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엔트 공의회가 복잡한 다성음악을 금지하려 했으나 팔레스트리나의 미사 한 곡이 이를 막아 냈다는 이야기,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극적인 서사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시대 음악의 특징을 시기별로 살펴보고, 세속음악과 기악음악의 발달 과정, 그리고 이 유명한 전설의 진실을 함께 정리해 봅니다.
이 시대를 이해하는 열쇠는 한 문장에 있습니다. 1477년 나폴리에서 이론가 요하네스 팅크토리스는 대위법 교과서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지난 40년 안에 지어진 것이 아니면, 배운 사람들이 들을 만하다고 여기는 곡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당대의 음악가가 스스로 우리는 새 음악의 시대에 산다고 말한 셈입니다. 르네상스 음악은 그 새 음악이 이름 있는 작곡가와 인쇄된 악보를 타고 유럽 전역으로 퍼진 150년입니다.
- 시기: 서양음악사에서는 대략 1450년경부터 1600년까지
- 초기(15세기): 존 던스터블의 영국 억양, 부르고뉴 악파(뒤파이·뱅슈아)
- 중기(15세기 후반~16세기 초): 오케겜에서 조스캥 데 프레로 이어진 모방대위법과 순환 미사
- 후기(16세기): 팔레스트리나의 명료한 양식과 베네치아의 분할 합창, 다만 트리엔트 공의회 구원 서사는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
- 세속·기악: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발전, 페트루치의 다성음악 인쇄
르네상스 음악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르네상스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재탄생 또는 부활을 뜻합니다. 이 시기를 르네상스라 부르는 이유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본주의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대체로 1350년부터 1600년까지를 가리키지만 미술, 음악, 문학 등 분야마다 시기 구분에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 음악사에서 르네상스 시대는 보통 1450년경부터 1600년까지로 봅니다. 중세 음악이 교회 전례를 중심에 두었다면, 르네상스에 들어서면서 음악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소리이자 작곡가 개인의 솜씨를 드러내는 예술로도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본 팅크토리스의 문장은 이 시기 구분과도 맞물립니다. 그가 40년이라고 말한 1430년대 무렵은 영국의 존 던스터블과 부르고뉴의 기욤 뒤파이, 질 뱅슈아가 활동하던 때입니다. 팅크토리스는 던스터블을 중심으로 한 영국 음악에서 새 예술이 비롯되었고, 뒤파이와 뱅슈아가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며, 오케겜·뷔누아·레지스·카롱이 곧 그 뒤를 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새 음악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당대 사람이 직접 짚어 둔 기록입니다.
15세기와 16세기에 활약한 플랑드르 악파(부르고뉴 악파와 네덜란드 악파를 포함)의 음악가들은 대부분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일부, 프랑스 북부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이 프랑스 궁정, 교황청,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궁정으로 흩어져 일하면서, 유럽 각지의 음악가들은 저마다 고유한 양식을 더해 새로운 음악 어법과 다양한 장르를 만들어 냈습니다.
세속음악의 대두와 궁정 후원의 시대
중세에도 음유시인의 노래나 14세기 마쇼의 세속 가곡 같은 세속음악은 있었지만, 르네상스에 이르러 세속 다성음악의 양과 갈래가 크게 늘었습니다. 특히 르네상스 후기에는 종교 음악 못지않게 세속 음악이 큰 인기를 누렸고, 다수의 세속 음악 악보가 출판되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음악은 예배를 위한 도구를 넘어, 청중과 교감하며 즐거움을 나누는 오락이자 예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 음악은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교육받은 귀족이나 지식인에게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악보를 보고 노래할 수 있는 소양이 기대되었습니다. 흔히 오타비아노 페트루치가 1501년 악보 인쇄술 자체를 발명했다고 소개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활자로 악보를 찍어낸 첫 사례는 이미 1476년 로마의 인쇄업자 울리히 한이 만든 미사 전례서에서 나타납니다. 