 모습으로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전곡이 청중 앞에서 울린 기록은 이듬해 1월 2일 빈의 얀 홀 연주에 쓰인 파트보로 남아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남긴 것은 노래와 베이스, 그리고 밑그림입니다
모차르트가 남긴 원고는 백지도 완성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곡에서 성악 네 성부와 오르간 베이스를 끝까지 적고, 그 아래에 숫자저음을 달고, 관현악 성부는 밑그림만 남겼습니다. 숫자저음(figured bass)은 베이스 음 아래에 숫자를 적어 그 위에 쌓일 화음을 지정하는 기보법입니다.
이 사실 하나가 〈레퀴엠〉의 성격을 거의 다 설명합니다. 노래 선율과 베이스와 화음이 이미 다 적혀 있다면, 그 음악의 화성 진행도 성부의 얽힘도 형식의 골격도 전부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은 것은 그 뼈대에 어떤 악기의 색을 입힐 것인가뿐입니다. 우리가 듣는 〈레퀴엠〉의 상당 부분이 모차르트의 필적이 아닌데도 여전히 모차르트로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간별로 나누면 경계는 이렇게 갈립니다.
| 구간 | 모차르트 자필로 남은 것 | 다른 손이 채운 것 |
|---|---|---|
| 1곡 인트로이투스 | 성악, 베이스, 숫자저음, 그리고 나중 작업에서 완성한 관현악 총보 | 없음 |
| 2곡 키리에 | 성악, 오르간 베이스, 일부 숫자저음 | 현악과 목관, 트럼펫과 팀파니. 필적의 주인은 미상 |
| 3곡 디에스 이레부터 7곡 콘푸타티스 | 성악, 베이스, 숫자저음, 관현악 밑그림 | 관현악 전체 |
| 8곡 라크리모사 | 1마디부터 8마디까지 | 9마디 이후 전부 |
| 9곡 도미네 예수, 10곡 호스티아스 | 성악, 베이스, 관현악 밑그림. 다른 손의 가필 없음 | 관현악 전체 |
| 상투스,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 | 없음 | 전곡 |
| 마지막 코무니오 | 없음 | 1곡과 2곡의 음악을 되가져와 만듦 |
이 경계는 후대 학자가 추정으로 그은 선이 아닙니다. 1800년 여름, 콘스탄체의 두 번째 남편이 된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니센이 작업 악보를 펼쳐 놓고 남의 손이 들어간 곳마다 연필로 테두리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첫 장 위쪽에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연필로 울타리를 치지 않은 것은 32쪽 뒤까지 전부 모차르트의 필적이다." 지금도 그 연필 울타리는 악보 위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작업 악보의 마지막 장을 펼치면 이 미완성의 상태가 눈으로 보입니다. 맨 위 현악 한 단에만 음표가 적혀 있고, 그 아래 관악을 위한 오선 여러 단은 완전히 비어 있습니다. 페이지 아래쪽 성악 네 단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소서"라는 뜻의 라틴어 가사가 또박또박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여백에는 같은 지시가 두 번 적혀 있습니다. quam olim da capo, 앞서 나온 푸가를 여기서 다시 처음부터. 지금 남아 있는 작업 악보에서 그의 손이 적은 것으로는 이 여섯 글자가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그 페이지의 오른쪽 아래 모서리는 지금 뜯겨 나가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블러는 라크리모사 9마디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완성을 처음 맡은 사람은 쥐스마이어가 아니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죽고 16일이 지난 1791년 12월 21일, 요제프 아이블러가 콘스탄체 앞에서 서약합니다. "고인이 된 남편이 시작한 진혼 미사를 완성하여 다가오는 사순절 중간까지 끝내겠다." 아이블러는 모차르트가 아끼던 제자였고, 뒷날 빈 궁정악장에 오르는 유능한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모차르트의 작업 악보를 그대로 받아 빈 오선에 직접 관현악을 채워 나갔습니다. 디에스 이레에서 시작해 렉스 트레멘다이, 레코르다레를 지나 콘푸타티스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라크리모사에 이르러 소프라노 성부 두 마디, 9마디와 10마디를 적은 뒤 펜을 놓았습니다. 그는 다시는 이 악보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멈춘 자리는 우연이 아닙니다. 비평판 보고는 이 지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이블러의 작업은 관현악을 보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성악 총보 전체를 이어서 작곡해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끊긴다는 것입니다. 8마디까지는 모차르트의 노래가 있으니 색을 입히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9마디부터는 모차르트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다음 음을 정하는 사람이 곧 작곡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편곡과 작곡의 경계가 정확히 거기에 있었고, 아이블러는 그 선 앞에서 멈춘 것입니다.
