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바토(rubato)는 이탈리아어로 훔쳤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훔친다는 말입니다. 어디선가 시간을 조금 당겨 쓰고 다른 데서 갚는 연주, 그것이 루바토입니다. 그런데 무엇에서 훔쳐 어디에 갚느냐를 두고 쇼팽의 시대와 지금이 서로 다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바토란 무엇인가
루바토는 악보에 적힌 음의 길이를 연주자가 밀고 당기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훔친 박자입니다. 어떤 음을 제 길이보다 길게 끌면 그만큼 다른 음이 짧아지고, 그렇게 주고받는 사이에 선율이 말하듯 움직입니다.
중요한 것은 훔친 시간을 갚느냐입니다. 갚으면 전체 흐름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갚지 않으면 그냥 느려진 것입니다. 느려지기만 하는 것은 리타르단도이지 루바토가 아닙니다. 이 구분이 앞으로 나올 이야기 전체의 축입니다.
파데레프스키는 훔친 시간이라는 말보다 프랑스어 표현을 더 좋아한다고 적었습니다. 달아나는 움직임(movement derobe), 즉 음표의 정해진 값에서 빠져나가 박자의 규율을 피해 가는 움직임이라는 뜻입니다. 훔친다는 말이 무언가를 없앤다는 인상을 준다면, 달아난다는 말은 잠시 벗어났다가 돌아온다는 인상을 줍니다. 루바토에 관한 한 뒤쪽이 실제에 가깝습니다.
쇼팽 이전의 루바토, 흔들린 것은 오른손뿐이었다
쇼팽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지점은 분명합니다. 18세기의 루바토에서 흔들리는 것은 선율 한 줄뿐이었고, 반주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가 1777년 10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다지오에서 템포 루바토를 할 때 왼손은 그것과 상관없이 제 박자대로 간다는 것을, 이곳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취지입니다. 그가 답답해한 대목은 다른 연주자들의 왼손이 오른손을 따라 함께 흔들린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루바토는 성악에서 온 것입니다. 반주는 박자를 지키고 노래하는 사람만 그 위를 자유롭게 오가는 방식, 오늘날 재즈 가수가 밴드 위에서 박을 밀고 당기는 것과 구조가 같습니다. 두 개의 시간이 동시에 흐르고, 그 어긋남 자체가 표정이 됩니다.
그러니 쇼팽 시대에 통용되던 루바토는 지금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루바토와 다릅니다. 지금은 대개 곡 전체가 함께 느려졌다 빨라집니다. 그때는 반주가 버티고 선율만 그 위에서 어긋났습니다. 같은 낱말이 가리키는 것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 두면, 다음 이야기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왼손은 지휘자다, 이 문장은 누가 언제 적었나
쇼팽의 루바토를 설명할 때 거의 반드시 따라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왼손은 지휘자이니 흔들려서는 안 되고, 오른손은 마음대로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활자로 남은 시점을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이 가르침의 출처는 쇼팽의 자필 기록이 아니라 제자와 지인이 나중에 남긴 회고입니다. 왼손은 지휘자라는 표현이 실린 지인의 회상록은 쇼팽이 세상을 떠나고 스무 해가 넘은 1872년에 나왔고, 한 손은 엄격한 박자를 지키고 다른 손은 자유를 누린다고 정리한 제자의 전집 서문은 1879년에 나왔습니다. 쇼팽은 1849년에 죽었으니 각각 삼십 년 안팎이 지난 뒤의 기록입니다.
여기에 리스트가 쇼팽이 죽고 삼 년 뒤에 낸 책에 실은 비유가 겹칩니다. 바람이 잎을 흔들지만 나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그림입니다. 다만 이 비유는 전하는 문구가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문장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림만 적습니다.
이 말이 회고라고 해서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사람이 비슷하게 기억했다는 점은 그 자체로 무게가 있습니다. 짚고 싶은 것은 다른 부분입니다. 우리가 쇼팽의 규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쇼팽이 적어 남긴 규정이 아니라, 그를 겪은 사람들이 세월이 지난 뒤 말로 옮긴 요약이라는 점입니다. 요약은 원래 단순해지는 쪽으로 기울고, 이 요약도 그렇게 단순해졌을 수 있습니다.