다만 그것은 한 줄짜리 성가 악보였습니다. 페트루치의 몫은 여러 성부가 얽힌 다성음악을 처음으로 활자로 찍어 낸 데 있습니다. 그는 1498년 베네치아 정부에 20년 동안 악보 인쇄를 독점하게 해 달라고 청원했고, 1501년 첫 책 〈하르모니체 무지케스 오데카톤〉을 펴냈습니다. 96곡의 세속 노래가 실린 이 책은 종이 한 장을 세 번 인쇄기에 넣어 오선, 음표, 가사를 차례로 찍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케겜과 조스캥의 곡도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인쇄가 바꾼 것은 속도와 거리입니다. 그 전까지 다성음악은 손으로 한 부씩 베껴야 했기 때문에, 한 작곡가의 곡이 다른 나라의 성가대에 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인쇄된 악보는 같은 곡을 여러 도시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부를 수 있게 했고, 플랑드르 악파의 양식이 유럽의 공통 언어처럼 퍼지는 데 힘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음악가들이 자기 이름을 악보에 남기는 일에 마음을 쓴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 르네상스 시대에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
기독교가 여전히 유럽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음악가를 기르고 먹여 살리는 역할은 점점 귀족들의 궁정으로 옮겨갔습니다. 14세기의 마쇼처럼 궁정에서 일한 음악가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귀족의 궁정에 고용되거나 도시의 후원을 받는 전문 직업인으로 활동하는 음악가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여성 작곡가의 활동은 여전히 제한적이었지만, 연주자로 활약하는 여성은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
르네상스 초기, 영국 억양과 부르고뉴 악파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의 다양한 음악 양식이 서로 섞이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작곡가들은 미사, 모테트, 샹송 같은 성악곡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영국에서 건너온 3도와 6도 위주의 풍성한 화성 음향, 이른바 영국 억양(콩트낭스 앙글루아즈)이 대륙에 전파된 것입니다. 이 명칭은 시인 마르탱 르 프랑이 1441년 무렵 부르고뉴 공작에게 바친 시에서 처음 등장했고, 그는 이 새로운 화성 어법의 핵심 인물로 존 던스터블을 지목했습니다. 백년전쟁 시기 영국과 손잡은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이 이 소리를 받아들인 무대였습니다.
르 프랑이 실제로 적은 말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높고 낮은 음악에서 우아한 협화를 만드는 새로운 방식」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놀라운 즐거움이 그들의 노래를 기쁘고 뛰어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가 어떤 음정을 두고 그렇게 말했는지는 시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3도와 6도라는 설명은 후대의 음악학이 악보에서 읽어 낸 것이지, 당대 사람이 그렇게 적어 둔 것이 아닙니다.
팅크토리스도 비슷한 증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음악이 새 예술처럼 보일 만큼 크게 자랐다고 쓰면서, 그 새 예술의 원천은 영국 사람들에게 있었고 그 우두머리가 던스터블이었다고 전한다고 적었습니다. 던스터블 한 사람을 근원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영국 음악가들을 원천으로, 던스터블을 그 대표로 꼽은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바로 이어서, 요즘 영국 사람들은 늘 같은 방식으로만 작곡한다고 꼬집었습니다.
대표적 작곡가로는 영국의 존 던스터블과 부르고뉴 악파(초기 플랑드르)의 기욤 뒤파이, 그리고 샹송 작곡에 뛰어났던 질 뱅슈아가 있습니다. 뒤파이와 뱅슈아는 교회음악을 쓰면서도 궁정을 위한 샹송을 많이 남겼습니다.
르네상스 중기, 오케겜에서 조스캥으로 이어진 모방대위법
르네상스 중기에는 각 성부가 동등한 비중을 가지며 주제 선율을 주고받는 모방대위법이 작곡의 핵심 기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 성부의 가락이 끝나기 전에 다른 성부가 같은 가락을 받아 이어 부르는 방식입니다. 또한 미사 통상문의 다섯 곡, 곧 키리에·글로리아·크레도·상투스·아뉴스데이를 음악적으로 하나로 묶기 위해, 세속 노래나 그레고리오 성가의 같은 선율(정선율)을 모든 곡의 기초로 쓰는 순환 미사 기법이 확립되었습니다.
