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가 ‘가곡의 왕’이라 불리지만, 슈만 역시 가곡이라는 장르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작곡가입니다. 특히 그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 Dichterliebe>은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명곡으로, 그 안에는 한 편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1. 법정에 선 사랑, 그 절박함이 낳은 '노래의 해'
독일 작센에서 태어난 로베르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겸비한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였습니다.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연습 중 손가락 부상으로 그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대신 자신의 스승 프리드리히 비크(Johann Gottlob Friedrich Wieck, 1785-1873)의 딸이자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Clara Schumann, née Wieck, 1819-1896)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거대한 벽에 부딪혔습니다. 바로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의 극렬한 반대였습니다. 그는 슈만이 자신의 딸의 앞길을 막을 것이라 여겨 온갖 방법으로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결국 슈만은 사랑을 얻기 위해 스승을 상대로 결혼 승낙 소송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법정 투쟁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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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고난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은 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 (출처 : berliner-philharmoniker) |
이 길고 고통스러운 싸움이 절정에 달했던 1840년. 놀랍게도 슈만의 창작열은 화산처럼 폭발합니다. 한 해 동안 무려 140여 곡의 가곡을 쏟아내며 훗날 ‘가곡의 해(Liederjahr)’라 불리게 된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시인의 사랑> 역시 단 일주일 남짓에(1840년 5월 24일–6월 1일) 완성된, 바로 그 절박하고 뜨거운 사랑의 산물이었습니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노래를 만드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꾀꼬리처럼 노래하다 죽을 것 같습니다. 당신 같은 연인이 없었다면 이런 음악을 도저히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2. 가사는 '봄, 사랑', 음악은 '불안'... 슈만의 반전 스릴러
<시인의 사랑>은 하인리히 하이네(Christian Johann Heinrich Heine, 1797-1856)의 시집 <노래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이네 역시 사촌 아멜리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시에 담았으니, 슈만은 하이네의 시어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지요.
그중 첫 번째 곡 '아름다운 5월에(Im wunderschönen Monat Mai)'는 이 연가곡 전체의 성격을 암시하는, 가장 정교하고 소름 돋는 '음악적 복선'입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났을 때
내 마음속에도
사랑의 꽃이 피어났네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나도 그녀에게 고백했네
나의 간절함과 소원을
가사만 보면 더없이 평화롭고 희망찬 사랑 노래입니다. 하지만 그 음악적 구조를 깊이 들여다보면, 슈만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 '구조적 아이러니(Structural Irony)'를 설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음악은 처음부터 안정된 조성 없이, 희망을 상징하는 A장조와 내면의 불안을 암시하는 F♯단조 사이를 끊임없이 부유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조성적 쌍(Tonal Pairing)'이라 부르며, 화자의 외면과 내면이 서로 경쟁하는 심리적 분열 상태를 그렸다고 분석합니다. 이 '조성의 부유(tonale Schwebe)'은 듣는 이마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특히 피아노는 단순한 반주를 넘어, 화자의 '심리적 분신(double psychologique)' 역할을 합니다. 섬세하게 흩어지는 피아노의 아르페지오는 5월의 자연이 내는 소리인 동시에, 사랑에 빠진 심장의 미세한 '떨림' 또는 '전율(frémissement)'을 완벽하게 묘사합니다. 가수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le non-dit), 그 불안의 진실을 피아노가 대신 속삭이는 것입니다.
3.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미완성' 엔딩
이 곡의 백미는 단연 마지막입니다. "나의 간절함과 소원을 그녀에게 고백했네"라는 노래가 끝난 후, 피아노는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화음 대신, 불안하고 미해결된 화음을 허공에 툭 던져놓은 채 곡을 끝내버립니다.
이는 단순한 '답답한 엔딩'을 넘어, 슈만이 의도한 천재적인 예술적 장치입니다.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들은 완결된 작품보다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낭만적 단편(Romantic Fragment)'이야말로 더 깊은 진실을 담는다고 믿었습니다.
이 '열린 결말(open einde)'은 바로 그런 낭만적 단편의 음악적 구현입니다. 프랑스적 시각으로는 의도된 '미완성(inachèvement)'의 미학이며, 독일적 감성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동경(Sehnsucht)'과 '미해결(Unerlöstheit)' 상태의 완벽한 표현입니다. 이 불안한 침묵이야말로, 앞으로 펼쳐질 사랑의 비극을 암시하는 가장 강력한 예고편인 셈입니다.
감상하기
35세에 요절한 '미성의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의 목소리로 슈만의 이 애틋하고 불안한, 그리고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감상해 보시죠. 테너 김우경 님의 해석 또한 더없이 훌륭합니다.
프리츠 분덜리히 (Fritz Wunderlich) - 아름다운 5월에
테너 김우경 - 시인의 사랑 (1번~7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