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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사테 '치고이너바이젠' : 집시의 영혼과 훔친 멜로디의 비밀

  세상에서 가장 애절하면서도 화려한 바이올린 곡을 꼽으라면 어떤 곡이 떠오르시나요?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파블로 데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Zigeunerweisen)'을 언급할 겁니다. 제목은 모르더라도 “아, 이 곡이구나~”라고 반응하게 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선율이죠.

  오늘은 바이올린의 아름답고 놀라운 기교는 물론, 그 안에 담긴 우수와 열정이 어우러진 명곡, '치고이너바이젠'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 '집시의 노래', 그 슬픈 아름다움

  ‘치고이너(Zigeuner)’란 집시를, ‘바이젠(weisen)’이란 선율을 의미합니다. 말 그대로 '집시의 노래'인 셈입니다.

  인도 북서부에서 시작해 세상을 떠돌아야 했던 집시(Romani). 오랜 세월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아온 그들은 자신들의 설움과 한, 그리고 삶의 뜨거운 열정을 음악에 녹여냈습니다. 느릴 때는 한없이 서정적이고 애절하다가도, 빠를 때는 모든 것을 불태울 듯 격정적인 집시 음악의 특징은 한국인의 정서와도 깊이 맞닿아 있어 유독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라사테는 바로 이 집시 음악의 영혼을 바이올린의 현 위에 완벽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2. 파블로 데 사라사테, 천재인가, 노력인가?

  이토록 악마적인 기교와 깊은 감성을 요구하는 곡을 쓴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스페인 팜플로나 출신의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10세에 이사벨라 여왕 앞에서 연주하고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선물 받았을 정도였죠. 그는 화려한 스타일의 연주로 파가니니를 계승하는 '비르투오소(Virtuoso, 명연주가)'로 평가받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천재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37년간 하루 14시간씩 바이올린을 연습해 왔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그에게 곡을 헌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라사테 자신도 그의 현란한 기교를 뽐내기 위한 곡들을 썼는데, 그중 가장 위대한 걸작이 바로 '치고이너바이젠'입니다.


파블로 데 사라사테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
사라사테의 모습


3. 작품의 탄생과 역사적인 초연

  '치고이너바이젠'은 오늘날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판본, 그리고 작곡가 자신이 직접 편곡한 바이올린과 피아노 판본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집니다. 뉴욕 공립도서관에 소장된 자필 악보와 기록에 따르면, 이 곡은 1878년 1월 31일, 라이프치히의 센프(Bartholf Senff) 출판사에 800마르크를 받고 판매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초연은 1878년,  라이프치히에서 사라사테 자신의 연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압도적인 기교와 작품의 강렬한 매력은 초연 당시부터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고, 이후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가며 바이올린 레퍼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곡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4. 단 10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감정의 파노라마

  '치고이너바이젠'은 약 10분 남짓한 단일 악장 곡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담겨 있습니다. 크게 4개의 부분으로 나뉘며, 숨 쉴 틈 없이 변화무쌍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제1부: Moderato (모데라토 - 보통 빠르기로)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서주에 이어, 바이올린이 마치 나른한 독백을 하듯 영웅적이면서도 극적인 분위기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2부: Lento (렌토 - 매우 느리게)
  분위기가 급변하며, 바이올린은 가슴을 파고드는 애절한 선율을 토해냅니다. 즉흥적인 느낌이 강하며,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멜로디입니다.

제3부: Un poco più lento (운 포코 피우 렌토 - 조금 더 느리게) - 숨겨진 이야기
  앞선 비통함에서 벗어나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멜로디가 연주됩니다. 그런데 이 선율은 집시 민요가 아니라, 당시 헝가리 최고의 히트곡이었습니다.
- 원곡의 비밀 : 헝가리 문화 매거진 Fidelio에 따르면, 사라사테는 부다페스트 방문 당시 작곡가 센티르마이 엘레메르의 <Csak egy szép lány van a világon>('세상에는 오직 한 명의 아름다운 소녀가 있을 뿐')을 듣고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이 선율을 거의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포함시켰습니다.
- 작곡가의 양심 : 흥미롭게도, 사라사테가 직접 연주한 1904년 녹음에서는 이 3부가 생략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유명 멜로디를 허락 없이 사용한 것에 대해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즉흥적으로 건너뛰었을 것이라는 분석에 설득력을 더해줍니다.

제4부: Allegro molto vivace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 - 매우 빠르고 활기차게) - 차르다시(Csárdás)
  이 곡의 열광적인 피날레는 헝가리의 민속 춤곡인 '차르다시' 형식입니다. 느리고 애절한 전반부('라수')가 끝나고, 모든 것을 불태울 듯 격정적인 후반부('프리슈')가 휘몰아칩니다. 눈으로 좇기 힘든 속주와 스피카토, 더블 스톱, 왼손 피치카토 등 바이올린의 모든 현란한 기교가 폭발하며 장대한 막을 내립니다.

5. 시대를 초월한 명연주 감상하기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감상이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연주를 링크합니다.

▶ 야샤 하이페츠 (Jascha Heifetz):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불꽃처럼 뜨거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기교가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 보세요.


▶ 한수진 (Sujin Han): 따뜻한 감성으로 재해석한 명연
  따뜻한 음색과 깊은 감성으로 주목받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의 연주입니다. 같은 곡이 연주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지 비교하며 감상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치고이너바이젠'은 단순한 바이올린 연주곡이 아닙니다. 한 민족의 슬픈 역사, 삶의 뜨거운 열정, 그리고 인간 감정의 모든 스펙트럼이 녹아 있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오늘 당신의 가슴을 뜨겁게 울릴 음악이 필요하다면, 사라사테가 바이올린 현 위에 새겨놓은 집시의 영혼을 직접 느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