이 기법의 출발점에 영국이 있습니다. 성 목요일 발 씻김 예식의 성가에서 카푸트(머리)라는 낱말에 붙은 긴 가락을 가져다 쓴 〈미사 카푸트〉는 1440년대 영국의 이름 모를 작곡가가 쓴 것으로 밝혀졌고, 대륙에서 널리 베껴지며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오케겜도 같은 가락으로 〈미사 카푸트〉를 썼는데, 그는 빌려 온 선율을 가장 낮은 성부에 두었습니다. 정선율이 테너 자리를 떠나 맨 아래로 내려가자, 곡의 바닥에서 울리는 소리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이 흐름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인물이 요하네스 오케겜입니다. 그는 프랑스 왕실에서 오래 일한 가수이자 작곡가로, 낮은 음역을 넓게 쓰는 그의 베이스 성부는 그 자신이 베이스 가수였기 때문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뒤파이 세대와 조스캥 데 프레 세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 그는, 어느 선법으로 불러도 성립하도록 설계한 〈미사 쿠이우스비스 토니〉와 곡 전체를 카논으로 짠 〈미사 프롤라티오눔〉을 남겼습니다. 그가 1497년 세상을 떠나자 조스캥은 시인 장 몰리네의 시에 곡을 붙인 추모곡 〈숲의 님프들이여〉로 그를 애도했습니다. 흔히 조스캥이 오케겜의 제자였다고 소개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당대 기록은 없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조스캥이 오케겜의 음악을 여러 번 인용했다는 사실이고, 후대 저술가들이 배웠다고 쓴 것도 선배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뜻이었으리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미사가 왜 정교하다고 불리는지는 악보를 열면 드러납니다. 〈미사 쿠이우스비스 토니〉는 무엇을 적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적지 않았느냐로 만들어진 곡입니다. 악보에 음자리표와 조표가 없어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어느 음자리표를 붙이느냐에 따라 같은 악보가 도리아, 프리지아, 리디아, 믹솔리디아 네 선법으로 달리 울립니다. 선법마다 어울리는 마침꼴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마침을 짜는 것이 이 곡의 숙제였습니다.
〈미사 프롤라티오눔〉은 반대로 적어 놓은 것이 저절로 불어나는 방식입니다. 악보에는 두 성부만 기보되어 있는데 노래하면 네 성부가 납니다. 같은 가락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박자 체계로 부르기 때문에 한쪽이 점점 뒤처지며 벌어집니다. 그리고 두 성부가 벌어지는 음 간격이 곡을 지나며 차례로 넓어집니다. 첫 키리에에서는 같은 음에서 갈라지고, 크리스테에서 2도, 다음 키리에에서 3도로 벌어지다가, 상투스의 오산나에 이르면 간격이 옥타브까지 열립니다. 들을 때는 이 계산을 몰라도 됩니다. 한 가락이 조금씩 어긋나며 자기 자신과 겹쳐 가는 소리에 귀를 두면 됩니다.
르네상스 후기, 팔레스트리나와 트리엔트 공의회 전설의 진실
16세기에는 모방대위법이 더욱 정교해지는 한편, 가사의 뜻과 감정을 음악으로 그려 내려는 가사 그리기 기법이 적극적으로 쓰였고, 모든 성부가 같은 리듬으로 화음을 이루며 가사를 또렷이 들려주는 호모포니 양식도 자주 함께 쓰였습니다. 1517년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갈라지자, 예배를 라틴어가 아닌 자기 나라 말로 드리려는 흐름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 독일 루터교회의 독일어 코랄, 칼뱅파의 프랑스어 시편가, 영국 국교회의 영어 앤섬처럼 자국어를 쓰는 새로운 교회음악이 발전했고, 가톨릭 쪽에서도 가사가 잘 들리는 교회음악에 대한 요구가 커졌습니다.
16세기 후반 음악 활동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였습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로마 악파의 팔레스트리나인데, 그와 관련해 아주 유명하지만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가사가 잘 들리지 않는 복잡한 다성음악을 금지하려 했으나, 팔레스트리나가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를 작곡해 다성음악을 위기에서 구해 냈다는 서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공식 기구로서 다성음악 자체를 금지한 적이 없습니다. 1562~1563년 회기에서 다성음악을 두고 논의가 오간 것은 사실이지만, 공의회의 공식 결정 가운데 음악을 직접 다룬 것은 미사에서 음란하거나 불순한 것이 섞인 음악을 멀리하라는 한 대목뿐입니다. 곡 이름의 주인공인 마르첼루스 2세는 1555년 3주 동안 재위한 교황이고, 이 미사가 정확히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공의회를 설득하려고 쓴 곡이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전설은 오래전부터 자랐습니다. 1607년 작곡가 아고스티노 아가차리는 옛 음악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게 만들어 교황이 교회에서 음악을 내쫓을 뻔했는데, 팔레스트리나가 이 미사로 잘못은 음악이 아니라 작곡가에게 있음을 보였다고 적었습니다. 이 이야기에 장면을 입힌 것이 1828년 팔레스트리나 전기를 쓴 주세페 바이니입니다. 그는 1565년 4월 28일 추기경들 앞에서 미사 세 곡을 불렀고 그 가운데 이 미사가 가장 큰 찬사를 받았다고 묘사했습니다. 교황청 성가대 일지에는 그날 비슷한 모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어느 미사를 불렀고 반응이 어땠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미사가 가사가 잘 들리도록 여러 성부가 같은 리듬으로 말을 맞추는 대목을 많이 쓴 것은 사실이고, 그 점이 반종교개혁 시대가 원하던 방향과 맞아떨어졌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후기 르네상스를 팔레스트리나 한 사람으로만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의 벨기에 몽스 출신인 오를란도 디 라소는 1556년부터 뮌헨의 바이에른 궁정에서 일하며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로 2,000곡이 넘는 성악곡을 남겼습니다. 네 언어로 노래를 쓴 그의 이력은 플랑드르 출신 음악가가 유럽 전역에서 일하던 이 시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는 팔레스트리나와 같은 159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국의 윌리엄 버드는 1575년 스승으로 여겨지는 토머스 탤리스와 함께 여왕에게서 21년간 악보 인쇄를 독점할 권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둘이 함께 펴낸 첫 곡집 〈칸티오네스 사크라이〉는 팔리지 않아, 2년 뒤 여왕에게 손실을 메워 달라고 청원해야 했습니다. 인쇄가 음악을 퍼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돈이 되지는 않았던 셈입니다.
