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바토란 무엇인가, 쇼팽이 말한 루바토와 지금 우리가 듣는 루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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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바토(rubato)는 이탈리아어로 훔쳐진이라는 뜻입니다. 시간을 훔친다는 말입니다. 어디선가 시간을 조금 당겨 쓰고 다른 데서 갚아 주기도 하는 연주, 그것이 루바토입니다. 그런데 무엇에서 훔쳐 어디에 쓰느냐를 두고 쇼팽의 시대와 지금은 쓰는 비중과 관습이 서로 다릅니다.

1849년으로 전해지는 프레데리크 쇼팽의 사진
1849년으로 전해지는 쇼팽의 사진. 이 글에 나오는 증언들은 대부분 이 사진 이후, 즉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적혔습니다.

루바토란 무엇인가

루바토는 악보에 적힌 음의 길이를 연주자가 밀고 당기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훔친 박자입니다. 어떤 음을 제 길이보다 길게 끌면 그만큼 다른 음이 짧아지고, 그렇게 주고받는 사이에 선율이 말하듯 움직입니다.

훔친 시간을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현악과 함께 칠 때는 전체를 위해 되돌려 놓아야 하지만, 독주에서는 앞에서 줄인 만큼을 뒤에서 되찾지 못하는 일이 잦다고 파데레프스키는 적었습니다. 잃은 것은 잃은 채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바토에는 주고받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방식과 흐름 자체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방식이 함께 있습니다. 무엇이 흔들리고 무엇이 버티는가, 그것이 앞으로 나올 이야기의 축입니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의 초상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1909년 그는 왼손을 절대 고정으로 보는 통설을 쇼팽 자신의 악보를 들어 반박했습니다.

파데레프스키는 훔친 시간이라는 말보다 프랑스어 표현을 더 좋아한다고 썼습니다. 달아나는 움직임(mouvement dérobé), 즉 음표의 정해진 값에서 빠져나가 박자의 규율을 피해 가는 움직임이라는 뜻입니다.

쇼팽 이전의 루바토, 무엇이 흔들렸나

18세기에 널리 쓰이던 루바토는 선율 한 줄만 흔들고 반주는 그대로 두는 방식이었습니다.

모차르트가 1777년 10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다지오에서 템포 루바토를 할 때 왼손은 그것과 상관없이 제 박자대로 간다는 것을, 이곳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취지입니다. 그가 답답해한 대목은 다른 연주자들의 왼손이 오른손을 따라 함께 흔들린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루바토는 성악에서 온 것입니다. 반주는 박자를 지키고 노래하는 사람만 그 위를 자유롭게 오가는 방식, 오늘날 재즈 가수가 밴드 위에서 박을 밀고 당기는 것과 구조가 같습니다. 두 개의 시간이 동시에 흐르고, 그 어긋남 자체가 표정이 됩니다.

그러니 쇼팽 시대에 즐겨 쓰이던 루바토는 지금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루바토와 결이 다릅니다. 지금은 대개 곡 전체가 함께 느려졌다 빨라집니다. 그 시절에는 반주가 버티고 선율만 그 위에서 어긋나는 쪽이 흔했습니다. 같은 낱말이 가리키는 폭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것을 먼저 알아 두면, 다음 이야기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쇼팽의 루바토가 어떤 규칙으로 전해졌는지는 먼저 그를 겪은 사람들의 기록으로, 그다음에는 그의 악보로 확인합니다.

왼손은 지휘자다, 이 문장은 누가 언제 적었나

쇼팽의 루바토를 설명할 때 거의 반드시 따라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왼손은 지휘자이니 흔들려서는 안 되고, 오른손은 마음대로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활자로 남은 시점을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이 가르침의 출처는 쇼팽의 자필 기록이 아니라 제자와 지인이 나중에 남긴 회고입니다. 왼손은 지휘자라는 표현이 실린 것은 쇼팽을 곁에서 지켜본 빌헬름 폰 렌츠의 회상록으로, 1872년에 나왔습니다. 한 손은 엄격한 박자를 지키고 다른 손은 자유를 누린다고 정리한 제자 카롤 미쿨리의 전집 서문은 1879년에 나왔습니다. 쇼팽은 1849년에 죽었으니 각각 스물세 해와 서른 해가 지난 뒤의 기록입니다.