그가 남긴 관현악은 지금도 작업 악보 위에 그대로 남아 있지만, 우리가 보통 듣는 연주에는 쓰이지 않습니다. 쥐스마이어가 그 작업을 이어받지 않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블러는 라크리모사와 봉헌송 부분의 원고를 자기 손에 남겨 두었고, 그 첫 장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원고. 내가 죽은 뒤 궁정도서관에 물려준다." 183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그는 유언을 기다리지 않고 그 악보를 도서관에 넘겼습니다.
쥐스마이어가 자기 작품이라고 밝힌 곡은 셋뿐입니다
쥐스마이어는 8년 동안 이 일에 대해 침묵했습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1800년,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이 〈레퀴엠〉을 인쇄하려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몫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상투스와 베네딕투스와 아뉴스 데이는 "전적으로 새로 만든 것"이며, 다만 "작품에 통일성을 더 주기 위해" 키리에의 푸가를 마지막 쿰 상티스 대목에서 되풀이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주 뭉뚱그려지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자기 작곡이라고 이름을 대며 밝힌 것은 세 곡뿐입니다. 라크리모사 9마디부터의 그 유명한 마무리를 두고는 편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의 저자성은 쥐스마이어의 진술이 아니라 자필 악보의 기입 범위가 알려 주는 것입니다. 모차르트의 필적이 8마디에서 끊겨 있으므로 그 뒤는 그의 것이 아니라는, 문서가 아니라 종이가 하는 증언입니다.
그렇다면 쥐스마이어는 정말 아무 재료도 없이 세 곡을 지어냈을까요. 여기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1826년, 콘스탄체의 조언자였던 막시밀리안 슈타틀러가 이런 증언을 남깁니다. 모차르트가 죽은 뒤 그의 책상 위에서 "음악이 적힌 쪽지 몇 장"이 발견되었고 콘스탄체가 그것을 쥐스마이어에게 건넸는데,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도 그가 그것을 어떻게 썼는지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증언에는 방증이 있습니다. 같은 해 미완성으로 남은 호른 협주곡의 경우, 쥐스마이어는 실제로 모차르트가 남긴 단편을 가져다 자기 판본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그 쪽지들이 〈레퀴엠〉의 것이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한 가지 더. 오랫동안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의 원고를 독차지했다고 여겨졌지만, 콘스탄체가 1802년 6월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는 다른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쥐스마이어는 참 신실하게도 얼마 전 뜻밖에 그것을 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 원고는 콘푸타티스 끝까지입니다."
아멘 스케치 한 장이 네 개의 다른 결말을 만들었습니다
1962년, 모차르트 연구자 볼프강 플라트가 베를린 국립도서관에 있던 낱장 스케치 한 장을 판독합니다. 낱장 한쪽 면에 〈마술피리〉 서곡의 짧은 스케치가 적혀 있고, 그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곡의 스케치가 있고, 그리고 d단조로 된 네 성부 푸가 열여섯 마디가 있습니다. 소프라노와 알토 아래에는 가사가 한 단어만 붙어 있습니다. Amen.
이 열여섯 마디가 무엇인지에 대해 비평판 보고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한 근거를 들어 말합니다. 이것은 세쿠엔치아를 닫기 위해 계획되었으나 실행되지 않은 아멘 푸가의 첫머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근거는 형식입니다. 〈레퀴엠〉의 큰 단락들은 예외 없이 푸가로 닫힙니다. 첫 부분은 키리에 푸가로 닫히고, 봉헌송의 두 곡은 각각 콰암 올림 푸가로 닫힙니다. 그 규칙대로라면 세쿠엔치아도 푸가로 닫혀야 했고, 세쿠엔치아의 마지막 곡이 라크리모사입니다. 다만 유보도 함께 적혀 있습니다. 작업 악보 어디에도 이 스케치에 대응하는 기입은 없습니다.
쥐스마이어는 이 스케치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보고도 버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라크리모사는 30마디에서 "아멘" 두 음절의 짧은 종지로 끝납니다. 우리가 200년 넘게 들어온 결말입니다.