같은 시기 베네치아에서는 다른 소리가 자랐습니다. 1527년부터 1562년까지 산마르코 대성당의 악장을 지낸 플랑드르 출신 아드리안 빌라르트는 서로 떨어진 두 성가대가 번갈아 노래하는 분할 합창 음악을 썼습니다. 1585년부터 같은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한 조반니 가브리엘리는 여기에 악기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고, 어떤 악기가 어디를 연주할지와 셈여림을 악보에 적은 작곡가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1597년 그의 곡집 〈거룩한 교향곡〉이 나온 뒤 독일을 비롯한 각지의 음악가들이 이 소리를 배우러 베네치아로 왔습니다. 성당 양쪽에서 소리가 주고받는 이 음악은 다음 시대 바로크의 대비 감각으로 이어집니다.
세속 노래(마드리갈)와 기악 음악의 발달
15세기 초기 르네상스의 세속 노래(부르고뉴 샹송 등)에는 아직 중세 후기 정형시 형식(발라드, 론도 등)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각국은 자국어의 특성을 살린 세속 성악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프랑스의 파리 샹송, 이탈리아의 마드리갈, 영국의 마드리갈과 류트 가곡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장르는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입니다. 16세기 마드리갈은 수준 높은 서정시에 모방대위법과 대담한 화성, 가사 그리기 기법을 결합해 사랑과 감정을 표현한 다성 세속 성악곡입니다. 시는 14세기 시인 페트라르카의 작품이 즐겨 쓰였는데, 1501년 문인 피에트로 벰보가 펴낸 페트라르카 판본이 이탈리아어 시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것이 배경입니다. 주로 궁정이나 아카데미에 모인 사람들이 무반주로 불렀습니다. 1520년대 피렌체와 로마에서 시작된 마드리갈은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베네치아로 무게가 옮겨 갔습니다. 1527년 로마 약탈과 1529~1530년 피렌체 포위로 두 도시의 음악 활동이 움츠러든 사이, 베네치아는 유럽 악보 출판의 중심지였고 산마르코 대성당이 각지의 음악가를 불러 모으고 있었습니다.