여기에 리스트가 남긴 비유가 겹칩니다. 그는 러시아 제자 네일리소프에게 나무를 가리키며, 바람이 잎을 흔들어 그 사이에 생기를 일으켜도 나무는 그대로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리스트 자신의 책이 아니라, 앞의 렌츠 회상록과 1888년에 나온 프레더릭 니크스의 쇼팽 전기에 그 제자의 전언으로 함께 실렸습니다. 전하는 문구가 자료마다 조금씩 달라 문장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림만 적습니다.

이 말이 회고라고 해서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사람이 비슷하게 기억했다는 점은 그 자체로 무게가 있습니다. 짚고 싶은 것은 다른 부분입니다. 우리가 쇼팽의 규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쇼팽이 적어 남긴 규정이 아니라, 그를 겪은 사람들이 세월이 지난 뒤 말로 옮긴 요약이라는 점입니다. 요약은 원래 단순해지는 쪽으로 기울고, 이 요약도 그렇게 단순해졌을 수 있습니다.

쇼팽 자신의 악보가 왼손 절대 고정을 반박하는 대목

이 규칙을 가장 세게 반박한 사람은 외부의 비판자가 아니라 그 시대 폴란드를 대표하던 쇼팽 연주자였습니다. 파데레프스키는 1909년 헨리 핑크의 책 『Success in Music and How it is Won』에 자기 이름으로 실린 루바토 장에서, 오른손은 자유롭게 치고 왼손은 지휘자처럼 박자를 지키라는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쇼팽 폴로네즈 작품 40의 2 다단조 악보 첫머리
쇼팽 〈폴로네즈 다단조 작품 40의 2〉. 왼손이 반주가 아니라 노래를 맡는 자리를 확인해 보십시오.

그의 반박이 강한 이유는 근거가 쇼팽의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올림다단조 연습곡, 전주곡 6번과 22번, 다단조 폴로네즈를 지목하면서, 이 곡들에서 왼손은 지휘자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프리마돈나 노릇을 한다고 적었습니다. 왼손이 노래를 맡은 곡에서까지 그 손에게 메트로놈이 되라고 요구하면 그 곡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감정은 규칙성을 배제한다고 썼습니다. 표정을 지시하는 말이 붙은 악보라면 연주자에게 그만큼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규칙을 반박하면서 다른 규칙을 세우지 않고,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자리를 곡으로 보여 준 셈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가 하고 묻고 싶어집니다. 적어도 그 규칙을 물려받은 계보의 연주와 쇼팽 자신의 악보에 관한 한, 왼손 절대 고정을 모든 곡에 적용되는 연주 규칙으로 읽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쇼팽이 박자에 엄격했다는 증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언을 손 하나를 못 박아 두라는 지시로 환원하는 순간, 쇼팽이 왼손에 노래를 준 곡들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왼손이 반주에 머무는 곡에서는 그 설명이 그대로 유효합니다. 실제로 미쿨리는 이것을 왼손과 오른손이 아니라 노래하는 손과 반주하는 손으로 갈라 적었습니다. 노래하는 손이 박에서 풀려나는 동안 반주하는 손이 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녹음이 남은 계보에서 실제로 들리는 것

다행히 이 문제는 짐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쇼팽에게 배운 제자에게 다시 배운 사람들의 연주가 녹음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녹음들은 쇼팽의 소리가 아니라 두 세대를 거친 해석이라는 것을 먼저 놓고 들어야 합니다.

코찰스키는 1892년부터 1895년까지 네 해 여름 동안 쇼팽의 제자 미쿨리에게 거의 매일 두 시간씩 배웠습니다. 로젠탈도 소년 시절 같은 스승에게 배웠습니다. 두 사람의 녹음이 남아 있으니, 규칙을 전한 바로 그 계보가 실제로 어떻게 쳤는지 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실제로 들리는 것은 왼손과 오른손이 딱 맞지 않는 연주입니다. 악보에는 동시에 치도록 적혀 있는 음을 살짝 떨어뜨려, 왼손이 먼저 짚고 오른손 선율이 조금 늦게 도착하도록 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그 시대의 표현 수단이었고, 19세기에 태어난 피아니스트들의 초기 녹음 다수에서 들립니다. 이 어긋남에는 따로 이름이 있습니다. 연구 문헌은 이것을 템포를 밀고 당기는 루바토와 구별해 어긋남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다룹니다. 나단조 전주곡 Op.28 No.6을 파흐만(Vladimir de Pachmann)의 1927년 녹음, 로젠탈의 1935년 녹음, 코찰스키의 1939년 녹음으로 이어 들으면 세 사람 모두에게서 이 어긋남이 확인됩니다. 다만 이 전주곡에서는 왼손이 노래를 맡습니다. 앞에서 파데레프스키가 왼손을 프리마돈나라고 부른 전주곡 6번이 바로 이 곡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먼저 짚는 손과 노래하는 손이 앞의 설명과 반대입니다.

