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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악장별 해설과 짐머만 연주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그의 가장 장대하고 영웅적인 이 걸작을 폴란드 태생의 거장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피아노, 그리고 사이먼 래틀 경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만나봅니다.


피아노 협주곡 5번 Op.73 “황제 (Emperor)”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인 '황제'는 그의 창작 인생이 절정에 달했던 '영웅적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입니다. 장대함과 화려함, 깊은 서정성을 모두 갖춘 이 작품의 탄생 배경부터 음악적 특징까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작곡 시기 및 배경: 포화와 궁핍 속에서 터져 나온 저항의 외침

  '황제' 협주곡은 1809년에 시작되어 1810년 2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시기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1809년 5월, 나폴레옹 군대는 빈을 점령하고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는 베토벤이 형 카스파르의 집 지하실로 피신해 "귀를 베개로 덮고" 포격 소리를 피해야만 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미 악화된 청력을 보호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초연과 '황제'라는 별칭

  안타깝게도 베토벤은 악화된 청력 때문에 이 곡의 초연에 직접 피아니스트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공식 초연은 1811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의 피아노 연주로 이루어졌고, 빈 초연은 1812년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가 맡았습니다. '황제'라는 별칭은 베토벤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출판업자나 그의 친구였던 요한 밥티스트 크라머(Johann Baptist Cramer)에 의해 붙여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곡의 장엄하고 압도적인 분위기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음악사적 의의: 협주곡의 새로운 시대를 열다

  '황제' 협주곡은 고전주의 협주곡의 형식을 뛰어넘어 낭만주의 시대의 문을 연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대결하는 구조를 넘어, 동등한 파트너로서 함께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가는 '교향악적 협주곡'의 개념을 완성했으며, 연주자의 즉흥성에 맡겨졌던 카덴차를 직접 작곡하여 작품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작곡가의 의도를 명확히 했습니다.

각 악장별 해설

1악장 (Allegro): 협력의 미학
 거의 600마디에 달하는 거대한 '교향악적' 악장입니다. 오케스트라의 군악풍 주제에 대해 피아노는 “dolce, leggiermente, cantabile (부드럽게, 가볍게, 노래하듯이)”라는 정반대의 감성으로 응답합니다. 이는 대립이 아닌 협력의 미학을 보여주는 혁신적인 접근으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전체 음악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갑니다.

2악장 (Adagio un poco mosso): 비현실적인 평화의 꿈
  현실과 단절된 듯한 B장조의 이 악장은 마치 ‘평화의 꿈’과 같습니다. 그 빛나는 아름다움은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며, 전쟁의 참화 속에서 베토벤이 갈망했던 평온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이 "신에 대한 경배"라고 표현했을 만큼 깊은 서정성을 담고 있습니다.

3악장 (Rondo. Allegro): 낙관의 폭발
  고요한 2악장이 끝나갈 무렵, 피아노가 꿈속을 헤매듯 화음을 더듬거리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3악장 론도 주제가 폭발하듯 터져 나옵니다. 이는 2악장의 꿈이 행동과 춤, 그리고 삶의 에너지로 전환되는 극적인 순간이자, 베토벤의 꺾이지 않는 ‘낙관’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지점입니다. 1809년 말 프랑스군은 결국 빈에서 철수했지만, 시대를 이겨낸 베토벤의 위대한 예술적 ‘대항 설계도’는 오늘날까지 우리 곁에 생생히 남아 빛나고 있습니다.


번스타인 지휘, 크리스티안 짐머만 피아노 연주의 CD 앞표지를 보여주는 이미지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크리스티안 짐머만 피아노 (빈 필, 1989)



크리스티안 짐머만 (Krystian Zimerman, 1956년생)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은 1975년, 불과 19세의 나이로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쇼팽 음악의 최고 해석가로 꼽히는 그는 수려한 외모와 깊이 있는 음악성으로 '현대의 쇼팽'이라 불립니다.

  짐머만은 한국과의 인연도 깊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으며, 2015년 제17회 쇼팽 콩쿠르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그는 조성진의 결선 연주 직후 정경화에게 "대체 이 친구가 누구야? 금메달감이네!(This is gold!)"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 그의 우승을 예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짐머만을 존경하는 것은 그의 음악성뿐만 아니라, 완벽을 향한 그의 집요한 자세 때문입니다. 그는 완성도 높은 연주를 위해 연간 연주 횟수를 50회 이내로 엄격히 제한하며, 연주회장에는 자신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직접 운반하고 조립, 조율까지 도맡아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에 그의 음반은 비록 많지 않지만, 내놓는 앨범마다 명반의 반열에 오르며 음악 애호가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1989년 레너드 번스타인과 녹음한 젊은 시절의 음반과 비교해보면, 지휘자와 불꽃 튀는 대결이었던 것에서 모든 음표가 세심하게 통제된,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의 완벽한 파트너십을 보여줍니다. 또한 젊은 짐머만이 영웅적인 '황제'를 연기했다면, 원숙한 짐머만은 황제의 고뇌와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2악장의 깊고 명상적인 서정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주며, 3악장에서는 무조건적인 환희를 넘어, 모든 것을 겪어낸 후 도달한 숭고한 기쁨을 표현합니다.


함께 들어볼 만한 명반들

  '황제' 협주곡은 수많은 명연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몇 가지를 추천해 드립니다.

  • 빌헬름 켐프 / 페르디난트 라이트너 (베를린 필, 1961): 가장 표준적이면서도 품격 있는 '황제'의 교과서로 꼽히는 연주입니다.
  • 에밀 길렐스 / 조지 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1968): '강철 같은 타건'으로 불리는 길렐스의 압도적인 힘과 정교함을 느낄 수 있는 명연입니다.
  • 크리스티안 짐머만 / 레너드 번스타인 (빈 필, 1989): 젊은 짐머만의 불꽃같은 에너지와 번스타인의 카리스마가 만나 탄생한 전설적인 명반이죠.

  이 모든 훌륭한 음반들 사이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고 이 포스팅을 쓰게 만든 연주가 바로 오늘 소개해 드리는 크리스티안 짐머만과 사이먼 래틀 경의 최신 실황입니다. 거장의 원숙함과 현대적인 감각이 빛나는 이 연주는 '황제'가 지닌 장대함과 내밀한 서정성을 남김없이 펼쳐 보입니다. 아래 영상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