양식은 시기를 거치며 뚜렷하게 변화했습니다. 베르델로와 아르카델트가 1530년대 초기 마드리갈의 틀을 다졌는데, 1539년 나온 아르카델트의 〈마드리갈 제1권〉은 그 시대에 가장 많이 다시 찍힌 마드리갈집이 되었습니다. 치프리아노 데 로레는 1542년 첫 마드리갈집에서 다섯 성부를 기본으로 삼고 반음계적 화성과 극적인 표현을 끌어들였습니다. 이 흐름은 후반부에 이르러 제수알도의 극단적인 반음계 실험과 몬테베르디의 두 번째 작법으로 이어졌습니다. 1600년 이론가 아르투시가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에 쓰인 불협화음을 잘못이라고 공격하자, 몬테베르디는 1605년 마드리갈 제5권 서문에서 옛 규칙을 따르는 첫 번째 작법과 달리 가사의 표현을 위해 규칙을 넘어서는 두 번째 작법이 있다고 맞섰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성악음악이 여전히 중심이었지만, 기악음악도 점차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부터 세속 노래를 악기와 함께 부르는 일은 자연스러웠고, 이 시기에는 류트 반주로 노래하거나 다성 노래의 각 성부를 악기로 겹쳐 연주했습니다. 페트루치의 〈오데카톤〉에 실린 곡 대부분에 가사가 붙어 있지 않은 것도 악기로 연주하는 쓰임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춤곡 반주와 사교 모임을 위한 기악곡은 16세기에 이르러 악보 인쇄와 함께 대량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류트, 비올라 다 감바, 리코더, 쳄발로, 트럼펫 등 다양한 악기가 쓰였습니다. 이때 다져진 기악음악의 기초는 1600년 이후 바로크 시대에 기악음악이 성악음악과 나란히 서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앞의 이야기는 [서양음악사 3] 아르스 안티쿠아와 아르스 노바에서, 다음 시대는 [서양음악사 5] 바로크 음악에서 이어집니다. 전설의 주인공이 궁금하다면 팔레스트리나 생애와 음악을, 마드리갈에서 오페라로 건너간 작곡가는 몬테베르디의 생애와 작품을 보시면 됩니다. 다음에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를 듣는다면 크레도 부분에서 여러 성부가 한꺼번에 같은 낱말을 말하듯 부르는 순간을 찾아보십시오. 전설은 사실이 아니지만, 가사가 들리게 하려던 그 소리는 악보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팔레스트리나가 다성음악을 구했다는 이야기, 정말 사실인가요?
사실이 아닙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성음악을 공식적으로 금지한 적이 없고,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가 공의회를 설득하려고 쓰였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1607년 아가차리의 글에 이미 나타나고, 1828년 주세페 바이니의 팔레스트리나 전기에서 극적인 장면으로 굳어졌습니다.
Q.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럼 교회음악에 대해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았나요?
다성음악 자체를 금지한 적은 없습니다. 공식 결정에 남은 것은 미사에서 음란하거나 불순한 것이 섞인 음악을 멀리하라는 수준이었고, 가사 전달이나 화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회의장 안팎에서 다성음악을 두고 논의가 오간 것은 사실이며, 명료하고 경건한 양식을 향한 흐름은 공식 결정이라기보다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Q. 조스캥은 오케겜의 제자였나요?
그렇게 소개되는 경우가 많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조스캥이 오케겜에게 배웠다는 당대 문서는 없고, 그 이야기는 16세기 후반 이후의 저술가들에게서 나옵니다. 조스캥이 오케겜의 음악을 인용하고, 1497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숲의 님프들이여〉를 지은 것은 확인됩니다.
Q. 페트루치가 정말 악보 인쇄술을 처음 발명한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활자로 악보를 찍어낸 사례는 1476년 울리히 한의 미사 전례서에 이미 있습니다. 페트루치의 몫은 오선·음표·가사를 세 번에 나눠 겹쳐 찍는 방식으로, 여러 성부가 얽힌 다성음악을 처음 활자로 찍어 낸 데 있습니다. 1501년의 〈오데카톤〉이 그 첫 책입니다.
Q. 영국 억양이라는 화성 양식은 누구 덕분에 대륙에 알려졌나요?
이 표현은 1441년 무렵 시인 마르탱 르 프랑이 부르고뉴 공작에게 바친 시에서 처음 등장했고, 그 시는 존 던스터블을 대표 인물로 꼽았습니다. 이론가 팅크토리스도 새 예술의 원천이 영국 사람들에게 있었고 그 우두머리가 던스터블이었다고 적었습니다. 3도와 6도를 살린 그의 화성 감각은 뒤파이와 뱅슈아 세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Q. 마드리갈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달라졌나요?
초기(베르델로·아르카델트)에는 비교적 정돈된 양식으로 출발했지만, 1540년대 치프리아노 데 로레가 다섯 성부와 대담한 반음계적 화성을 끌어들였습니다. 후기에 이르면 제수알도의 반음계 실험이 극한까지 치닫고, 몬테베르디가 가사의 표현을 위해 옛 규칙을 넘어서는 두 번째 작법을 내세우며 다음 시대인 바로크로 가는 다리를 놓았습니다.
Q. 르네상스 시대 기악음악은 왜 성악음악만큼 주목받지 못했나요?
이 시기는 여전히 성악, 특히 가사를 살린 다성음악이 음악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악은 주로 춤을 반주하거나 노래의 성부를 겹쳐 연주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다만 이 시기에 쌓인 춤곡·변주곡 같은 기악 형식의 기초가 있었기에, 다음 세기인 바로크에 들어 기악음악이 성악음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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