쇼팽 자신의 악보가 반박하는 대목
이 규칙을 가장 세게 반박한 사람은 외부의 비판자가 아니라 그 시대 최고의 폴란드 쇼팽 연주자였습니다. 파데레프스키는 1909년에 발표한 루바토에 관한 글에서, 오른손은 자유롭게 치고 왼손은 지휘자처럼 박자를 지키라는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그의 반박이 강한 이유는 근거가 쇼팽의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올림다단조 연습곡과 다단조 폴로네즈를 지목하면서, 이 곡들에서 왼손은 지휘자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프리마돈나 노릇을 한다고 적었습니다. 왼손이 노래를 맡고 있는데 그 손에게 메트로놈이 되라고 요구하면 곡 자체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감정은 규칙성을 배제한다고 썼습니다. 표정을 지시하는 말이 붙은 악보라면 연주자에게 그만큼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규칙을 반박하면서 다른 규칙을 세우지 않고,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자리를 곡으로 보여 준 셈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가 하고 묻고 싶어집니다. 적어도 이 글이 확인한 범위, 즉 그 규칙을 물려받은 계보의 연주와 쇼팽 자신의 악보에 관한 한, 왼손 절대 고정을 모든 곡에 적용되는 연주 규칙으로 읽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쇼팽이 박자에 엄격했다는 증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언을 손 하나를 못 박아 두라는 지시로 환원하는 순간, 쇼팽이 왼손에 노래를 준 곡들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녹음이 남은 계보에서 실제로 들리는 것
다행히 이 문제는 짐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쇼팽에게 배운 제자에게 다시 배운 사람들의 연주가 녹음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코찰스키는 1892년부터 1895년까지 네 해 여름 동안 쇼팽의 제자 미쿨리에게 거의 매일 두 시간씩 배웠습니다. 로젠탈도 소년 시절 같은 스승에게 배웠습니다. 두 사람의 녹음이 남아 있으니, 규칙을 전한 바로 그 계보가 실제로 어떻게 쳤는지 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실제로 들리는 것은 왼손과 오른손이 딱 맞지 않는 연주입니다. 악보에는 동시에 치도록 적혀 있는 음을 살짝 떨어뜨려, 왼손이 먼저 짚고 오른손 선율이 조금 늦게 도착하도록 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그 시대의 표현 수단이었고, 19세기에 태어난 피아니스트들의 초기 녹음 다수에서 들립니다. 나단조 전주곡 Op.28 No.6을 파흐만의 1927년 녹음, 로젠탈의 1935년 녹음, 코찰스키의 1939년 녹음으로 이어 들으면 세 사람 모두에게서 이 어긋남이 확인됩니다.
가장 쉽게 들어 볼 곳은 널리 알려진 녹턴 사장조 Op.9 No.2입니다. 왼손이 한 마디를 낮은 음 하나와 화음 둘로 짚어 가는 동안, 오른손 선율이 그 첫 박에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고 조금씩 늦게 얹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코찰스키의 1938년 녹음에서 이 어긋남이 뚜렷하게 들립니다. 같은 곡을 라흐마니노프의 1927년 녹음, 코르토의 1949년 녹음과 이어서 들으면 세 사람이 어긋남을 쓰는 정도와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함께 잡힙니다.
여기서 앞의 규칙이 다시 보입니다. 왼손이 박자를 지킨다는 말은 왼손이 기계처럼 정확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른손이 어디까지 벗어나든 돌아올 자리를 왼손이 잡고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두 손이 어긋나 있는데도 곡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알고 들으면 어긋남이 흠이 아니라 표정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가 듣는 루바토는 무엇이 달라졌나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두 손을 어긋나게 치는 연주는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지금 연주회장과 음반에서 듣는 루바토는 대개 양손이 함께 늦어졌다가 함께 돌아오는 방식입니다. 한 줄만 흔들리던 것이 화면 전체가 늘어났다 줄어드는 쪽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낱말을 쓰면서도 듣는 것이 달라집니다. 옛 녹음에서 어긋남을 처음 들으면 박자가 맞지 않는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반대로 옛 방식에 익숙해진 귀에는 요즘의 정갈한 루바토가 밋밋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잘라 말하기보다, 두 방식이 서로 다른 시간 감각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듣는 편이 훨씬 많은 것을 들려줍니다.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남아 있는 녹음은 아무리 일러도 쇼팽이 죽고 여러 해가 지난 뒤의 것입니다. 코찰스키는 쇼팽에게 직접 배운 사람이 아니라 그 제자에게 배운 사람이고, 그 사이에도 취향은 변합니다. 녹음이 쇼팽의 연주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쇼팽의 소리가 아니라 쇼팽에게서 두 걸음 떨어진 소리입니다.
그래도 그 두 걸음은 글보다 가깝습니다. 회고록의 한 문장은 삼십 년 뒤에 정리된 요약이지만, 녹음은 그 요약을 물려받은 손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보여 줍니다. 오늘 녹턴 사장조를 다시 틀어 보십시오. 왼손이 짚는 박과 오른손 선율이 도착하는 시점을 따로 떼어 들어 보면, 두 손이 완전히 겹치는 순간과 살짝 어긋나는 순간이 번갈아 지나갑니다. 그 어긋나는 자리가 바로 백 년 넘게 이름만 같은 채 내용이 바뀌어 온 그 낱말이 실제로 앉아 있는 곳입니다.
이 글과 이어서 읽을 만한 다시채의 글로는 쇼팽 녹턴 Op.9 No.2 완벽 해설, 피아노의 시인 쇼팽, 쇼팽 빗방울 전주곡, 피아노 역사와 종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