플라트의 판독 이후, 새 완성본을 만든 편집자들은 각자 다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프란츠 바이어는 1971년 판본에서 관현악만 손보고 아멘 푸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리처드 몬더는 1988년에 79마디짜리 이중 푸가를 썼습니다. 로버트 레빈은 1996년 판본에서 88마디, 미하엘 오스트지가는 2022년에 90마디, 하워드 아르만은 2024년에 79마디를 썼습니다. 라크리모사를 어디서부터 자기 음악으로 대체할 것인지도 각자 다릅니다. 몬더는 9마디부터 새로 썼고, 레빈은 쥐스마이어의 진행을 24마디까지 남긴 뒤 네 마디의 종지로 푸가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판본들은 잃어버린 모차르트를 복원한 것이 아닙니다. 스케치 열여섯 마디에서 79마디나 90마디를 끌어낸 것은 편집자 자신입니다. 다만 그 선택의 근거로 남아 있는 종이 한 장과 작품 자체의 형식 규칙이 있다는 점이 쥐스마이어의 종지와 다릅니다.
판본이 달라지면 실제로 무엇이 들리는가
여기까지가 종이의 이야기라면, 이제 귀로 확인할 차례입니다. 다음에 〈레퀴엠〉을 틀 때 네 군데를 따라가 보시면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소리로 잡힙니다.
첫째, 2곡 키리에 푸가에서 관현악이 무엇을 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현악과 목관은 새로운 선율을 연주하지 않고 합창 네 성부를 그대로 겹쳐 갑니다. 성악과 같은 음을 악기가 함께 가는 이 방식을 콜라 파르테라고 부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겹쳐 가는 성부를 종이에 옮겨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필적 조사로 확인된 것은 두 사람이 나누어 썼다는 것뿐입니다. 한 사람이 현악과 관악을, 다른 한 사람이 트럼펫과 팀파니를 적었습니다. 한때는 모차르트의 제자 프라이슈테틀러가 지목되었지만 필적 대조로 배제되었습니다. 더 눈여겨볼 것은 시점입니다. 이 보필은 1791년 12월 10일 이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날 빈의 미하엘 교회에서 모차르트 자신의 진혼 미사가 열렸고, 여러 정황 증거는 그 자리에서 이 곡의 첫 부분이 울렸음을 가리킵니다. 즉 키리에의 관현악은 작품을 완성하려고 쓴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장례식에서 그 곡을 연주하려고 채워 넣은 것입니다.
둘째, 3곡 투바 미룸이 시작되고 트롬본 독주가 언제 멈추는지 들어 보십시오. 모차르트는 이 곡의 첫머리에 악기를 직접 적어 넣었습니다. 트롬본 독주, 베이스 독주, 베이스.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을 트롬본에 맡긴 것은 모차르트 본인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 트롬본 선율은 얼마 가지 않아 자필보에서 끊깁니다. 쥐스마이어는 그 뒤를 이어 썼고, 오늘날의 비평판들은 다섯 종이 모두 18마디부터 트롬본을 쓰지 않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1800년 초판입니다. 세상이 100년 넘게 알고 있던 그 악보에서는 트롬본 독주가 5마디 만에 파곳으로 넘어갑니다. 비평판 보고는 이것을 필사자가 페이지를 넘기다 한 줄 위의 파곳 칸으로 잘못 들어간 실수로 봅니다. 반면 노바크는 의도적인 편성 조치로 보아 초판 제작에 관여한 힐러에게 돌리고, 그 이유로 초판을 "약간 흐려진 자료"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같은 악보에서 나온 두 판본이 같은 자리를 서로 다른 악기로 울립니다. 판본 차이는 트롬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곡에 바셋호른이 들어오는 자리도 갈립니다. 통용판에서는 51마디에서 들어오는데, 바이어와 레빈과 오스트지가는 40마디로, 아르만은 13마디로, 몬더는 3마디까지 앞당깁니다. 따라 들으면 목관의 어두운 색이 언제부터 아래에 깔리기 시작하는지가 판본마다 다르게 잡힙니다.
셋째, 8곡 라크리모사에서 8마디와 9마디 사이를 들어 보십시오. 합창이 조용히 오르며 "그날은 눈물의 날"을 노래하다가 한 번 크게 부풀어 오르는 그 지점입니다. 거기까지가 모차르트가 종이에 옮긴 전부입니다. 그 다음 마디부터는 누가 완성했느냐에 따라 음악이 갈라집니다. 쥐스마이어의 판본이라면 30마디에서 짧은 아멘으로 닫히고, 몬더나 레빈이나 오스트지가나 아르만의 판본이라면 거기서 80마디 안팎의 아멘 이중 푸가가 새로 일어섭니다. 같은 곡의 같은 자리입니다.