가장 쉽게 들어 볼 곳은 널리 알려진 〈녹턴 내림마장조 Op.9 No.2〉입니다. 왼손이 한 박을 낮은 음 하나와 화음 둘로 짚어 가는 동안, 오른손 선율이 그 첫 박에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고 조금씩 늦게 얹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코찰스키가 남긴 녹음에서 이 어긋남이 뚜렷하게 들립니다. 같은 곡을 라흐마니노프가 1927년에 남긴 녹음과 이어서 들으면 두 사람이 어긋남을 쓰는 정도와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함께 잡힙니다.

여기서 앞의 규칙이 다시 보입니다. 왼손이 박자를 지킨다는 말은 왼손이 기계처럼 정확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른손이 어디까지 벗어나든 돌아올 자리를 왼손이 잡고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두 손이 어긋나 있는데도 곡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알고 들으면 어긋남이 흠이 아니라 표정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다만 어긋남이 들린다는 사실만으로 왼손이 박을 지켰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 녹음들이 보여 주는 인상이지 증명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듣는 루바토는 무엇이 달라졌나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두 손을 어긋나게 치는 연주는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지금 연주회장과 음반에서 듣는 루바토는 대개 양손이 함께 늦어졌다가 함께 돌아오는 방식입니다. 한 줄만 흔들리는 방식과 화면 전체가 늘어났다 줄어드는 방식은 예전에도 함께 있었고, 달라진 것은 어느 쪽을 더 자주 쓰는가입니다.

그래서 같은 낱말을 쓰면서도 듣는 것이 달라집니다. 옛 녹음에서 어긋남을 처음 들으면 박자가 맞지 않는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반대로 옛 방식에 익숙해진 귀에는 요즘의 정갈한 루바토가 밋밋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잘라 말하기보다, 두 방식이 서로 다른 시간 감각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듣는 편이 훨씬 많은 것을 들려줍니다.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남아 있는 녹음은 아무리 일러도 쇼팽이 죽고 여러 해가 지난 뒤의 것입니다. 코찰스키는 쇼팽에게 직접 배운 사람이 아니라 그 제자에게 배운 사람이고, 그 사이에도 취향은 변합니다. 녹음이 쇼팽의 연주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쇼팽의 소리가 아니라 쇼팽에게서 두 걸음 떨어진 소리입니다.

회고가 후대의 요약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여러 제자의 증언이 일관되게 왼손의 규칙성을 지지한다는 점도 함께 놓고 보아야 합니다. 녹음은 그 요약을 물려받은 손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보여 줄 뿐입니다. 오늘 〈녹턴 내림마장조〉를 라흐마니노프가 1927년에 남긴 녹음으로 한 번, 요즘 나온 음반으로 한 번 겹쳐 들어 보십시오. 왼손이 짚는 박과 오른손 선율이 도착하는 시점을 따로 떼어 들어 보면, 옛 녹음에서는 두 손이 완전히 겹치는 순간과 살짝 어긋나는 순간이 번갈아 지나갑니다. 그 어긋나는 자리가 바로 백 년 넘게 같은 이름 아래 쓰임의 무게가 옮겨 온 그 낱말이 실제로 앉아 있는 곳입니다.

이 글과 이어서 읽을 만한 다시채의 글로는, 이 글이 들어 보라고 지목한 곡을 다룬 쇼팽 녹턴 Op.9 No.2 완벽 해설, 그 규칙을 남긴 사람의 생애를 다룬 피아노의 시인 쇼팽, 전주곡을 한 곡 더 듣고 싶을 때 읽을 쇼팽 빗방울 전주곡, 이 소리를 낸 악기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보여 주는 피아노 역사와 종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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