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 these first

Latest on the blog

차이콥스키 '1812 서곡' "쓰기 싫었던 곡이 걸작으로?"(작곡 배경, 대포 소리, 흥미로운 사실까지)

  차이콥스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곡 요청 때문에 '1812 서곡'(Overture 1812, Op. 49)을 작곡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곡은 그의 생각과 달리 큰 성공을 거두게 되어, 오늘날 세계 클래식 음악의 레퍼토리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강력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이 곡은 단순한 관현악곡을 넘어, 역사적 사건을 소리로 그려낸 웅장한 파노라마이자, 한 국가의 정신을 담아낸 음향 드라마입니다.


작곡 배경 📜

  이 곡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연도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침공을 격퇴하며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해가 1812년, 차이콥스키가 이 곡을 작곡한 해가 1880년, 그리고 마침내 초연된 해가 1882년입니다.

  1880년 가을,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는 카멘카에서 니콜라이 루빈슈테인으로부터 모스크바의 국가적 대행사를 위한 ‘의례적’ 작품 의뢰를 받습니다. 이 행사는 전러시아 산업·미술 박람회와,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의 축성식을 겸하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이 성당은 바로 알렉산드르 1세가 1812년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짓기 시작한, 그 자체로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이러한 ‘의뢰 작품’ 또는 ‘기념·의례용 작곡’에 대해 깊은 예술적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는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복잡한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저는 어떤 축제를 위해서 작곡한다는 것처럼 불쾌한 것이 없습니다. 박람회 개장 때 연주된다면 당연히 극히 평범하거나 아니면 아주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이어야 일반인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내키지 않지만 작곡은 해야 합니다.”

  성격이 예민했던 차이콥스키는 자기 작품에 매우 엄격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작곡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슴없이 폐기해 버리곤 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 역시 “애정 어린 열정 없이 썼다”고 토로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거대한 곡을 쓰는 동시에 그의 가장 내밀하고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인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함께 작곡하고 있었습니다.


음악 해설 및 특징 🎶

  ‘1812 서곡’은 소나타 형식을 바탕으로 한 장엄한 서곡이자, 소리로 그린 '전투 그림' 또는 '음향 드라마'입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입니다. 일반적인 악기 구성 외에, 이 곡의 음향적 시그니처가 되는 대형 종, 실제 포성 효과, 그리고 군악대가 동원되기도 합니다. 차이콥스키는 특히 종에 대해서 "축일의 퍼레이드 벨 소리를 모사하라"는 구체적인 주석을 직접 달았고, 실제 포를 발사하는 것은 후대의 연주 관습입니다.

  • 서주 (Largo): 곡은 러시아 정교회 성가인 ‘주여, 주의 백성을 구하소서’가 장중하고 경건하게 시작됩니다. 이는 평화롭지만 굳건한 러시아의 영혼과 신앙심, 그리고 다가올 국난 앞에서 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국민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 제시부 (Allegro giusto):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며, 두 국가를 상징하는 주제 선율이 격렬하게 교전합니다. 침략군인 프랑스를 상징하는 ‘라 마르세예즈’가 위협적으로 등장하는 것에 맞서, 러시아 민중의 힘을 상징하는 민요 ‘문 앞에서, 아버지의 문 앞에서’가 등장하여 치열하게 대립합니다.
  • 재현부 및 코다 (Coda): 전투가 절정에 달하며 두 주제의 대립은 극에 달합니다. 마침내 코다에서 ‘라 마르세예즈’는 힘을 잃고 산산이 조각나며 완전히 압도됩니다. 이때 서주의 기도 선율이 모든 악기를 통해 장엄하게 다시 울려 퍼지고, 축제의 종소리와 16발의 대포 소리가 승리를 선언합니다. 마지막은 제정 러시아의 국가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가 웅장하게 연주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초연과 반응 👏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을 보여주는 이미지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

  작품의 초연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1881년 3월 알렉산드르 2세 암살로 국가 애도가 선포되며 전러시아 산업·미술 박람회는 1882년으로,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 봉헌은 1883년 5월 26일로 미뤄졌습니다. 이로써 차이콥스키의 야외 대규모 초연 구상도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초연은 1년 뒤인 1882년 8월 20일, 박람회장의 실내 연주회장에서 다소 평범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작곡가의 걱정과 달리, 초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대중과 비평 모두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습니다. 애국적인 주제와 압도적인 음향 효과는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이 성공으로 차이콥스키는 성 블라디미르 훈장 4등급과 황실 연금을 수여받았습니다.


흥미로운 사실들

  • ‘시대착오적’ 상징 : 곡에 사용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와 러시아 국가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는 사실 1812년 당시의 공식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역사적 정확성보다는 작곡 당시(1880년) 청중이 즉시 알아들을 수 있는 상징적인 곡을 선택해 극적인 효과를 의도적으로 높였습니다.
  • 소비에트 시대의 개작 : 제정 러시아 국가 문제로, 소비에트 시기에는 마지막 부분이 글린카의 오페라 합창곡 “영광” 선율로 대체되어 연주되었습니다.
  • 오디오마니아의 성배 : 이 곡을 레코딩한 음반 중에는 실제 대포를 동원한 버전들이 있습니다. 이 음반들은 오디오 시스템의 성능, 특히 저음 재생 능력을 시험하는 척도로 사용되면서 전 세계 오디오마니아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대포를 사용한 머큐리의 음반 표지를 보여주는 이미지
실제 대포 소리를 녹음한 것으로 유명한 머큐리 레이블의 음반

미국의 독립기념일 레퍼토리 :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승리를 기념하는 이 곡은 미국에서 매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전통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후대의 평가와 교훈 🌟

  이 곡을 순수 예술 음악이라기보다는, 음향 효과와 애국적 메시지를 극대화한 '프로그램 음악'의 전형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작품이 다소 과장되고 통속적이라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와 무관하게, 이 작품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 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히 축제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애국심을 고취할 때 자주 연주됩니다.

  이렇게 작곡가 자신에게는 애정이 없던 곡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랑받는 걸작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초연의 엄청난 성공 이후, 차이콥스키 자신도 이 곡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직접 지휘하는 레퍼토리에 자주 포함시켰습니다. 그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많이(무려 13회) 직접 지휘한 작품이 되었지요.  이 곡을 통해 우리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추천 음반 및 감상 💿

  이 곡의 앞부분, 즉 서주 부분은 합창이 포함된 버전으로 감상하면 그 경건함이 배가 됩니다. 러시아 정교회 성가 '주님,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소서'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전설적인 지휘자 유진 오만디(Eugene Ormandy)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합창 버전은 이 곡의 장엄함과 경건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명반으로 손꼽힙니다. 아래 영상으로 직접 감상해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