넷째, 전곡의 마지막 코무니오를 들으면서 첫 곡을 떠올려 보십시오. 마지막 두 대목인 룩스 아이테르나와 쿰 상티스 투이스에서 울리는 음악은 새로 쓴 것이 아니라 1곡 인트로이투스와 2곡 키리에 푸가의 음악을 그대로 되가져온 것입니다. 쥐스마이어가 밝힌 이유는 "작품에 통일성을 더 주기 위해"였고, 그는 이것이 모차르트의 구두 지시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을 확인해 줄 문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효과 자체는 문서와 무관하게 실재합니다. 처음에 들었던 소리가 끝에서 되돌아오면 전곡이 하나의 아치로 닫히고, 시작과 끝이 같은 음악이니 이 곡은 죽음에서 출발해 죽음으로 돌아오는 원형이 됩니다. 〈레퀴엠〉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조적 효과 하나가, 확인 가능한 범위에서는 모차르트가 아니라 그의 스물다섯 살 조수의 판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네 지점을 알고 다시 들으면 〈레퀴엠〉은 한 사람의 유작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이 겹쳐 있는 물건으로 들립니다. 그렇다고 이 곡이 덜 모차르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손을 댄 구간에서는 노래와 베이스와 화음이 그의 것이었으니, 그 구간의 뼈대는 그의 설계 그대로입니다. 다만 우리가 매번 감탄해 온 그 울림의 상당 부분은, 스승의 미완성 원고 앞에 앉아 다음 음을 정해야 했던 사람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작업 악보의 마지막 장에 적힌 것이 새로운 악상이 아니라 앞의 것을 여기서 다시라는 반복 표시라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 어울리는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리고 그 지시가 적힌 종이의 모서리는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가 한 음을 바꾼 다른 사례가 궁금하시다면 K.331 터키 행진곡 이야기를, 그의 삶 전체를 따라가고 싶으시다면 모차르트의 생애와 작품을 함께 보시면 좋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모차르트 레퀴엠은 몇 퍼센트가 모차르트인가요?
기준을 정하지 않으면 퍼센트로 답할 수 없습니다. 관현악까지 그가 직접 완성한 곡은 첫 곡 하나뿐이고, 노래와 베이스와 화음을 기준으로 하면 열네 대목 중 열 대목이 그의 것입니다. 어느 기준으로도 그의 것이 아닌 부분은 상투스와 베네딕투스와 아뉴스 데이, 그리고 라크리모사의 뒷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완성도를 재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층위를 보느냐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Q. 쥐스마이어 판 말고 다른 판본으로 들어도 되나요?
됩니다. 다만 무엇이 달라지는지 알고 고르는 편이 낫습니다. 바이어 판은 쥐스마이어의 구성을 그대로 두고 관현악만 다듬으므로 익숙한 소리에 가장 가깝습니다. 몬더와 레빈과 오스트지가와 아르만의 판본은 라크리모사 뒤에 아멘 푸가가 새로 붙기 때문에 전체 인상이 크게 달라집니다. 처음 듣는 분이라면 쥐스마이어 판으로 곡을 익힌 뒤 아멘 푸가가 있는 판본을 들어 보시는 순서를 권합니다.
Q.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이 레퀴엠을 주문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주문한 사람의 정체는 밝혀져 있습니다. 프란츠 안톤 폰 발제크 슈투파흐 백작이 죽은 아내를 위해 위촉했고 보수는 50두카트였습니다. 그가 대리인을 내세워 익명으로 주문한 것은 자기 이름으로 연주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다는 식의 서술은 후대에 덧붙은 각색입니다.
Q. 모차르트가 마지막으로 쓴 음악은 라크리모사인가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작업 악보에서 그의 필적이 도중에 끊기는 곳은 라크리모사 8마디가 맞지만, 봉헌송의 두 곡은 그보다 뒤에 놓이면서도 끝까지 적혀 있습니다. 그가 어떤 순서로 작업했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 마지막이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남아 있는 작업 악보에서 그의 필적이 놓인 마지막 자리는 봉헌송 마지막 장 여백의 반복 지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